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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옹 Jul 16. 2020

셀프 도배 _ 헌 것과 새 것

2019. 6. 13.


어제는 남편과 함께 태어나 처음으로 셀프 도배라는 것을 해봤다. 영국으로 가기 전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인데 아이 방 벽지에 온갖 낙서가 다 돼 있어서 벽지 도배를 새로 해야 했다. 도배 시공업체를 통하자니 30만 원은 족히 나갈 것 같고 좀 더 저렴한 방법 없을까 고민하던 우리는 풀이 발라진 벽지를 사서 직접 붙이기로 결정했다.


주문한 벽지가 배달됐고, 우리는 아이가 잠들기를 기다렸다. 이런 작업은 야심한 밤에 하는 것이 제 맛. 밤 9시가 넘어가자 아이는 이내 골아떨어졌고 우리는 양 손에 면장갑을 끼고 작업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아이 방에 있던 장난감 와 책 등의 짐을 다 밖으로 꺼내는 것.  역시 짐은 다 꺼내놓고 보면 생각했던 것보다 늘 더 많다. 그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기존의 벽지를 뜯어내는 일인데, 이때 생각보다 많은 먼지가 발생한다. 벽지를 뜯어낼 때마다 목이 따끔거리는 나쁜 물질이 떨어져 나왔다. 마스크 착용이 필수다. 최대한 빨리 벽지를 뜯어내고 재빨리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이제 대망의 벽지 붙이기 작업에 돌입. 이미 풀이 발려져 있는 상태라 벽지는 생각보다 축축하고 잘 찢어졌다. 조심조심 수평을 맞춰 가며 구김이 가지 않도록 붙이는 것이 핵심인데, 우리 둘 다 처음이다 보니 실수도 하고 몇 군데 찢어지기도 했다. 혼자서는 절대 못하는 일이고 반드시 2인 이상의 인력이 필요하다. 한 명이 밑에서 잡아주고 한 명이 의자를 밟고 올라가 위에서부터 벽지를 붙이며 아래로 쓸어내려야 한다. 우리는 도배하시는 분들이 괜히 돈을 많이 받는 게 아니라며 도배가 이렇게 어려운 건지 몰랐다, 그래도 돈을 아껴서 좋다 등의 수다를 떨어가며 벽지 부착 작업을 끝냈다.


벽지를 붙였다고 끝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다음 작업은 벽 밖으로 튀어나온 불필요한 부분들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일이다. 이 역시 벽지에 풀이 발라져 있기 때문에 깔끔하게 자르기가 굉장히 어렵다. 깨끗하게 잘라내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커터칼로 꽤 많은 힘을 줘야 한다. 이 작업은 남편이 진행하고 나는 나머지 뒷정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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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인가 내가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아이 방에서 키특키특 웃는 소리가 났다. 방으로 가보니 남편과 아이는 벽에다가 색연필로 낙서를 하고 있었다. 내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보고 있으니 아이는 더 재밌다는 듯이 웃으면서 낙서를 해댔다.

"여보?"

"후찬이가 이런 표현을 좋아하는 거 같아. 도화지는 너무 작으니까 내가 그냥 벽에 그리라고 했어. 우리 아들 진짜 잘 그리지? 선이 살아 있다니까."


해맑게 웃는 남편과 아이의 모습에 나도 웃음이 나왔다.

'에휴. 네가 좋다면 그려라.'


그렇게 시작된 아이 방 낙서는 사방으로 번져갔고 급기야 나까지 가세해 벽지에다 커다란 나무와 나무에 살고 있는 다람쥐를 그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벽지에다가 그림을 그리며 아이에게 동물이나 사물을 알려주기도 했고, 벽지가 그림으로 꽉 차면 전지를 사서 위에 붙이고 다시 새로운 그림을 그려가며 아이와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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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렇게 해서 시작됐던 낙서 가득한 벽지는 오늘 깨끗한 흰 벽지로 탈바꿈했다. 도배 작업은 밤 12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지만, 그래도 처음 치고는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우선 8만 원 정도의 예산으로 방 하나의 도배를 완료했으니 경제적이었다. 또 '해야지 해야지' 하고만 있던 일을 실제로 해치우니 기분이 홀가분했다. 벽지를 붙이는 건 좀 어려웠지만 기존에 있던 벽지를 뜯어낼 때는 스트레스도 풀리고 쾌감도 느껴졌다.


#낡은 것들을 버리고 새것으로 교체하는 것.

이건 참 인생에서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성경에도 포도주를 낡은 주머니에 넣으면 안 된다고, 새 주머니에 넣어야 한다고 하는 말씀이 있는 것처럼, 정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낡아지는 것들은 주기적으로 버려주고 빈 공간을 맞이해야 신선하고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버려나가는 것.

어쩌면 인생은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버려나가는 과정 같기도 하다. 그래야만 새로운 것들이 들어온다. 물론 소중한 추억이나 기억은 가슴에 깊이 간직해야겠지만 '물건'이 나를 삼키지 못하도록, 여유와 공간, 여백 이런 것들이 우리 삶에는 필요하다.


#빈 공간을 갖는 것.

이건 마음의 여유가 그만큼 존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비어있음에 자유와 일종의 쾌감을 느끼는 것. 텅 빈 공간은 창조의 공간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집에도, 마음에도 빈 공간이 존재해야 한다.


결혼하고 4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아이가 태어나 자라면서 많은 물건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제 우리 가족은 '영국행'이라는 미션을 가지고 새롭게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떠나는 사람의 발걸음은 가벼워야 하고 짐 역시 가벼워야 한다. 이것저것 다 이고 갈 필요가 없다. 정말 생존에 필요한 것들 중심으로 가볍게, 양보다는 질로 승부해야 한다. 질 좋은 상의 몇 벌, 오래 입어도 괜찮은 청바지와 속옷, 양말, 수건 몇 개씩. 많이도 필요 없다. 최소한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양으로 짐을 꾸려야 한다.

그리고 영국에서 집이 구해지면 그 집의 컨디션에 맞춰서 생활 살림을 구하고 세팅을 해야 한다. 모든 것을 새것으로 채울 필요는 없다. 영국 내에도 존재하는 벼룩시장 또는  현지의 플리마켓 등을 적극 활용할 것이다. 다시 영국의 생활을 정리할 때 또다시 가볍게 다시 떠날 수 있도록.


새하얀 벽지만큼 마음도 환하고 깨끗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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