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orgio Agamben - 장치란 무엇인가? 장치학을 위한 서론
우리의 삶을 한 번 찬찬히 뜯어보면, 우리의 삶은 수많은 물건들과 매우 긴밀하게 얽혀있다. 이때 물건들에는 단순히 어떤 물리적인 사물들만이 포함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 또는 정부와 같은 거대한 기구들에서부터 술과 담배와 같이 매우 작은 것들에 이르는 모든 것을 전부 포괄한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이 물건들과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자연인처럼 살아간다고 해서 이러한 물건들과 결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방송에서 오히려 보여지는 것은 산 속에서도 물건들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가스버너를 사용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자연인은 여전히 대한민국이라는 정부에 소속되어 주민등록증을 가지는 국민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도 자연인은 언제나 물건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바로 이러한 물건, 인간의 삶과 분리불가능한 이 물건에 대해 아감벤은 장치(dispositif)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아감벤에 따르면 장치(dispositif)라는 단어의 계보는 중세 초기에 오이코노미아(oikonomia)라는 용어가 신학에서 중요하게 사용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오이코노미아는 고대 그리스어로, 오이코스(oikos, 가정)의 관리를 뜻하는 말이며, 이는 경영의 의미로도 확대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오이코노미아에 대해 “지식적 패러다임이 아니라 어떤 문제나 특수한 상황에 그때그때 직면해야 하는 프락시스, 즉 실천적 활동”이라고 말한다.
신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는 이 오이코노미아라는 용어가 신학에 도입된 것은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옹호하기 위해서이다. 신은 한 분이시지만 신격(神格)으로서는 세 분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은 직관적으로도 이해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유일신을 믿는 그리스도교에 인류 역사에 뿌리 깊은 다신론적 태도를 다시 도입하게 될 위험을 안고 있다. 오이코노미아는 이러한 이유로 삼위일체에 대해 격렬하게 반발하는 반대파들을 설득하기 위한 논리로 신학에 도입된다. “신은 그 존재와 실체에 관해서는 분명히 하나이다. 그렇지만 신의 오이코노미아에 관해서는, 즉 신의 가정, 신의 삶, 신이 창조한 세계를 관리하는 방식에 관해서 신은 삼중이다. 좋은 아버지는 몇 가지 기능과 몇 가지 의무를 자식에게 위임하면서도 자신의 권력, 자신의 단일성을 상실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신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간의 역사의 ‘경제’, 행정, 통치를 위임한다.” 요컨대 신은 그 존재에서는 유일하고 분할될 수 없는 존재이지만, 인간세계의 관리, 통치를 위한 일종의 방편으로서 세 개의 신격을 통해 이 땅에 내려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오이코노미아의 논리를 통해 삼위일체의 교리와 “섭리에 토대를 둔 신의 세계통치라는 관념”은 그리스도교에 녹아들 수 있었다.
하지만 아감벤에 따르면 이런 논리는 하나의 희생을 치르고서야 가능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신에 있어서 존재와 행위, 존재론과 실천을 분리”하는 것이다. 오이코노미아의 논리 속에서 “행위(경제, 또한 정치)는 존재에 그 어떤 토대도 갖고 있지 않다.” 신이라는 존재와 삼위일체라는 오이코노미아적 행위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 연관성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존재가 반드시 그러한 방식으로 실천을 해야 할 이유를 존재 내적으로 갖지 않으며, 실천 역시 반드시 그러한 형태로 존재하는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존재론과 실천은 그저 우연적으로 접합된 것일 뿐이다. 아감벤은 바로 이것이 “오이코노미아에 관한 신학적 교의가 서양 문화에 유산으로 남겨준 분열증”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이러한 오이코노미아라는 그리스 용어는 후대에 라틴어로 번역되는데, 이때 선택된 단어가 바로 디스포지티오(Dispositio)이다.
이 오이코노미아 또는 디스포지티오의 개념은 헤겔이 실정종교에 대해 행한 비판에서 실정성(Positivität)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등장하게 된다. 헤겔은 『기독교의 실정성』에서 자연종교와 실정종교를 대립시키는데, 자연종교는 인간의 본성(자연)이 신성, 즉 신적인 것과 무매개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종교를 가리킨다. 이에 반해 실정종교는 “특정한 종류의 종교적 교리의 체계”로, 이는 여러 가지 규율화된 계율들, 관습들에 대한 복종을 강조하는 것이다. 실정종교에 따르면 이러한 계율들은 “우리의 의지와는 독립적으로 진리로 여겨지고 받아들여져야 하는 진리, … 종종 객관적인 진리라고 불리는 진리의 체계”이며, 이 진리의 진리성은 “우리가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권위”에 의해 보증되는 것이다. 이 권위는 신적 권위로서, 이러한 신적 권위는 계율들에 대한 복종을 명령한다.
헤겔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단 하나이기 때문에 자연종교는 단 하나 존재”하는 반면, “실정종교는 다양한 종류로 존재할 수 있다.” 나아가 이는 실정종교가 “이미 반(反)자연적인, 또는 초자연적인 종교”임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 종교는 오성과 이성과는 관계없는 개념과 인식으로 채워져 있으며, 인간에게 자연스럽지 않은 감정과 행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실정종교에서 감정은 강제적인 그리고 기계적인 자극에 의해 발생하며, 행위는 명령에 따른 혹은 자발성이 전혀 없는 복종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단 하나인 인간의 본성과 그에 기초한 자연종교로 돌아가야 하는가? 그런데 단 하나인 인간의 본성, 즉 자연의 보편적인 개념은 “무한히 모양을 달리하며 나타난다.” 즉 인간의 본성에 대한 유일한 진리는 인간의 본성은 끊임없이 변형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 즉 자연에 대한 개념적 포착은 필연적으로 불가능하다. 어떤 식으로든 자연에 대한 개념화는 “생동적인 자연(본성)”과 영구히 다르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다르게 본다면, “개념의 입장에서 단순한 변형태, 순수한 우연성 그리고 불필요한 잉여 등이 (생동적인 자연의 입장에서) 필연적인 것, 생동적인 것, 그리고 아마도 유일하게 자연스러운 것이자 아름다운 것으로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본성, 즉 자연에 기초한 종교라는 것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고정된 것이 없는 끊임없는 변화와 혼돈 속에서는 어떤 것도 그 ‘위에’ ‘세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로서는 “만약 인간의 일상적인 삶에 자연스러운 감정, 즉 본래적 자연의 감정이 없다면 저 자연적인 감정을 산출하기 위해 강압적인 기구가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이 감정에는 언제나 강제적인 무엇이 함께 존재하기 마련이다. 동시에 모든 것이 비자연적으로 되어 버린 시기에는 가장 자연적인 종교가 요청하는 행위도 명령과 맹목적인 복종에 의해서 수행될 뿐이다.” 요컨대 헤겔에 따르면 “종교는 이제 실정적이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결코 어떤 종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 이폴리트(Jean Hyppolite)에 따르면 헤겔이 실정성이라는 단어로 의미하는 것은 “역사적 요소”이다. “그것은 외부의 권력에 의해 개인에게 부과되어, 이른바 신앙이나 감정의 체계 속에 내면화된 규칙·의례·제도가 주는 모든 부담을 함께 가리키는 말이다.”
오이코노미아 또는 실정성이라는 개념은 푸코에게서 장치라는 개념으로, 더 확대된 의미를 가지고 등장한다. 푸코는 장치(dispositif)라는 단어를 종교적 의미에서 해방시켜 “담론, 제도, 건축상의 정비, 법규에 관한 결정, 법, 행정상의 조치, 과학적 언표, 철학적·도덕적·박애적 명제” 등 “말해진 것이든 말해지지 않은 것이든” 이 모두를 포함하는 이질적인 요소들의 집합 전체를 통칭하는 데 사용한다. 하지만 푸코에게 장치는 단순히 요소들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이름이 아닌데, “장치 자체는 이런 요소들 사이에 수립되는 네트워크”이다. 즉 “장치란 (이른바) 일종의 형성물”이다.
푸코에 따르면 이러한 장치는 “어떤 순간에 긴급함에 답하는 것을 주요 기능”으로 한다. 따라서 장치는 “늘 구체적인 전략적 기능을 갖고 있으며, 늘 권력관계 속에 기입된다.” 즉 장치는 항상 권력관계 속에서 그러한 권력관계를 발전시키거나 봉쇄하거나 또는 권력관계를 안정화시켜 사용하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개입이다. 나아가 이러한 장치는 권력관계로부터 생겨나고 동시에 권력관계를 생성하는 지식관계와도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다시 말해, “장치 그 자체는 권력관계와 지식관계의 교차로부터 생겨난다.”
푸코에게 장치는 그가 “‘보편적인 것들’이라고 비판적으로 정의한 것의 자리를 차지”한다. 푸코는 “국가, 주권, 법, 권력과 같이 그가 ‘보편적인 것들’이라고 부르는 일반 범주나 관념적 실체를 다루기를 늘 거부했다.” 그러나 푸코가 ‘보편적인 것들’로 불리는 무언가에 대해 연구하지 않은 것은 아니며, 장치는 바로 이 ‘보편적인 것들’을 부르는 푸코식의 명칭이다. 그러나 ‘보편적인 것들’과 장치는 일정한 차이를 가지는데, ‘보편적인 것들’은 단일한 실체가 있는 것으로, 또는 추상화를 통해 얻어진 일반적 개념으로 생각되는 반면, 장치는 언제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구체적이고 전략적인 개입이다. 그렇다고 해서 장치가 구체적인 “경찰조치나 이러저러한 권력의 테크놀로지”를 일컫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푸코가 말한 것처럼, 이러한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네트워크다.
중세 초기 교부(敎父)들에서 헤겔을 지나 푸코까지, 아감벤이 파헤친 장치의 계보학을 살펴보면, 결국 오이코노미아, 디스포지티오, 실정성, 그리고 장치는 “인간의 행동, 몸짓, 사유를 유용하다고 간주된 방향을 향해 운용, 통치, 제어, 지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실천, 앎, 조치, 제도의 총체”로 정의될 수 있다. 아감벤은 이러한 장치의 개념을 보다 더 극단적으로 일반화한다. 아감벤에 따르면 장치는 “생명체들의 몸짓, 행동, 의견, 담론을 포획, 지도, 규정, 차단, 주조, 제어, 보장하는 능력을 지닌 모든 것”이다. 이러한 장치의 개념은 푸코가 파헤친 바 있는 군대, 병원, 감옥, 학교, 공장, 고해성사, 판옵티콘 등은 물론이고 인간의 모든 사물들과 활동들, 예컨대 컴퓨터와 휴대전화, 농업, 글쓰기 등을 전부 포괄한다. 나아가 아감벤은 언어 역시 장치의 한 종류, 그것도 “가장 오래된 장치”라고 말한다.
이러한 아감벤의 사유에 따르면 모든 존재자는 두 부류로 분류될 수 있다. 한 편에는 “생명체들(실체들)”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그들을 끊임없이 포획하는 장치들”이 있다. “신학자들의 용어법을 사용해 말한다면 한쪽에는 피조물들의 존재론이 있고, 다른 쪽에는 그 피조물들을 선(善)으로 이끌어 통치·지도하려는 장치들의 오이코노미아가 있다.” 그리고 이 실체와 장치의 관계 속에서 주체가 생겨난다. 이렇게 볼 때 “동일한 한 명의 개인, 동일한 하나의 실체가 동시에 다수의 주체화 과정(휴대전화 사용자, 웹 서퍼, 이야기 작가, 탱고 애호가, 반세계화론자 등)의 장소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오늘날 장치의 무한한 증가에 그만큼 주체화 과정의 무한한 증식이 대응한다.” 주체화 과정의 무한한 증식은 본질적인 주체성이 이라는 것이 원래 있었지만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체의 산종(散種)”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이 산종은 모든 인격적 정체성에 늘 따라다니는 가면무도회의 모습을 극단으로까지 밀어붙인다.” 인격이 가면(persona)에서 유래한 단어임을 상기할 때, 오늘날 장치들의 무한 증식에 의한 주체의 산종은 “가면들의 무한증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우리에게 고유하게 속하는 나의 정체성이 아니다. 그 정체성들은 언제나 이러저러한 장치들에 포획된 형태로 존재하는 정체성인 것이다.
따라서 아감벤은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발전은 “장치들의 거대한 축적과 증식”이라고 정의한다. 물론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이 존재한 이래로 장치는 늘 존재해왔다. 구석기시대 사람들 또한 뗀석기와 초보적인 형태의 말을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현대에는 “개인이 살아가면서 어떤 장치의 주조·오염·제어를 겪지 않을 때는 단 한 순간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장치의 보다 본질적인 성격이 드러나게 된다. 헤겔에게 있어서 종교는 언제나 자연적인 감정을 강제적으로 산출하는 실정종교인 것처럼, 장치는 본래적으로 “주체화 과정을 내포”한다. 즉, 장치란 “주체화를 생산하는 하나의 기계이다. 그리고 그런 기계이기에 비로소 통치 기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주체화는 항상 탈주체화를 함축하고 있다. 왜냐하면 장치에 의해 주체가 구성되기 위해서는 장치에 포획되기 이전의 주체(헤겔의 경우에는 자연 본성)가 비(非)진리적 주체로서 구성되고 이를 부정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주체, 즉 장치에 의해 구성된 주체는 그 이전의 주체를 부정하고 새롭게 ‘진보’한 주체로서 구성된다.
그런데 아감벤은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치들은 더 이상 “주체의 생산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탈주체화”의 과정을 통해서 작동한다고 말한다. 즉, 오늘날 주체화와 탈주체화는 서로 거의 차이가 나지 않게 진행되며, 나아가 주체의 재구성 자체가 불필요한 것이, 따라서 “가면을 쓰거나 이른바 유령적인 형태가 아니고서는” 발생하지 않는 것이 되었다. 이제 “주체의 비진리 속에서는 더 이상 어떤 식으로도 주체의 진리가 중요하지 않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체제는 더 이상 주체가 어떻게 구성되는가에 관심을 갖지 않고, 오로지 과거의 부정을 통한 진보에만 관심을 가진다. 그러한 진보가 보드리야르가 말한 것처럼 소비의 진보에 불과한 것임은 물론이다. 이 끝없는 소비의 진보, 쉼 없이 기존의 것이 부정되고 새로운 것이 등장하는 스펙터클의 발전이 현대 자본주의의 유일한 특징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완전한 오이코노미아의 승리 앞에서 권력은 역설에 사로잡힌다. 인간의 가장 미세한 부분들까지 장치들의 통치 앞에 내던져질 때, 권력은 오히려 끝없는 역량부족에 시달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장치들이 삶의 모든 영역에 그 권력을 침투시키고 분산시키면 시킬수록, 통치의 앞에는 붙잡을 수 없는 요소가 더 많이 출현하게 된다.” 그것은 인간의 존재 자체가 끝없이 변화하며 새로운 요소들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유한한 수의 장치들은 그 무한함 앞에서 무력감을 느낀다. 따라서 이렇게 끝없이 변화하며 생겨나는 포착불가능한 요소들은 “통치의 포획에 순종적으로 따르는 만큼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는 듯이 보인다.” 이제 권력의 입장에서 보통의 일반인들은 언제나 파열과 탈주의 가능성을 가진 잠재적인 테러리스트이다. 하지만 아감벤에 따르면 이러한 사실 자체는 “혁명적인 요소를 대표하지도 않으며, 통치기계를 정지시키거나 심지어 위협하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포착불가능한 요소들이 실제로 저항의 거점들로 활성화되지 않는 한에서는 여전히 동시에 잠재적인 포착의 대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미래의 진보에 의해 포착될 것으로만 남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장치에 포획된 현 상황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장치들의 단순한 파괴 또는 장치들의 올바른 사용 따위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전자는 한 장치의 파괴는 다른 장치로의 이행으로 끝나버린다는 점에서, 후자는 장치 자체가 주체를(현대 자본주의의 경우 탈주체를) 산출하는 상황 속에서 장치와 무관한 주체가 있는 것을 전제하는 장치의 올바른 사용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공허할 뿐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아감벤에 따르면 장치는 우리가 “호모 사피엔스라는 표제어로 분류하는 동물을 ‘인간적’이라고 간주하는 ‘인간화’과정 자체에 그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장치의 파괴나 올바른 사용은 해방을 가져올 수 없다. “인간적인 것을 산출해낸 사건은 사실상 이 생명체에게 어떤 분열 같은 것을 구성한다.” 그 분열은 인간의 존재와 인간성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는 살아있고, 먹고, 자고, 활동하고 감각하고 생각하는 단순한 사실들의 집합이다. 그러나 인간성은 그러한 인간의 존재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그것들은 단순히 식물적 또는 동물적 본능에 불과한 비인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성은 그것들과는 무관한, 또는 그것들을 초월한 그 어떤 것으로서 인식된다.
이러한 분리는 고대에는 “배제적 포함”의 관계로 이루어졌다. 즉, “고대의 인간학적 기계는 인간의 모습을 한 동물의 형상들(유인원, 야생아, 노예, 야만인, 이방인 등)과 같은 바깥을 포함시킴으로서 ‘인간’을 얻어낸다.” 반면 근대에서 분리는 “포함적 배제”를 통해 작동한다. 이는 “이미 인간인 것(언어 없는 원인[猿人], 코마 상태의 환자, 유대인 등)을 아직 인간이 아닌 양 배제함으로써 ‘바깥’을 만들어낸다.” 어느 방향으로 작동하든, 이러한 분리·분열은 “생명체를 그 자체에서 분리하고, 생명체를 그것이 환경과 맺는 무매개적인 관계에서 분리한다.” 이는 오이코노미아의 논리를 통해 신의 존재론과 실천이 분리된 것과 동일한 형태의 분리·분열이다.
생명체가 환경과 맺는 무매개적인 관계는 “들뜸테”(Enthemmungsring)의 관계이다. 들뜸테는 하이데거가 제시한 개념 중 하나이다. “동물은 충동의 포위망 안에서 자기의 할 수 있는 능력을 들뜨게 하는 것에 대해서만 행동한다.” 들뜸이란 “동물이 행동하게끔 촉발시키는 상황”을 의미하고, 들뜸테는 “동물들이 그 안에서만 살면서 행동하는 이 충동의 포위망”을 말한다. 바로 이 들뜸테의 관계가 생명체와 환경이 가지는 직접적인 관계이다. 그러나 이 관계가 훼손되면, 생명체에게 “권태(즉, 들뜸테와 맺는 무매개적 관계를 중단시킬 수 있는 능력)”가 발생하고, 또한 “존재를 존재로서 인식할 가능성이자 세계를 구성할 가능성으로서의 ‘열림’”이 발생한다. 이런 ‘열림’의 가능성은 존재로서의 존재를 향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장치들이 인간을 포획할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로부터 행복을 찾으려 하기보다, 장치를 통해 자신과 분리된, 들뜸테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동물적인 행동들을 무화시키고, 손쉽게 장치로부터 형성된 주체성을 존재로서의 존재로 인식하고 만족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감벤에 따르면 “모든 장치의 뿌리에는 행복에 대한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욕망이 있다. 이 욕망을 (그 자체로부터) 분리된 영역에서 포획하고 주체화하는 것이 장치에 특유한 잠재력이다.”
그렇다면 해방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아감벤은 해방을 위한 방법으로 “세속화”를 제시한다. 그렇다면 세속화란 무엇인가? 세속화는 신성화와 반대되는 것이다. “‘봉헌하다/바치다’(sacrare)라는 용어는 인간법의 영역에서 사물을 끄집어내는 것을 가리키며, 그와 반대로 ‘세속화하다’(profanare)라는 용어는 사물들을 인간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돌리는 것을 뜻했다.” 그러므로 종교는 그 본질상 언제나 “사물, 장소, 동물, 사람을 공통의 사용에서 끄집어내 분리된 영역으로 옮기는 것”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분리 없는 종교는 없으며, 모든 분리는 진정 종교적인 핵심을 포함하고 보존한다.” 바로 이러한 분리가 신성화의 주요한 논리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분리를 실제로 실행함으로써 세속적인 것을 성스러운 것으로 이행시키는 의례가 바로 “희생제의”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나 현대 권력의 형상은 종교를 정의하는 것인 분리 과정을 일반화하고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즉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희생제의가 종교적 영역에 한해서 행했던 세속과 신성의 분리가 “모든 것, 모든 장소, 모든 인간 활동을 몰아세워 그것을 그것 자체로부터 떼어내려는 하나 또는 여럿의 쉼 없는 분리 과정”으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극단적 형태에 이른 자본주의 종교는 분리할 것이라곤 하나도 남겨두지 않는 분리의 순수 형식을 실현한다.”
반면에 “세속적인 것은 본디 성스럽거나 종교적이었던 것에서 인간들이 사용하고 소유할 수 있게 되돌려진 것”이다. 즉 그것은 신성화된 것, 종교화된 것이 다시 지상으로 끌어내려진 것이다. 따라서 세속적인 것으로 되돌아가는 의례로서 “세속화란 희생제의에 의해 분리·분할된 것을 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돌리는 역(逆)-장치이다.” 아감벤은 이러한 세속화의 대표적인 사례로 놀이를 제시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대부분의 놀이들은 사실 종교 의례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공놀이는 태양을 두고 벌인 신들의 싸움을 본뜬 것이고, 도박은 신탁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놀이는 종교적이고 신성한 것이었던 것이 새롭고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 즉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참여하고, 조작하고,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놀이는 주로 아이들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아이들의 놀이화는 종교적인 것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법, 문화 전반에 걸쳐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해방은 “장치들을 세속화하는 문제, 즉 장치들 안에 포획되고 분리됐던 것을 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돌리는 문제”가 해결될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아감벤은 이를 “세속화할 수 없는 것을 세속화하기”라고 말한다. 세속화를 통해 “주체화 과정이나 장치들에 개입할 수 있게 되고, ‘통치될 수 없는 것’(l'Ingovernabile)에 빛을 비추게 될 때”, 해방은 가능할 수 있다. 아감벤에 따르면 “이 ‘통치될 수 없는 것’이야말로 모든 정치의 시작이기도 하며 소실점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세속화에는 끊임없는 장치들의 저항이 따른다. 그것은 세속화하려는 시도에 맞서서 “세속화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속화할 수 없는 것을 세속화하려는 것은 불경한 것 또는 몽상으로 간주된다. 이런 세속화할 수 없는 것은 신성한 것에 대한 접근이 제한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것으로 표현된다. 어떤 분야든 그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주장은 바로 이런 세속화할 수 없는 것의 논리를 가장 명백하게 드러낸다. 경제는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하고 정치가 관여해서는 안 된다, 사법(司法)이 정치화해서는 안 된다, 과학은 과학자들의 일이지 정치적 논리로 과학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 등의 주장들이 바로 그 예이다. 이 모든 것들에서 정치는 경제, 사법, 과학을 오염시키는 것으로 간주된다. 심지어 정치 그 자체가 신성화되는 것이 현대의 대의민주주의 체제이다. 훈련되고 숙달된 전문 정치인들에 의한 정치가 가장 이상적인 정치로 여겨지는 곳에서 민주주의는 단지 누구에게 투표할지의 영역에서만 겨우 숨을 붙일 수 있게 된다.
세속화될 수 없는 것의 이러한 목록들은 보다 근본적인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절대로 세속화될 수 없는 것이자, 세속화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바로 ‘지능의 불평등’이라는 논리다. 지능의 불평등의 논리는 모든 사람들의 지능이 평등하지 않다고 말한다. 누군가의 지능은 다른 누군가의 지능보다 더 뛰어나다. 그러므로 지능이 우월한 자의 말에 열등한 자들은 복종해야 하며, 지능이 우월한 자들의 일에 대해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지능의 불평등은 매우 가시적이고 직관적인 근거에 의해 강력한 설득력을 가지는데, 그것은 바로 시험의 점수다. 모두가 똑같이 통제된 환경 속에서 (물론 이 전제부터가 시험이라는 조건 하에서는 성립불가능하다) 이루어진 시험의 점수야말로 지능의 불평등을 가장 강력하게 입증하는 것이다. 시험 점수가 더 높은 사람은 지능이 우월하기 때문에 보다 더 중요한 일을 맡을 ‘자격’이 있으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능이 열등하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맡을 ‘자격’이 없다는 이 논리야말로 인간이 장치 속으로 포획되는 가장 결정적인 지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는 기묘한 역설을 가지고 있다. 이 역설로 직접 나아가기 전에 한 가지 사례를 생각해보자. 인간과 개의 관계에서 인간은 거의 항상 개보다 지능이 우월하다. 물론 그것은 지능이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의 인지구조와 인지능력에 기반한 개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직관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여러 사례들에서 인간이 개보다 지능이 우월한 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개는 간단한 일차방정식조차 풀지 못한다, 개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알지 못한다 등등.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지능의 불평등을 개에게 집요하고도 체계적으로 설득하지 않는다. 개를 붙잡고 개의 생의 모든 순간들에서 너는 열등해서 이러저러한 일을 할 자격이 없고 나는 우월해서 할 자격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에 대해서는 다르다. 지능의 불평등, 나아가 이로부터 비롯되는 다양한 불평등들에 대해 장치는, 그리고 우월한(다른 말로 하면 장치에 포획된) 인간들은 열등한 인간들에게 설명하고, 설득하고, 주입하고, 강제한다. 집요할 정도로 끈질기고 세세하게, 우월한 인간들은 자신들의 우월성을 열등한 인간들에게 가르치려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월한 인간들은 열등한 인간들에게 지능의 불평등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혐오한다거나 의무이기 때문에 억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우월한 인간들은 기꺼이 적극적으로 이를 가르치고자 한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든 것일까?
인간과 개의 사례에서 인간이 개에게 지능의 불평등을 가르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과 개는 불평등하기 때문이다. 인간과 개는 애초에 존재론적으로 불평등하거나, 또는 존재론적으로는 평등하더라도 인간은 개를 결코 평등하다고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는 인간과 개의 관계와는 무언가 다른 논리가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다. 이에 대해 섣불리 모든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평등하기 때문이라거나, 우월한 인간도 사실은 무의식적으로나마 열등한 인간을 평등하다고 인식하고 있다고 단정지을 필요는 없다. 그렇게 되면 끝없는 논쟁의 반복만이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설명과 가르침이 인류의 역사와 함께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과 개의 관계와는 무언가 다른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 논리는 실제가 어떤지와 무관하게 적어도 무언가를 ‘요청’하고 있다. 바로 ‘지능의 평등’이다.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에게 무언가를(지능의 불평등 말고도 우월한 자가 알고 있는 그 무엇이든) 가르친다고 해보자. 이 가르침이 성립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과서도, 완벽한 교육방법론도 아니다. 열등한 자가 무엇보다 우월한 자의 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교육방법론보다도 선행하는 것이다. 제아무리 쉽고 직관적인 방법으로 설명하더라도, 그것이 쉽고, 직관적이기 위해서는 우선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의 지능과 직관이 동일해야 한다. 따라서 지능의 평등은 그것이 진리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지능의 불평등을 설명하기 위해서라도 ‘요청’되고 있는 것만큼은 명백하다.
그런데 이러한 지능의 평등은, 지능의 불평등이 세속화될 수 없는 것인 것과 정반대로, “통치될 수 없는 것”의 논리이다. 지능의 평등은 모든 통치 질서의 근본이 되는 지능의 불평등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지능의 평등을 인정하면서 통치를 정당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능이 평등하다면, 그래서 누가 어떤 일을 맡을 ‘자격’이란 것이 허상에 불과하다면, 어떤 형태의 지배도 언제든지 부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하필이면 당신들이 지배하는가? 어떤 근거로? 지능이 평등한데? 당신들이 아닌 우리가 지배할 것이다. 이런 논리 속에서 지배와 통치권력의 안정화는 불가능하다. 요컨대 지능의 불평등이 세속화될 수 없는 것, 따라서 가장 신성한 것으로서 모셔져야 하는 그만큼, 지능의 평등은 통치될 수 없는 것, 그래서 무질서와 파괴를 불러오는 불경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능의 불평등이 역설적으로 지능의 평등을 ‘요청’한다는 것은 권력이 가지는 지배욕과 무력감의 비례성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러므로 이제 불평등의 논리에 평등의 논리를 맞세워야 한다. 물론 이것이 지능의 평등을 곧바로 진리라고 주장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지능의 평등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순간, 지능의 평등은 진리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사이의 지능의 불평등이라는 멍에를 다시 뒤집어쓰게 된다. 앞서 진리의 평등을 진리라고 주장해버릴 때 논쟁이 쳇바퀴 돌듯이 반복된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지능의 불평등이라는 동일한 전제 위에서 싸우게 되는 논쟁은 공허한 공회전일 뿐이다.
따라서 지능의 평등을 맞세우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두 가지 방향을 가질 수 있는데, 하나는 불평등의 논리에 대한 해체이다. 즉 지능의 불평등을 주장하는 모든 논리들이 어떤 경로를 거쳐 결국은 지능의 평등을 요청하고 있는지 자백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능의 평등을 실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능이 평등하다고 가정했을 때 지금, 여기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지 실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평등의 논리에 맞선 평등의 논리는 장치의 네트워크에서는 하나의 시스템 에러로 나타날 것이다. 장치의 작동이 중지되었지만 그 이유는 장치의 논리로서는 포섭될 수 없는 에러. 이러한 에러 속에서, 에러를 통해 해방은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