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을 영적 실체와 물질적 실체로 복합된 존재라고 말한다. 이때 물질적 실체는 우리가 생생하게 느끼고 경험하는 육체이며, 영적 실체는 그보다는 조금 더 불명확하지만, 일상적인 언어사용에서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퀴나스는 분명하게 물리주의의 입장을 거부하고 있다. 물리주의에 따르면 영혼과 같은 비물질적 실체는 존재하지 않고, 모든 정신작용은 물리적인 속성들에 의해 발생하거나 적어도 그것들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물리주의에 반대해 인간을 두 실체의 복합체적 존재라고 정의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영혼은 첫째, 비물질적이어야 하고, 둘째, 다른 어떤 물질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여야 한다.
따라서 먼저, 아퀴나스는 ‘영혼은 물체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은 영혼은 물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영혼의 기능 또는 작용으로 여겨지는 것들, 즉 운동, 인식, 접촉에 있어서 그것들이 모두 물질적인 물체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움직여지거나 움직일 수 있는 것, 유사를 통해 인식할 수 있는 것, 음직이기 위해 접촉하는 것은 모두 물질적인 차원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 비물질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우선 영혼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정의를 내리고자 한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영혼이란 생명의 첫 근원이다. 즉, 영혼이란 생명체와 무생물체를 구분하는 기준으로서, 생명체로 하여금 단순한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생명체이게끔 만드는 제일원리이다. 물론 아퀴나스는 봄이나 심장박동과 같은 생명적 활동의 근원이 물질적 물체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물체들이 생명의 ‘첫’ 근원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시신과 살아있는 육체는 모든 물질적 측면에서 동일하더라도 하나는 생명이 없는 것이지만, 다른 하나는 생명이 있다. 아퀴나스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생명의 첫 근원으로서 영혼은 물체일 수 없으며, 오히려 물체의 상태 또는 성질로서 현실태라고 말한다.
나아가 아퀴나스는 영혼은 물체라는 자연철학자들의 주장은 운동, 인식, 접촉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에만 국한될 필요는 없다는 점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운동, 인식, 접촉 등과 같은 작용들은 영혼이 비물질적인 것으로서 물체의 현실태일 때에도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영혼이 물질적인 물체여야 할 필연성은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퀴나스는 어떤 물체의 생명을 생명이 있는 다른 물체를 통해 설명할 경우 무한퇴행의 굴레에 떨어지게 되며,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부동의 일자로서 영혼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논증은 영혼이 물질적 실체로서 몸과는 구별된다는 것만을 입증할 뿐, 영혼이 인간 속에서 어떤 다른 것의 도움도 없이 그 자체로 자립하는 존재, 즉 영적 실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아퀴나스는 ‘인간의 영혼은 자립하는 어떤 것인가?’라고 묻는다. 이에 대해 일군의 철학자들은, 영혼은 단독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며, 영혼의 어떠한 작용이나 인식에 있어서도 신체에 의한 표상에 의존하기 때문에, 영혼은 자립하는 것으로서 불릴 수 없고 오로지 영혼과 신체의 복합체로서 인간만이 자립하는 것으로 불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우리가 인간의 영혼이라고 부르는 지성적 작용의 근원은 필연적으로 비물질적일뿐만 아니라 자립적인 근원이라고 단언한다. 아퀴나스는 인간이 지성을 통해서 모든 물체들의 본성을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성이 모든 물체들의 본성을 인식할 수 있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지성은 자신의 본성 안에 그것들 중 어느 것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만약 어떤 사물이 지성의 본성 안에 있을 경우에, 그로 인해 다른 것들에 대한 인식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물체든 물체라면, 그것은 특정할 수 있는 개별적인 본성을 가진다. 따라서 어떤 물체적 본성도 갖고 있지 않은 지성은 비물질적이다.
또한 아퀴나스는 이와 같은 논리로 지성의 인식은 신체의 기관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만약 그럴 경우 신체의 기관의 고유한 본성에 의해 모든 사물에 대한 지성의 인식이 방해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이나 지성이라고 불리는 어떤 지성적 근원 자체는 자신만의 고유의 작용과 기능을 가지면서도, 그런 작용과 기능은 신체에 의존적일 수 없으므로 영혼은 자립적인 실체라고 논증한다.
나아가 아퀴나스는 자립하는 것이라는 말은 어떤 것이든 자립하는 것, 또는 그 본성상 완전히 자립하는 것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때 첫 번째 의미로서 자립하는 것은 우유적 또는 질료적 형상으로서 내재된 것을 제외하고, 두 번째 의미로서 자립하는 것은 부분으로서 결합된 것의 불완전성을 배제한다. 따라서 아퀴나스는 후자로서 자립하는 것은 신체와 영혼의 복합체로서 인간뿐이지만, 전자로서 자립하는 것에는 영혼도 포함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아퀴나스는 지성의 활동에 있어서 신체에 대한 의존성은 신체에 의해 지성의 활동이 이루어지기 때문이 아니라, 신체가 지성의 작용의 대상과 관련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시각이 빛깔이 없어도 여전히 시각인 것처럼, 지성은 신체가 없어도 활동할 수 있지만 단지 지성의 작용 대상을 다루는 문제에 있어서 신체가 요구될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퀴나스의 논증들은 몇 가지 지점에서 분명한 한계들을 가진다. 첫째, 아퀴나스는 물체가 생명의 첫 근원일 수는 없기 때문에 비물질적인 것으로서 영혼의 존재가 요구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물체의 물리적, 화학적 속성들에 의해 생명의 근원들을 밝혀낼 수 있다면 애초에 영혼의 존재 자체가 요구될 필요가 없게 된다. 현대의 뇌과학과 신경과학의 연구들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인간의 많은 정신적인 능력 또는 기능들이 인간 신체, 특히 두뇌의 물리적, 화학적, 전기적 작용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해명되지 못한 영역이 많이 남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아퀴나스의 주장은 특정한 정신능력이 물질적인 영역에서 해명될 수 없다는 조건 하에서만 탐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주장이라는 점이다.
둘째, 아퀴나스는 영혼이 자립적인 실체, 즉 어떤 다른 것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고유하게 인식작용을 수행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아퀴나스는 부분들의 작용들은 부분들을 통해 전체의 것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눈이 본다고 말하는 것처럼 영혼이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보다 정확하게는 인간이 영혼을 통해서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명백하게 앞서의 주장과 모순되게 된다. 후자의 주장에서 영혼은 자립적인 실체라기보다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부분에 불과한 것이 되며, 나아가 사고와 같은 정신 작용들의 주체는 영혼이 아니라 인간이 된다. 이러한 논증을 따라가면 자립적인 실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영혼이 아니라 영혼과 몸의 복합체로서 인간이다. 그렇다면 아퀴나스는 영혼의 실체성에 대한 증명을 시도하면서 실제로는 비실체성을 증명하게 되는 셈이다.
셋째, 아퀴나스는 지성의 작용을 위해 신체가 필요한 것은 단지 작용 주체로서 지성에 관해서가 아니라 작용 대상으로서 물체에 관해서라고 말한다. 즉 지성의 인식이나 사고작용은 그 대상에 대한 것으로서 신체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식의 대상이 없는 인식, 사고의 대상이 없는 사고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설령 그런 것이 가능하더라도 그것을 인식이나 사고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인식이나 사고는 항상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이나 사고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인식하지 않는 인식, 아무것도 사고하지 않는 사고는 모순이다. 따라서 신체가 비록 지성에 관해서가 아니라 작용 대상에 관해서만 필요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지성은 필연적으로 신체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만약 이러한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아퀴나스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영혼이 존재한다고 해보자. 그러나 여전히 한 가지 문제가 남는다. 영혼의 대부분의 기능 또는 작용들은 인간의 신체와 긴밀하고도 유기적인 관계 속에 존재한다. 눈이 없다면 시각정보를 처리할 수 없으며, 귀가 없다면 청각정보를 처리할 수 없다. 그런데 지성은 그러한 관계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신, 세계, 존재 등에 관한 추상적 사유에 있어서 우리는 어떠한 신체기관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적으로 지성이 혼자 수행하는 일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영혼 또는 지성은 단순히 비물질적이고 자립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신체의 현실태이자 형상으로서 신체와 하나가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아퀴나스는 “지성적 근원은 형상으로서 신체와 하나가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해 다른 철학자들은 지성적 근원은 형상으로서 신체와 하나가 되지 않고, 신체와 별개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우선 지성의 보편성에 대비되는 형상의 특수성에 기반한다. 형상은 질료와 결합되어 하나의 개체를 이루는 본성상 불가피하게 특수한 것이며, 한정된 것이고, 내용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지성은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지성은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고, 특수성 속에서 보편성을 인식하는 것이며, 질료적인 것이 아니라 지성적 형상들을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지성이 특수하고 한정된 내용을 가지는 것이라면, 지성은 바로 그러한 내용에 의해 자신의 작용이 방해받게 되어서 모든 것의 보편적인 지성적 형상을 인식할 수 없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영혼론』 제3권에서 지성은 분리된 것이며 어떤 물체의 현실태도 아니라고 말했다고 해석한다.
또한 이들은 지성의 능력은 신체의 능력이나 신체에 의존하는 능력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능력의 주체로서 지성 역시 신체의 형상일 수 없다고 말한다. 나아가 지성은 즉자적으로 존재를 가지며 자립적인 것, 따라서 불멸적인 것이지, 형상과 같이 본성상 질료에 의존하는 것, 따라서 그 자체로는 분리되어 자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가멸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은 지성적 근원은 형상으로서 신체와 하나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아퀴나스는 이러한 주장을 단호히 배격하고 지성적 근원, 즉 지성을 반드시 인간 신체의 형상이라고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퀴나스는 이 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영혼론』에서 영혼의 형상성을 주장한 논리를 끌어들인다. 어떤 사물의 형상은 그 사물로 하여금 그것으로 인해 작용하도록 하는 그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어떤 것이 현실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면, 그러한 작용을 만들어내는 원인이 있으며, 그것이 바로 형상이라는 것이다. 신체의 경우, 감각, 운동, 양육, 인식 등 다양한 작용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것이 우리가 삶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이러한 신체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형상이 있음이 필연적이고, 그러한 형상이 바로 영혼 또는 지성이다.
이러한 논증과 함께 아퀴나스는 지성이 신체의 형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인식작용이 ‘그의’ 인식작용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 설명책임을 진다고 말한다. 이러한 요구는 우리의 경험에 기반한다.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 인식하고, 나 자신이 사고한다”고 우리는 말한다. 각자는 각자의 인식과 사고를 하는 것이지, 인식과 사고를 각자의 존재와는 별개의 것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우리의 직관과 경험이 말해주는 바는 인식과 사고의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지성작용이 귀속되는 주체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는 어떤 것 전체에 귀속시키는 것이다. 즉 지성적 작용의 주체를 인간 전체에 귀속시키는 것이다. 이는 정확히 플라톤이 인간을 지성적 혼이라고 말하면서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아퀴나스는 이러한 설명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 지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지만, 감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성적 작용은 비물질적인 작용이기 때문에, 지성적 작용의 주체 역시 비물질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지성적 작용의 주체가 인간 전체라면, 물질적인 신체의 존재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감각작용은 인간의 작용 하에 포섭될 수 없게 된다. 신체는 전체는 아니더라도 반드시 인간의 한 부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해결책은 지성적 작용이 개별 인간 주체에 귀속되는 것을 우유적인 것으로, 즉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단순히 우연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아퀴나스는 이러한 해결책을 거부한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에 지성적 작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개별적 인간들에게 지성적 작용이 귀속되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퀴나스는 마지막 해결책만 남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지성적 작용은 인간의 한 부분에 귀속되기 때문에 한 인간의 인식이나 사고가 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을 따라 지성이 어떤 방식으로든 신체와 하나가 됨으로써 인간이라는 존재자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성은 어떻게 신체와 연결되는 것인가? 아퀴나스에 따르면 이에 대해서도 세 가지의 설명이 있다. 첫째는 아베로에스가 주장한 것처럼 인간 전체에 대해 하나뿐인 능동지성이 인식대상인 표상들을 제공하는 개별적 인간들의 신체와 연결됨으로써 인식 또는 사고작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는 지성의 비물질성과 자립성이라는 속성을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밀어붙임에 따라 나오는 결론인데, 아퀴나스는 이러한 설명이 지성작용이 특정한 사람의 작용이게끔 만들 수 없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 경우 그 사람은 지성작용을 수행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지성작용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벽이 색깔이라는 표상을 제공한다고 해서 시각이라는 지각작용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 지성작용도 이와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 지성의 대상이라는 표상들을 제공한다고 해서 그를 지성작용의 주체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의 표상이 인식된다는 결론만이 도출될 뿐이다.
둘째는 플라톤이 주장한 것처럼 지성이 원동력으로서 신체와 하나가 되기 때문에 지성의 작용은 인간 전체에 귀속된다는 설명이다. 즉 지성이 한 개인의 신체의 행동을 야기하고 그러한 일련의 과정이 지성작용을 그 개인의 것으로 돌릴 수 있게끔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이러한 주장은 공허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성이 신체를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욕구의 운동 자체가 지성을 전제로 하고, 인식하는 작용은 작용자 안에서 발생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작용자 밖의 다른 것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처럼 설명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아퀴나스는 이러한 설명은 지성작용이 ‘그의’ 지성작용에 속함을 설명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목수가 톱을 이용해 나무를 자를 때, 나무를 자르는 작용은 목수에게 귀속되는 것이지, 톱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다. 설령 톱에게 귀속되더라도, 그때 톱은 단순히 어떤 도구로서만 그러한 귀속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성이 신체에 대한 원동력으로서 작용할 때, 인간은 근본적으로 지성작용의 최종적이고 온전한 주체가 될 수 없다. 또한 신체는 물질적인 것인 반면 지성과 그의 작용은 신체 기관을 갖지 않는 비물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지성의 한 도구로서의 주체도 될 수 없다. 그럼에도 지성작용이 개별 인간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지성이 아닌 인간에게 귀속되는 것은 눈이 본다는 것 때문에 손이 본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따라서 아퀴나스는 지성이 신체와 연결되는 방식은 오직 지성이 그 사람의 형상으로서 존재하여 그 사람의 신체와 결합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또한 아퀴나스는 인간 종의 특질로부터도 이러한 결론을 이끌어낸다. 인간에게 고유한 작용은 인식하고 사고하는 지성작용이다. 즉, 지성작용을 한다는 사실 덕분에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체와 구별되는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가진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성작용의 근원인 지성은 인간을 인간종(種)이게끔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하나의 사물을 한 종에 포섭시킬 수 있도록 함으로써 다른 사물들과 종차(種差)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형상이다. 따라서 지성은 인간의 형상이다.
마지막으로 아퀴나스는 형상이 더욱 더 고귀할수록 물체적 질료의 구속으로부터 더 자유로워지고 그것을 더욱 넘어설 수 있게 되어 그것을 더 잘 지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광물에서 식물과 동물로 갈수록 더 고귀한 형상을 갖게 되며, 인간 혼은 그 고귀성에 있어서 가장 궁극적이어서 물체적 질료가 전혀 개입할 수 없는 능력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지성이라고 주장한다.
아퀴나스는 이러한 논증에 기초해 지성이 형상으로서 신체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주장들을 반박한다. 그러한 반박의 핵심은 지성이 비물질적이고 보편적이면서도 동시에 특수한 개별인간들의 형상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아퀴나스는 지성의 힘과 작용의 측면에서 그것은 신체기관의 힘이 아니기 때문에 지성은 비물질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서 분리되어 존재하지만, 지성 또는 영혼의 존재론적 측면에서는 충분히 특수한 신체의 형상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아퀴나스는 지성이 모든 것을, 그리고 보편성을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위해서는 지성적 힘과 작용이 신체의 현실태가 아닌 비물질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면 충분하며, 지성의 존재 자체가 신체 또는 개별 인간과 분리되어서 존재할 것까지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또한 아퀴나스는 인간의 지성 또는 영혼은 다른 형상들과는 달리 질료와 결합함으로써 하나가 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복합체 전체에 속하는 존재의 존재성 자체는 영혼에 속하기 때문에 자립하는 것이자 신체가 파멸된 후에도 그 존재가 존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영혼은 형상으로서 신체와 하나가 되는 경향성을 갖고 있는데, 이러한 경향성은 신체로부터 분리된 이후에도 보존되며, 따라서 지성 또는 영혼은 신체를 떠나 있게 된 이후에도 형상적 존재로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아퀴나스의 논증은 그렇게 성공적인 것 같지 않다. 우선 형상들의 고귀함의 등급이 있고, 그로부터 물체적 질료에 대한 관계에서 차이가 난다는 주장은 중세 당시에는 몰라도 지금은 근거 없는 신비주의적 주장에 불과하다. 지성 또는 영혼이 경향성을 가지기 때문에 신체의 파멸로 형상적 존재로서 존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형상적 존재로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 형상이 질료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은 형상이 어떤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해소될 수 없는 형상의 정의상 발생하는 논리적 불가능성이다. 만약 경향성이 그러한 불가능성조차 해소할 수 있게 된다면, 구체가 타원체로 변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구체로 존재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타원체인 구체’가 존재할 수 있다고 논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아퀴나스가 지성작용의 귀속이라는 문제에서 전제하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자명하지 않다. 아퀴나스는 언제나 ‘내’가 인식하고, ‘내’가 사유한다는 직관적이고 경험적인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별도의 철학적 해명을 필요로 하는 사실이다. 우리의 직관적이고 경험적인 상식과 달리 내가 인식하거나 사유하지 않는 세계 또한 분명히 논리적으로 모순되지 않게 존재할 수 있다. 이는 우리의 상식이 공리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간단한 사고실험이다. 이러한 사고실험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프로이트의 리비도나 융의 집단무의식 개념은 인식하고 사유하는 주체가 반드시 자의식으로서의 ‘나’가 아닐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근본적으로 아퀴나스는 두 가지 충돌하는 속성들을 하나의 관념 속에 모두 포함시키고자 한다. 인간의 영혼은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하다. 지성은 자립적 존재이면서도 형상으로서 신체와 하나가 되어야 하는 존재이다. 아퀴나스는 인간의 지성 또는 영혼이 가지는 독특하면서도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성격을 자립적인 형상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포착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그렇게 성공적인 것 같지 않고, 타원체인 구체의 예에서 보듯이 오히려 아퀴나스에게서 형상이라는 개념의 의미를 불분명하게 만들 뿐이다. 인간의 인간임을 나타내는 추상적 의미를 가진 형상으로서 지성 또는 영혼과 개별적 인간의 개별성을 나타내는 구체적 의미를 가진 형상으로서 지성 또는 영혼을 동일한 것으로 묶어내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