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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천(靜天) 에세이 23] 0.8 수수께끼

by 한정구

우리는 속은 것일까?


1994학년도부터 학력고사가 폐지되고 수학능력시험과 본고사가 도입되었다. 3년 후 다시 본고사는 폐지되고 현재까지 논술시험만 유지되고 있다. 필자는 논술시험을 준비했던 세대다. 그러나 학교에서 조차 글쓰기 교육은 거의 없었다. 오로지 ‘신문사설을 많이 읽어라’, ‘책을 많이 읽어라’ 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실에서 신문이나 책을 읽고 있으면 ‘공부 안 하고 논다’는 이유로 맞기도 했다.


2025_20210827104512535.JPG (사진 출처 : e-대학 저널)

왜 신문사설을 읽어야 하는지 물었다.


배경지식을 쌓고, 서론-본론-결론 프레임을 익힐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배경지식을 쌓으려고 읽는 신문사설은 배경지식이 없으면 성인도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신문사설 중에는 서론-본론-결론의 프레임으로 구성되지 않은 것들도 많다.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물었다.


어휘력을 늘릴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어휘력 때문이라면 교과서 만으로도 충분하다. 만약 어휘력 때문이라면 어휘력을 높여준다는 그런 책을 읽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그러고 보니 그런 책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만약 그런 책이 있었다면 <수학의 정석> 이후 최고 베스트셀러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아직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한 아빠에게 9살 아들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을 한다.


“아빠, 책은 왜 읽어야 하는 거야?”



책을 많이 읽으면 훌륭한 사람이 된다던데…


필자는 매주 아이를 데리고 서점을 간다. 어릴 때부터 의도적으로 책 읽는 아빠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덕분에 아이도 (요즘은 축구에 빠져 뛰어 노는 시간이 많지만) 책을 좋아한다. 아이를 둔 대부분 부모들이 같은 고민을 한다. 어떻게 하면 아이에게 독서습관을 갖게 할지 말이다. 집에서 직접 아이에게 읽어주기도 하고, 독서 전문기관 프로그램을 이용하기도 할 것이다. 요즘은 IPTV 채널에도 TV 화면에서 선생님들이 책을 읽어주는 프로그램도 있다.


2025_20210827104611962.JPG (사진 출처 : U+

어릴 적 어른들은 책을 많이 읽으면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했다. 세종대왕,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모두 독서광이었다.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링컨 대통령도 독서광이었다. 그러나 독서광이었던 나도, 나보다 독서광이었던 고등학교 친구도 훌륭한 사람이 되지는 못했다. 책을 많이 읽는 것과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상관관계는 있어도 인과관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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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성인 연평균 독서량은 0.8권이라는 통계가 있다. 일년에 한권도 읽지 않는 성인이 많다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서점에는 사람들이 많다. <트레바리>같은 독서모임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정리하면 읽는 사람은 열심히 읽고, 안 읽는 사람은 열심히 안 읽는 것이다.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 답을 찾기 위해 서점에서, 독서모임에서 사람들에게 물었다. 왜 책을 읽어야 하는 걸까요? 그들의 대답은 단순했다.


“책이 재미있어서요..”



우리가 책을 읽지 않는 이유


회사로 주문한 책이 도착했다. 머그잔을 들고 있던 여자 후배가 택배상자를 열고 있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매일 그렇게 책을 읽으면 다 머리에 들어와요?”


이해되지 않는다는 그 후배의 표정에서 오랫동안 고민했던 질문의 답을 찾았다.


우리는 책을 통해 배워야 하고, 정보를 얻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책을 읽어야 하는 진정한 이유가 아니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다. 책에서 길(정보, 지식, 해답)을 찾으라는 말이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고민해보고 생각할 시간을 가지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뭔가를 얻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책을 읽는다. 그래서 두렵다. 책을 읽고 난 후에 머리에 뭔가 남지 않을까봐 두렵다. 그래서 책을 열기가 두렵다.


반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순간을 즐긴다. 아무것도 남지 않아도 좋다. 그저 저자가 들려주는 소설 속 스토리를 즐긴다. 저자가 들려주는 에세이 속 생각과 경험을 즐긴다. 저자가 들려주는 실용서적의 트렌드와 정보를 즐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뭔가 남겨야 한다는 목적보다 그 순간을 그저 즐기고 있는 것이다.



아들의 궁금증을 풀어줘야 할 시간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 궁금해하는 어린 아들에게 책을 즐기라는 답은 설득력이 없을 것 같다. 어린 아들이 공감할 수 있게 바꾸어야 했다.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지만 아빠는 이렇게 생각한단다. 서점에 가서 어떤 주제의 책이 많이 진열되어 있는지를 보면, 요즘 사람들이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단다. 그걸 트렌드라고 하지.


그리고 책을 통해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다녀올 수 있단다. 현실에서는 만날 수 없지만, 상상을 통해 <전천당 과자가게>에도 가볼 수 있고, <책 먹는 여우>도 만날 수 있고, 1800년대로 가서 <셜록 홈즈>도 만날 수 있단다. 물론 TV를 통해서도 만날 수 있겠지. 그러나 책을 읽으면 TV가 주는 모습이 아니라, 네가 직접 그린 너만 알고 있는 너만의 세상을 만들 수 있단다. 책은 그런 즐거움을 준단다. 바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너만이 가질 수 있는 세계를 가질 수 있는거지.”


여전히 이해가 안된다는 저 표정은 멀까...


글 | 정천(靜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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