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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이 Sep 29. 2019

탈주불가능한 주체, 사라진 해방의 꿈

Lukács György-역사와 계급의식

 “자본주의 사회라는 인류의 발전 단계에서 제기되는 문제라면 그것이 어떤 문제든 최종적인 분석에서는 그 해결을 상품 구조의 신비의 해결에서 찾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가장 빠르고 광범위하게 운동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상품이다. 자본주의는 바로 상품의 운동법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제기되는 어떤 종류의 문제이든 그것은 상품과 그 상품이 운동하는 형식 또는 구조에 대한 문제와 동시에 제기되어야 한다. 루카치는 이러한 상품의 운동형식 또는 구조의 본질에 대해 “그것은 사람들 간의 관계가 사물의 성격을 지니며, 그래서 이로부터 일종의 ‘유령적 대상성’이 성립되며 이것이 대상성의 근본적 지반인 인간들 간의 관계를 외견상 완전히 완결적이고 합리적인 듯이 보이는 엄격한 자기법칙성으로써 은폐한다는 데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루카치에게 상품 형식은 단지 상품의 교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조직하는 근본원리이자 “전 사회의 현실적인 지배 형식”이다. 그리고 상품 형식 속에서 성립되는 유령적 대상성으로 인해 “인간 특유의 활동, 인간 특유의 노동이 객관적인 어떤 것, 인간으로부터 독립되어 인간에 낯선 자기법칙성을 통해서 인간을 지배하는 어떤 것으로서 인간에 대립되어 다가온다.” 즉 사물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사물화는 객체적 측면과 주체적 측면 모두에서 발생한다. 객체적 측면에서 인간의 노동이 생산한 사물들과 이러한 사물들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인간으로부터 독립되어 하나의 객관적인 법칙들을 가진 완결된 형태로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행동은 그러한 기성의 ‘법칙들’의 있을 수 있는 가능적 효과들을 확률적으로 계산하는 데에 머물러 있고, 스스로 다른 ‘법칙’을 적용하여 진행 경과 자체에 개입하려는 시도는 조금도 하지 않는다.” 주체적 측면에서 인간의 고유한 활동인 노동은 인간 자신에게서 대립되어 객관화되고 상품화된다. “이 상품은 인간에게 낯선 객관성, 사회적 자연법칙으로서의 객관성에 부속되며 욕구 충족의 재화가 상품으로 화할 때 그러하듯이 인간으로부터 독립해서 그 스스로의 운동을 수행한다.” 


 이와 같은 자본주의적 합리화, 즉 사물화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계산, 계산가능성을 지향하는 합리화의 원리”이다. 노동 자체, 그리고 노동의 객체, 그 결과로서의 사물, 그리고 노동의 주체, 요컨대 노동을 둘러싼 모든 것들은 전부 성취되어야 할 목표들에 대한 엄밀하고도 과학적인 예산(豫算)을 수행하기 위한 숫자로 전환된다. 이런 과정에서 “노동자의 인간적 속성들과 특수성들은 … 더욱더 단순한 오류의 원천으로서만 등장한다.” 합리적으로 조직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적이라는 것은 단지 그 합리성을 깨뜨리는 불완전성과 비합리성으로만 여겨지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노동자는 자신의 인격적 속성들을 모조리 상품으로 내놓게 되면서, 단지 “정관적 태도”로 법칙에 적응하고자 노력할 뿐이게 된다. 그렇게 하여 “모든 ‘사물들’의 상품 구조 및 사물들의 관계의 ‘자연법칙성’은 기성의 것으로 발견되는 어떤 것, 지양될 수 없는 소여”로, 다시 말해 상품과 사물화는 이 사회의 근본원리이자 자연적 법칙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나아가 사물화는 단지 노동의 신체적 활동과 그 결과물에만 적용되는 것을 넘어 “노동 과정을 ‘심리학적’으로 분해하는 최근에 이르러서는, … 노동자의 ‘영혼’에까지 그 영역을 넓히고 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체제가 경제적으로 부단히 더 높은 단계를 향하여 자신을 생산·재생산하는 것과 비례해서, 사물화 구조는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더욱더 심층적으로, 운명적으로, 구성적으로 인간 의식 속에 파고든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자본주의는 자신의 상품 형식이 사회의 전 영역에 남김없이 파급되어 모든 것을 자본주의적 생산법칙에 종속시키고자, 최소한 자신의 상품 형식을 방해받지 않을 정도로 길들이고자 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적 생산에 구조적으로 적합한 법률과 국가 등등을 생산한다. 이제 자본주의는 단지 경제학에서의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단지 경제 영역에서만 소외 또는 사물화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과 사회의 모든 통일적 구조로서의 자본주의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자신의 속성이나 가능성도 전개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루카치가 자본주의의 형식적 합리화, 즉 사물화가 어떠한 한계도 갖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사물화 논리는 그것의 본질적 속성인 형식주의로 인해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형식주의는 법칙들의 필연적이고 통일적인 체계를 완성하기 위해 법칙들이 실제로 작동하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것들과 그것들의 우연성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실제와 똑같은 크기와 정밀도를 가진 지도는 지도 자체가 곧 실제가 되는 것처럼, 모든 구체성과 우연성을 포괄하려는 법칙은 그 자체가 곧 실제 세계가 된다. 따라서 지도를 만들기 위해 구체성으로부터 벗어나 추상화와 형식화를 통한 생략과 축약을 도입하는 것처럼, 자본주의적 법칙과 형식적 합리화는 물질적이고 개별적인 것들이 가지는 구체성과 개별성에서 추상되고 합리화될 수 있는 상품형식으로 도약한다. 그러나 이러한 추상화와 합리화는 정작 그 법칙들이 적용되어야 할 구체적 물질들과 유리되어 있기 때문에 양자의 접합은 단지 우연적인 방식으로만 작동할 뿐이고, 나아가 법칙들 사이의 관계 역시 유기적 연속성이 단절된 채 각자의 독립성과 우연적 접합만이 존재하게 된다. 요컨대 자본주의적 합리화와 철저한 과학화는 역설적이게도 우연성에 의해 유지되는 극히 비합리적이고 미신적인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바로 이 합리성의 비합리성은 우연적 접합이 단절되는 위기의 시기에 갑작스럽게 돌출하게 된다. 그러나 루카치는 곧바로 이러한 위기의 시기에도 그것이 자본주의적 사물화에 대한 전체적 조망으로까지 나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미 인간의 영혼까지 사물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체의 상(像)은 모두 상실”되었으며,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은 “개인들의 머리 너머에서 관철될 수밖에 없으며, 또한 결코 완전하게 그리고 적절하게 인식가능한 것일 수도 없다. 왜냐하면 전체의 완전한 인식이란 그것을 인식한 주체에게 자본주의 경제의 폐기와도 같은 독점적 지위를 보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난 여러 번의 경제적·정치적 위기 속에서도 혁명이 일어나기는커녕 오히려 자본주의의 진화된 합리화와 사물화만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로 인해 전체의 상이 상실된 곳에서는 어떤 심급이나 주체도 자본주의에 대한 전체적 인식이 불가능하고 따라서 누구도 자본주의 경제를 폐기할 수 있는 독점적 지위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별 분과 과학들과 그 학문들을 종합하는 전체로서 포괄적 학문, 예컨대 철학에 의해서도 이러한 사물화에 대한 인식은 성취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철학은 개별과학들이 경험계 현실들을 대하는 것처럼 개별 과학들을 대”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철학은 개별과학들이 구체성을 지닌 물질과 인간을 “부동(不動)의 소여(所與)”로 대하는 것처럼 개별과학들을 그렇게 대한다. 따라서 “개별과학들의 형식주의적 개념 형성이 철학의 불변적으로 주어진 지반으로 되고 있는 한에서는 형식주의의 기초인 사물화를 통찰하려는 노력으로부터 가망 없이 멀어지는 과정은 최종적으로 완결된다. 이제 사물화된 세계가 최종적으로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것으로는 유일하게 가능한 세계, 개념적으로 파악되고 파악될 수 있는 유일한 세계로 현상하게 된다.”


 결국 루카치에게 있어서 근본적인 “입장의 발본적 변화는 부르주아 사회의 토양 위에서는 불가능하다.” 자본주의의 “영원한 철칙” 속에서 주체는 어떠한 방식으로의 탈주도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물론 루카치는-베버가 자본주의적 기업가를 유일하게 탈주가능한 심급으로 여긴 것과는 달리-프롤레타리아를 이러한 자본주의의 사물화를 해체하고 해방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한다. (이때 관료와 같은 정신노동자는 그러한 주체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자본주의 분석에서 루카치가 보인 과학적 엄밀성에 비하면 낙관적이다 못해 신비주의적으로 보인다. 프롤레타리아가 사물화에 저항해 혁명을 가져올 수 있는 이유는, 다른 사물화의 대상들과는 달리 자본주의의 사물화가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에는 비교적 덜 진행되기 때문이다. 즉 모든 것을 형식주의적 합리화를 통해 남김없이 사물화하는 자본주의가 프롤레타리아의 “인간적·영혼적 본질”만큼은 완전히 정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남아 있는 영혼의 본질은 프롤레타리아로 하여금 자신의 노동력과 상품의 관계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구성하며, 이로부터 계급의식이 생겨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루카치의 주장은 허무주의로 전락하지 않기 위한 희망적 사고이자, 마르크스주의자로서 해방의 담지자인 프롤레타리아라는 개념을 놓지 않기 위한 집착이다. 이런 루카치적인 해방이 가지는 관념론적이고 낙관적이며 신비주의적인 성격은 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며,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마르크스와 베버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루카치는 단지 그것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낼 뿐이다. 우리는 원한다면 이 목록에 더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베버주의자들 또는 그 둘의 종합하려 시도하는 학자들을 추가할 수 있다. 카우츠키, 로자 룩셈부르크, 베른슈타인 등등.


 왜 자본주의에 대한 과학적이고 엄밀한 분석에도 불구하고 해방에 관한 담론은 그토록 관념론적이고 낙관적이며 신비주의적으로 되어버리는 것일까? 그것은 위의 학자들이 전자로부터 후자를 도출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하고 과학적인 분석 속에서 그 내적 모순을 파악하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균열과 위기의 징후들을 찾아내 이를 통해 자본주의를 내파(implosion)하는 방식으로 해방을 추구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 가지는 치명적인 문제는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이 갈수록 과학적이고 엄밀해질수록, 그래서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인 지배이데올로기가 될수록-물론 그것은 실제로 그러한데-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갈수록 좁아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가 가지는 내적 모순과 그로인해 발생하는 위기와 탈선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대한 최종적 분석 속에서 인간은 루카치가 지적한 것처럼 그것이 위기이자 탈선이며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이 드러난 것이라는 전체적이고 완전한 인식을 할 수 없다. 위기가 위기로 인식되지 못하고 모순이 모순으로 인식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위기가 인간의 예속되고 사물화된 의식이 해방을 위한 의식, 마르크스주의적 표현으로는 계급의식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겠는가.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의 여러 논리들을 과학적이고 엄밀하게 분석함으로써 그 속에서 자본주의의 논리를 내파하고자 하는 해방의 기획에는 두 가지 길만이 마련되어 있을 뿐이다. 허무주의 속으로 빠져들거나 신비롭고 대책 없는 낙관주의로 도피하거나.


 우리는 해방의 기획을 새로운 토대 위에 정초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외나 합리화, 사물화 같은 자본주의의 여러 논리들(이 모든 것을 통틀어 불평등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결국 자본주의의 논리들이 지향하는 것은 불평등의 정당화이기 때문이다.) 모두에 괄호를 치고 한 쪽으로 치워놓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해방의 기획은 그 모든 것과는 다른 것 위에 정초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해방의 기획이 정초될 이런 토대의 논리는 불평등의 논리와 대비되는 평등의 논리이다. 그러나 평등의 논리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든지, 모든 사람은 평등해야 한다와 같은 주장을 하지 않는다. 그런 주장들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진리치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치는 아무것도 없는 백지 위에서 얻어질 수 없다. 일군의 유능한 마르크스주의적 또는 베버주의적 학자들이 불평등의 논리를 내파함으로써 평등의 논리를 등장시키기 위해 노력한 것은 바로 불평등의 논리가 평등의 논리가 가지는 진리치를 보장하는 토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불평등의 논리에 괄호를 치고 한 쪽으로 치워놓은 우리로서는 평등의 논리가 진리치를 가진다고 말한다면 앞서의 딜레마를 반복하거나 무로부터 진리가 생겨나는 또 다른 종류의 신비주의를 도입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등의 논리를 과학의 방법으로 검증해야 한다. 즉 우리는 평등의 논리를 단지 가설로 대할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설 위에서 무엇이 실천될 수 있는지, 무엇이 성취될 수 있는지 끝없이 실험을 반복할 뿐이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우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의 실천, 우리의 해방은 바로 이런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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