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열심히 일하고 월급을 받아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다. 자녀들이 그 부모에게 용돈을 받았다면 용돈에서 또 십일조를 드려야 하나? 전체 소득에서 드렸는데?"라고 갈등하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잠깐, 그렇네!" 머리가 복잡해졌다.
“주님 어떻게 해요?”
‘어쩌긴 뭘 어쩌니 네 맘대로 하려무나.’
어리석은 기도인지 알면서도 그냥 기도했었다.
갈등할 문제가 아닌데 잠시라도 주저했다는 것은 '혹시' 하는 비겁함이 있다는 증거겠지 싶다. 헌금만이 아니더라도 어리석은 논리로 사람들을 흔드는 장단에 맞장구를 치고 싶었나 보다. 우리의 바보 같은 신음도 다 듣고 계신 하나님, 바보 같아서 죄송하다고 기도한다.
돈이란 인간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 그러기에 모두가 민감한 반응을 하게 되나보다. 믿음이 신실한 사람도 갈등하게 하는 돈이란 녀석은 두 얼굴을 가자고 있다. 마음을 비우고 베풀면 베푼 것보다 더 많은 행복을 주지만, 움켜쥐면 부드럽게 달리던 바퀴가 점점 탐욕스럽고 강퍅하게 내달려 결국 추하게 망가진다는 것을 이렇게 나이 들어서야 알았으니 얼마나 무지하고 통탄할 일인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면서 행동하지 않는 성도들을 그분은 어떻게 바라보실지.
헌금과 나눔은 누구의 말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믿음의 분량대로 기쁘게 드리면 된다는 거다. 그러므로 내 안에 있는 욕심이 자라지 못하도록 찬양하며 예배의 자리에 나아간다. 비록 풍족하지 않아도 돈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 노력하는 중이다.
세상 어디에도 다 계신 하나님, 그렇기에 어디에서 기도하든 들으시는 하나님. 하루 일과를 끝내고 꿇는 무릎에는 감사와 회개로 단잠을 선물 받고, 아침의 기도는 또 하루라는 시간을 주심에 감사하고 정직하게 살겠노라 다짐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에 운동하면서 기도하고, 장보러 가면서도 하고, 설거지를 하면서, 집안 청소를 하면서, 지하철에서 어디서든 기도한다. 내가 어디론가 가고 무엇을 보든지 그분이 개입하지 않는 것이 없기에 항상 든든하다.
살아계신 주, 우리의 소망이신 주께 무릎을 끓고 두 손을 모아 마음을 조아려야만 경건해 보이겠지만 내가 아버지라 부르는 분이기에 가끔 육신이 피곤할 때 누워서 기도하려다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죄송한 마음이 점점 커져 벌떡 일어나게 된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아프리카에서 물 부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깨끗한 물이 공급되기를 기도한다. 아침마다 출근하는 남편을 잡아끌다시피 해 큐티를 잘하다가도 주말엔 주~욱 함께 있으니 큐티하는 걸 깜박 잊어버린다. 아마도 난 한심한 날라리 신자인가 보다.
하루라는 시간 속에 여러 사람을 만나지만 어떤 이들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욕심이 충만하도록 부추기는 인간들이 있다. 다행히 코로나로 사람을 만나는 것이 꺼려지다 보니 장단점도 있는 것 같아서 좋을 때도 있다. 그런 사람은 만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싶은데, 아닌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만 만나면 세상은 변하지 않겠지. 그 사이에 문화가 변하고, 생각들이 변하고 삶이 엉망이 된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이기적이고, 우울하고, 다양한 일들이 주위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것만도 안타깝다.
코로나로 비대면 예배를 드리게 되면서부터 믿음이 식어버린 느낌이어서 내 얼굴에 경고장을 바짝 들이대고 팔랑팔랑 소리 나도록 흔들어본다. 주일이면 예배 드리기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달려가는 행위가 하나님을 알기에 갈급함이 없다 해도 축복이었다는 것을, 마음이 예배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예배드리지 못할 때가 곧 온다더니 이렇게 전염병과, 전쟁, 지진 그리고 기근이 성도들로 하여 예배의 자리에 앉지 못하게 조여 오고 있다. 매일 보이지 않는 영적싸움에 노출되어 있다는 증거다. 마음이 급하고 어려울 때가 멀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영혼 구원을 위해 난 얼마나 뛰었으며, 섬겼으며, 기도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행동하자 우리에게는 든든한 주님이 계시지 않는가.
부모님이 내 이름을 정희라 지어주셨다. 바를 정 계집 희, 여자로 바르게 살라는 뜻인 것 같은데, 가끔 이름의뜻을 생각하면서 일부러라도 바르고 정직하게 살려 노력한다.
세 자매 중에 나만 남자 형제들 돌림을 사용한 이유가 궁금할 때도 있었다. 유년엔 다른 이름으로 불렸는데 국민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정희가 되었다. 출생신고를 7년 후에 했나?
남성 위주의 시대에 태어났으니 출생신고야 아무려면 어떤가. 요즘은 출생신고가 늦으면 벌금이 있어서 이름도 미리 지어놓고 부모들은 설렘으로 아기 만날 날을 기대하는, 참 좋은 시대에 태어난 아가들 파이팅이다.
나도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값을 하고 살아야지. 바르게, 정직하게.
욕심으로 강퍅해진 마음을 다스리는 것 중에 꽃을 바라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잘 가꾼 화단에 피어나든 비탈진 곳에 피어나든 꽃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주위까지 밝다. 만지고 싶고 향기를 맡으려 코인사를 하게 된다. 꽃은 인간의 마음을 부드럽고 소박하게 만드는 마술사가 아닐까?
2022년은 장미가 유행인지 마포구에서도 예산을 들여 장미공원을 많이 만들었다. 꽃이나 화초는 인간의 마음을 평안하도록 도와준다는 통계도 나와 있듯이 아침이면 거실 화초들에게 말을 걸어본다.
얼굴을 살짝 만지며 “아침이야 일어나.”
"어머! 저는 벌써 깨어 있는걸요? ㅎㅎ"
“엥? 그랬구나~ 미안 미안" 이런 대화 속에 아침 준비가 한결 즐겁다.
같은 영을 가진 사람은 말로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화초들과 대화하듯이 인내하며 사람들에게 다가가려 작은 노력을 해보려 한다. 때로는 주님께서 내게 붙여주신 영혼들을 섬기다가도 상대방의 아픔을 공감하면서도 표현력이 부족한 탓에 마음을 다하지 못해 후회할 때가 종종 있었다. 헤어지고서야 ‘이 말을 했어야 했는데’ ‘저 말을 할 걸’ 하면서.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베드로 전서 3:15절)
말씀에 힘입어 준비하고 한 번 더 생각하고 말하기를, 주님이 주신 지혜로 주의 법을 떠나지 않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