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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미국, 달라질 세계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위기, 대한민국의 전략 (건대교지 129호)

by 정호익

*해당 글은 건대교지 129호(2025년 가을)에 기고된 기사로, 2025년 8월에 작성되었습니다.



My fellow Americans, this is Liberation Day. (미국인들이여, 오늘은 해방의 날입니다.)” 2025년 4월 2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상호관세 조치를 발표했다. “중국 34%, 일본 24%, 유럽연합 20%, 한국 25%, ···”. 관세율은 ‘미국이 해당 국가와의 상품 무역에서 기록한 무역적자를 그 나라로부터의 총수입으로 나눈 뒤, 그 값을 2로 나눈 값’으로 공표되었다. 저명한 정치 컨설턴트인 이안 브레머는 이에 대해 “믿을 수 없을 만큼 멍청하다”며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상호관세란 한 국가가 자국 수입품에 부과하는 관세 수준을 상대국의 관세 수준에 맞춰 조정하는 정책이다. 그러나 해당 관세율 산출은 양국 간 실제 환율·무역장벽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아무런 경제학적 논리가 없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심지어 남극 인근 무인도에도 10% 관세를 부과했다.


(좌) 상호관세 조치를 발표하는 트럼프 대통령 / (우) 4월 2일 발표된 상호관세율

상호관세율이 발표된 직후 미국 나스닥 지수는 6%, 다우는 4%, S&P500은 4.8% 하락했고, 하루 만에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3조 달러가 증발했다. IMF와 OECD는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을 하향 조정했고, 한국은행은 한국의 성장률이 0%대로 하락할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 마이너스 성장률로 후퇴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관세 장벽으로 수출 경제에 경고등이 켜지면 이는 국내 주요 기업의 실적 악화와 임금 소득 정체로 이어져 우리나라의 경기 불황을 초래한다. 많은 전문가들은 높은 관세율이 물가 상승 등으로 이어져 미국 경제에도 손실을 가져다줄 것으로 전망한다. 도대체 트럼프는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이렇게 무모해 보이는 정책은 어떤 맥락에서 나타난 것일까? 트럼프가 불러온 변화는 일시적 일탈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향후 국제질서를 바꿔 놓을 변곡점이 될 것인가?



Ⅰ. ‘팍스 아메리카나’에서 ‘아메리카 퍼스트’로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은 유일무이한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승리한 표준이 되었고 수많은 국가들은 자유무역 확대와 자본 이동의 자유 속에 연결되었다. 정보통신 혁명으로 인류는 새로운 문명에 진입했고, 미국은 물가 안정과 고용 안정이 동시에 나타난 ‘대안정기(The Great Moderation)‘를 누리며 세계 경제의 중심에 섰다. 그러나 대안정기는 2008년 금융위기로 막을 내렸고, 세계화는 인류를 보다 부유하게 만들었으나 그 과실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가지는 않았다.


경제학자 블랑코 밀라노비치는 1988년~2008년 전 세계 소득분위별 실질소득 증가율을 하나의 그래프로 나타냈다(이하 ‘코끼리 곡선’). 코끼리 곡선을 통해 우리는 세계화 이후 어떤 시민 계층의 소득이 얼마나 증가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가로축 기준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갈수록 소득이 높으며 선진국에 해당한다. 가로축의 왼쪽 끝은 가장 가난한 나라의 절대 빈곤층이고, 오른쪽 끝은 가장 부유한 나라의 최상층이다. 코끼리 곡선을 보면 등~머리(B) 부분에 해당하는 계층의 소득이 크게 증가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주로 중국, 인도, 태국 등 아시아 지역 개발도상국의 중산층이며, 세계화 과정에서 혜택을 입은 ‘글로벌 신흥 중산층’으로 불린다. 반면 긴 코(C)에 해당하는 ‘글로벌 중상층’의 경우 소득이 정체하거나 줄어들었다. 이들은 대부분 선진국의 중하층에 해당하는 시민들이다.


코끼리 곡선

이렇듯 아시아 중산층(B)과 선진국 중하층(C)의 손익이 갈리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제조업 일자리의 이동’이다. 90년대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선진국에서 중하층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던 제조업 산업 부문이 중국과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이동했다. 반면 ICT 및 금융업의 성장을 중심으로 선진국 중상층 이상 집단의 소득은 증가했다. 결과적으로 세계화 과정에서 국가 간 불평등은 크게 줄었지만, 선진국 내부의 경제적 불평등은 보다 심화되었다.


우리는 코끼리 곡선을 통해 두 가지 변화를 추론할 수 있다. 첫째, 세계화는 미국 내부의 불만을 키웠다. 트럼프의 주요 지지 기반은 백인 중하층 노동계급이다. 이들은 세계화 과정에서 제조업 일자리 감소와 해외 이민노동 유입으로 인해 자신들의 경제 상황이 악화되었다고 인식한다. 이러한 불만은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폭발하여 반세계화, 자국우선주의를 주장하는 급진우파 정당의 약진으로 이어졌다. 2016년의 트럼프 당선은 우발적 사고처럼 인식되었지만 2025년의 트럼프 당선은 하나의 흐름이 되었다. 트럼프는 세계화와 불평등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소외된 집단의 불만을 ‘미국 우선주의’라는 비전 아래 성공적으로 결집시켰다.


둘째, ‘중국의 부상’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은 개혁개방을 통해 199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세계시장에 편입되었고 2001년 WTO(세계무역기구)에 가입했다. 이는 2000년대 중국의 성장과 미국의 금융 번영으로 이어졌다. 중국의 저가 수출품은 미국의 소비 활성화에 기여했고, 미국의 많은 기업들은 생산 공장 이전을 통하여 비용을 절감하며 수익을 높일 수 있었다. 주요 선진국들은 중국을 거쳐야만 제조 완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렇게 세계시장에 연결된 중국은 두 자릿수 성장을 지속하며 벌어들인 달러로 안전자산인 미국 국채에 투자했다. 이 덕분에 미국은 국채 발행을 통해 안정적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이렇게 21세기 초입 세계 경제활황을 이끈 미국과 중국의 경제적 상호의존 상태를 ‘차이메리카 체제’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차이메리카 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회학자 홍호펑은 중국 시장에서 중국 기업보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한 미국 기업들이 미중 협력에 균열을 가져오는 전환점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으로 지식재산권 보호 문제가 있다. 2009년 이후부터 미국 법원에서 중국 법인을 상대로 한 미국 기업의 소송 건수 및 기술 유출 사례는 급증했다. 또한 중국의 경제력 및 군사력이 급격히 상승함에 따라 미국은 중국을 패권에 대한 도전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에 2011년 오바마 행정부는 ‘아시아로의 회귀 정책’을 시행하며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외교안보 전략을 채택한다. 2017년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과의 관계를 ‘전략적 경쟁’으로 규정짓고, 2018년 고율 관세 부과를 통해 미중 무역 분쟁을 본격화했다.


트럼프는 이러한 세계화의 과정에서 누적된 미국인들의 불만을 성공적으로 결집시켰다. 그는 모두에게 당연했던 자유무역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며, 미국의 공장과 일자리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외적으로 전 세계 경찰관 노릇을 그만하고 중국과의 대결 같은 핵심 이익에만 집중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전환은 비단 트럼프 개인의 선호가 아닌, 2010년대 이후 미국이 선택한 변화로 이해되어야 한다.



Ⅱ. 트럼프에겐 다 계획이 있다?


미국은 천조국으로 불린다. 천조국은 미국의 국방비가 약 1,000조 원을 넘는 것에서 유래한 단어다. 또 다른 맥락에서 미국은 연간 1,000조 원 적자 비용을 감당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미국이 2024년 약 1년간 지출한 국채 발행 이자 비용만 8,820억 달러(약 1,270조 원)에 달한다. 2025년 미국의 재정적자는 약 1.9조 달러로 우리나라의 GDP 규모에 맞먹는다. 또한 미국은 1970년대 중반 이후 경상적자 1위 자리를 지켜왔다. 경상적자는 수출보다 수입을 많이 할 때 발생한다.


이러한 재정적자·경상적자는 패권국의 징표와 같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금융질서는 달러라는 기축통화를 중심으로 운용되어 왔다. 기축통화란 국제시장에서 결제 또는 교환의 기준이 되는 화폐를 의미한다. 전 세계 국가 간 무역 및 자본 결제는 모두 달러에 기반해서 이뤄진다. 전 세계 경제를 하나의 몸에 비유한다면 각종 신체 기관을 이어주는 국제금융시장을 혈관에, 달러를 혈액에 비유할 수 있다. 혈액이 꾸준히 공급되려면 심장은 계속 뛰어야 한다. 국제금융시장의 심장인 미국은 구조적으로 수출보다 수입을 많이 해서 달러를 방출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기축통화 발행국인 미국은 경상수지적자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이렇듯 기축통화국이 필연적으로 경상수지 적자를 보게 되는 상황을 ‘트리핀 딜레마’라고 한다.


(좌) 미국의 경상수지 추이 (우) 미국의 제조업 고용인원 수

미국의 막대한 재정적자 역시 구조적인 측면이 있다. 2008년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 팬데믹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대규모 통화 및 재정정책을 통해 시중에 돈을 풀었다. 이는 경제를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지만, 동시에 재정적자의 확대를 초래했다. 또한 미국은 세계 곳곳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막대한 국방비를 지출하고 있다. 이러한 패권국가 역할 또한 재정적자의 요인 중 하나이다.


니얼 퍼거슨은 17세기 스페인부터 20세기 영국에 이르기까지, 이자 지출이 국방비를 넘어서는 시점에서 부채 부담이 급증하여 강대국의 지배력 약화가 전개되어 온 패턴을 발견했다. 이러한 전환 시점을 ‘퍼거슨 임계점’이라 하는데, 문제는 현재 미국이 해당 국면을 통과하고 있다는 데 있다. 저명한 헤지펀드 매니저인 레이 달리오 또한 패권국가들의 흥망성쇠를 분석했을 때 과도한 부채와 통화 가치 하락이 제국의 몰락으로 이어졌다고 지적한다. 트럼프 행정부가 적자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과정은 미국의 패권 유지를 위한 노력이라 평가할 수 있다.


트럼프의 경제참모들은 트리핀 딜레마에 종속된 구조 자체를 문제 삼는다. 대부분 국가들이 기축통화인 달러를 보유하게 되면, 달러에 대한 수요가 많아져 달러 가치는 상승한다. 결과적으로 미국 제품 가격은 해외 소비자들에게 비싸게 느껴지게 되고, 미국의 제조업 경쟁력은 저하된다. 그러므로 이들은 미국 달러화 가치를 낮춰서 수출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환 과정에서 관세는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상대 국가와 기업의 행동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 협상 지렛대가 된다. 관세 조치의 궁극적 목표는 협상을 통해 미국 내 산업 및 일자리 투자를 늘리고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거래를 도출하는 데 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단순한 국가별 상호관세율만 볼 것이 아니라, 국가별 협상 과정 및 품목별 관세 추이를 유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지난 7월 31일, 한미 관세협상이 타결되었다. 한국은 미국에 3,500억 달러(약 487조 원) 투자하는 대신, 미국은 상호관세율을 기존 25%에서 15%로 낮추기로 합의했다. 향후 3,500억 달러 투자금은 1,500억 달러 규모 조선업 협력 펀드를 포함하여 미국 내 산업 유치에 활용될 예정이다. 15% 관세율은 일본·EU와 동일한 수준으로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또한 우리나라는 국내 농·축산물 시장을 추가적으로 개방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현재 관세율은 역사적으로 높은 수준이며, 대미투자 증가는 국내투자 여력을 감소시킬 수 있다.


특히 향후 구체적 이행 방안에 관해 주의해야 한다. 우리보다 앞서 협상을 타결한 일본의 경우, 투자 이익 배분·농산물 개방 등을 둘러싸고 미국과 갈등을 빚고 있다. 그중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대미 투자 이익의 90%는 미국이 가져간다”고 공언한 대목이 큰 논란이다. 일본은 “수익 배분은 출자 비율에 따라 달라지며, 그 수익을 얻는 것도 미국 정부가 아닌 민간을 의미한다”고 반박했다. 한미 협상 타결 후, 미국 러트닉 상무장관 또한 “한국의 대미투자 이익 90%는 미국에 돌아간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에 대해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2,000억 달러 투자금은 한도 개념으로 캐피탈 콜(capital call)1)로 이해하지, 그 돈을 다 투자하는 개념과는 많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또한 “(90% 이익 배분은) 내부적으로는 재투자 개념일 것으로 보인다”며 ‘정확하게 정해진 바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과 일본의 대미 투자금은 정부의 직접 재정 지출이 아닌, 정부계 금융기관의 출자와 융자를 통해 이뤄질 전망이며 세부적 방안은 문서화되지 않았다. 이는 향후 양국 간 협의가 지속될 것을 의미하며, 관세 조치를 포함한 미국의 협상 거래가 완전히 종결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1) 캐피탈 콜(Capital Call)은 목표한 투자 자금을 다 모아 놓고 투자금액을 집행하는 것이 아닌, 투자 자금의 일부를 조성, 투자금액을 집행한 후 추가적인 수요가 있을 경우 투자자들(LP)에게 자본납입을 요청(call)하는 절차를 말한다.


(좌) 일본 협상단과 대화하는 트럼프 대통령 / (우) 7월31일 한미 협상안 타결 내용

본래 트럼프 정책 팀은 보다 담대한 계획을 세운 바 있다. 스티븐 미란 백악관 경제자문회의 의장은 2024년 11월에 발표한 ‘세계 무역 시스템 재편을 위한 사용자 안내서’에서 일명 ‘마라라고 합의’를 제안했다. 미란은 글로벌 공공재인 달러를 사용하는 교역국이 다자간 협정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합의 방식은 기축통화인 달러 자산으로 준비자산(외환보유액)을 쌓는 교역국이 10년 이하 단기 미국 국채를 팔고 100년 만기 초장기 국채를 매입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미국은 이자 비용을 줄여 재정적자를 실질적으로 줄일 수 있다. 또한 과거 1985년 플라자 합의2)와 같이 직접적으로 달러 가치를 약화시킬 수 있는 환율 조정을 시도할 수도 있다. 미국의 달러 가치를 약화시켜 수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상대국의 환율을 직접적으로 조정시킬 수 있는 합의를 시도해야만 한다. 100년 만기 국채 매입은 장기 국채에 대한 수요를 늘려 금리 상승 압력을 완화하고 미 달러 가치를 낮추면 경상수지 적자를 완화할 수 있다.


그러나 마라라고 합의가 실제 진행되기에는 여러 문제점이 있다. 오늘날 외환시장은 단순한 일대일 거래만으로 환율을 일방적으로 조정하여 바꿀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인위적 약(弱)달러는 탈(脫) 달러를 초래할 수 있다. 트럼프 플랜은 달러화 약세(약달러)를 의도하면서도 달러 패권의 상실(탈달러)은 바라지 않는다는 딜레마를 갖는다. 실제 4월 관세조치 발표 이후 나타난 미 국채 매도세는 달러 가치를 약화시키고 재정적자 부담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미국 의회에서 통과된 스테이 블코인 법안3)은 흔들리는 달러 패권의 가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단행된 조치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2) 플라자 합의(1985)는 미국의 무역적자 해소를 위해 미국, 일본, 서독, 프랑스, 영국이 합의한 조치로, 달러 가치를 절하하고 엔화·마르크화 등의 절상을 유도한 국제 통화 협정이다.

3) 2025년 7월 17일 통과된 GENIUS Act는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을 ‘Permitted Payment Stablecoin Issuer’만 발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1:1 달러·단기국채로 완전 준비금 보유, 월별 공시 및 청산 규정 같은 투명성 요건을 의무화했다. 스테이블코인은 달러 등 법정화폐에 연동되어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도록 설계된 암호화폐이다.



Ⅲ. ‘우아한 위선’에서 ‘정직한 야만’의 시대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해 온 질서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이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란 시장 경제와 보편적 규범에 근간한 세계질서를 의미한다. 미국은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묶어 규범을 만들고, 세계시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제도화된 군사동맹을 출범시켰다. 규칙에 근간하여 UN, IMF와 같은 국제기구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동시에 자유무역을 통해 경제적 교류가 이뤄지고, 이념적으로는 서구식 민주주의와 보편적 인권에 기초한 미국의 이상을 국제질서에 투사하고자 하였다.


소련이 붕괴한 이후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을 선언했다. 그는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경제가 승리함으로써 사회제도의 발전이 종결되어, 적어도 이러한 질서를 파괴할 수 있는 전쟁이나 혁명 같은 역사적 사건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주장했다. 많은 서구 엘리트들은 중국, 러시아 등 비자유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에 적응하면서 자유화의 물결을 타게 되리라 전망했다. 그러나 예측들은 대부분 어긋났다. 러시아는 서방의 일원이 되는 데 실패했고, 중국은 시장경제를 수용하면서도 당-국가 체제4)를 공고히 했다. 9.11 테러 이후 중동에 개입한 미국의 정책은 ‘아랍의 봄’을 잉태하는 듯했으나 중동의 사정은 더 복잡해졌다.

그렇다고 하여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기획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서로 다른 국가 간 성립할 수 있는 보편적인 규칙을 성공적으로 구축했다. 일례로 국제규범에 따라 특정 국가는 임의로 통행을 제한하거나 봉쇄하지 못하며 모든 상업 목적의 배는 항행의 자유를 보장받아 왔다. 이 덕분에 우리는 머나먼 중동으로부터 에너지 자원을 안정적으로 수입할 수 있다. 합의된 규칙에 근간한 국제질서이기 때문에 상대적 약소국은 보호받을 수 있고, 힘에 의한 현상 변경은 국제사회로부터 규탄 받는다. 미국이 주도해 온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불완전하지만 적어도 인류 문명이 도달한 가장 자애로운 패권 질서였다.


문제는 오늘날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질서 주도 국가인 미국이 역할을 축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시에 서구식 자유주의를 정면 비판하는 중국이 주요한 패권 도전자로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세력권 질서’의 부활로 이어질 수 있다. 세력권 질서는 자유주의 질서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강대국들이 특정한 지리적 권역 내에서 비강대국에 대한 통제와 타 강대국의 개입 배제를 기본 원칙으로 삼는 국제 질서를 뜻한다. 미국의 일극 주도 국제질서에서는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전 세계적 항행의 자유, 규칙 기반 질서 등을 보장해 왔다면, 이제는 지리적 권역별로 영향력이 강한 나라가 저마다 가치와 규범을 강조하는 다극 질서로 세계가 재편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비유하자면 미국이 전 세계의 경찰 역할을 했던 세계에서, 각 권역별로 크고 작은 경찰들이 활동하는 세계로 이행될 수 있다.


4) 당-국가 체제는 하나의 정당이 국가의 모든 분야를 지배하는 정치 체제를 의미한다. 중국의 경우, 공산당이 곧 국가를 지배하는 통치의 주체이며 모든 영역에 대한 ‘영도권’을 기반으로 절대적 권력을 갖는다. 중국 헌법 제1조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의 영도는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와 세력권 질서 (박종희 2024.)


다극 세력권 질서는 자유주의 국제질서보다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할까? 많은 국제정치학자들은 지정학적 갈등이 고조되며 과거 식민주의를 주도했던 강대국 정치(power politics)가 부상할 것이라 지적한다. 그 예로 2022년 러시아가 ‘특별군사작전’이란 이름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사건을 꼽을 수 있다. 러시아의 논리에 따르면, 평화는 강대국이 저마다 문화권에 기반하여 세력권을 나눠 가져 힘의 균형을 이룰 때 달성된다. 이러한 세력균형이 성공적으로 작동할 경우 전쟁은 피할 수 있지만, 역사적으로 세력권의 범위를 둘러싼 갈등은 무수한 분쟁을 낳았다. 만약 세력균형이 달성되었다고 했을 때 세력권 내부의 문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예컨대 권위주의 국가인 러시아가 지배하는 유라시아 지역은 우리가 상상하는 좋은 미래와는 거리가 멀 것이다. 무엇보다 서로 다른 권역이 분절된 세계에서 인류는 이전과 같은 번영을 누리기 어렵다. 현대인이 양질의 삶을 누리는 이유는 머나먼 나라에서 생산되는 재화를 자유로이 구할 수 있고, 국경을 넘어선 문화적 교류가 활발히 이뤄지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국제 질서의 퇴조는 인류가 19세기 시절의 세계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는 역사적 함의를 갖는다.



Ⅳ.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흔들리고 미중 패권 경쟁이 심화되는 구도에서 많은 사람들은 두 가지 대응책을 제시한다. 하나는 가치 동맹에 밀착하는 방안이고, 다른 하나는 어느 편에 서지 않고 중립을 지키는 노선이다. 전자를 이념 외교, 후자를 전략적 모호성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두 길 모두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이 채택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책임 있는 노선이라 하기 어렵다. 우선 이념 외교는 지정학적 긴장도를 의도적으로 높이는 경향이 있다. 실제 신냉전 질서는 ‘한미일 vs 북중러’라는 뚜렷한 구도 하에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과거 냉전 때 미중이 전략적 관계를 통해 소련을 견제했듯, 지정학적 질서는 훨씬 복잡한 다자 관계 역학 속에서 움직인다. 세계에서 차지하는 객관적 비중을 고려했을 때 중국은 경제·외교적으로 중요한 이웃 국가이다. 외교의 최우선 목표는 전쟁을 억제하는 데 있고, 적과도 언제나 협상할 수 있는 유연성이 요구된다.


그렇다고 전략적 모호성을 추구해서도 안 된다. 중립에 기반한 실용외교는 대내적으로 좋은 구호이지만 대외적으로 나쁠 수 있다. 자국 국익만을 앞세우며 어느 편에도 서지 않겠다는 국가를 어떤 나라가 신뢰하겠는가. 70년 동안 유지되어 온 한미동맹은 대내외적으로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신뢰 관계로 자리 잡았다. 여전히 미국이 기술 및 경제 패권에 있어 압도적인 선두를 달리고 있는 현실도 부정할 수 없다. 미국은 반도체·AI 기술 협력 등을 안보 의제와 연동시키고 있으며, 중국이 주요 교역국인 동시에 제조업 경쟁자로 자리매김한 상황에서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안미경중)’이라는 옛 구호를 그대로 쓸 수는 없다. 미국의 동맹에 속한다는 입장을 명확히 하여 신뢰와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중국을 비롯한 상대국들과는 지속적 소통으로 리스크를 관리하는 방향이 현실적이다.


무엇보다 외교안보 전략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주요 강대국은 자국의 이익과 국제질서 이해에 바탕을 둔 전략에 근간하여 외교안보 정책을 수행한다. 일본은 인도-태평양 구상5)을 설계하여 미국이 아시아 정책으로 채택하게끔 만들었다. 중국과 러시아 또한 자신들이 추구하는 국제질서의 구상안을 분명히 하고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한반도를 둘러싼 대부분 국가는 제국적 경험을 갖고 있으며, 자국의 이익과 국제질서의 재편을 연계시켜 정책을 운용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여전히 외교안보 전략에 있어 명확한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고, 국내 정치의 진영 논리에 따라 정책 연속성이 저하되는 경우가 많다.


5) 일본의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FOIP)’ 구상은 중국의 영향력 확대에 대응하며, 미국, 동남아, 인도 등과의 연대를 통해 지역 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외교·안보 구상이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무역-경제 협력체

대한민국의 국익은 기존 자유주의 국제질서 규범을 유지하고 개선하는 데 기여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미국이나 중국 같은 강대국은 아니지만, 중견국으로서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규범을 지지하는 연합을 형성할 수는 있다. 대표적인 방안이 이웃국가인 일본과의 전략적 협력 증진이다. 일본과의 안보 협력 강화는 중국의 ‘무력에 의한 현상 변경’을 견제하는 의미를 갖는다. 동시에 미국의 주요 동맹국인 한일은 미국의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관세 정책, 방위비 분담금 등에 있어 미국과의 협상 국면을 공동으로 대응하여 힘을 발휘해야 한다. 이러한 자유주의 중견국 연합을 호주·캐나다 등과도 연결 지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규칙 기반 국제질서를 공고히 할 수 있는 팀을 구축해야 한다.


(좌) 전 세계 산업정책 개입건수, Juhász et al.(2024) / (우) 전 세계 신규 무역제한 조치 건수, Bosone et al.(2024)


무엇보다 경제안보와 산업·통상 정책이 중요하다. 그간 전 세계적으로 촘촘하게 형성되었던 공급망은 진영·지역별로 블록화되고 있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는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6), 반도체 4국 동맹(CHIP4)7) 등을 통하여 기술 경쟁의 영역을 안보 동맹과 연결 지었다. 또한 IRA(인플레이션 감축) 법안을 통해 자국 산업·일자리를 적극적으로 보조하는 산업정책을 부활시켰다. IRA 법안은 미국 기업에 의도적으로 세제 혜택 및 보조금을 부여하며 한-미 FTA 및 WTO 규정을 위배하는 조항이 여럿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기존 규칙 위반에도 불구하고 해당 조치들은 새로운 규범이 되었다. 다시 보호무역주의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아시아 역내 자유무역 질서를 유지해 나감으로써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한일 FTA, CPTPP8) 가입도 고려해 볼 시점이다. 또한 AI 및 반도체 등 첨단 제조업 부문에 대한 산업정책 투자를 통해 글로벌 공급망 질서에서 우리나라의 대체 불가한 위치를 유지·확대해 나가야 한다.


6) IPEF(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는 미국, 한국, 일본, 인도, 호주 등 14개국이 참여하는 경제협력체로, 디지털·공급망·청정경제 분야에서 규범 중심 협력을 추진한다. 전통적 FTA처럼 시장 개방 없이, 중국 견제를 위한 미국 주도의 전략적 경제 연대이다.

7) ‘칩4’는 미국, 한국, 일본, 대만이 참여하는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로, 기술 공유와 공급망 안정화, 중국 견제를 목표로 한다. 공식화는 미뤄지고 있지만, 미국 주도의 반도체 동맹으로서 전략적 협력이 논의되고 있다.

8) CPTPP(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는 일본, 캐나다, 호주, 멕시코 등 11개국이 참여하는 메가 FTA로, 관세 철폐와 포괄적 규범을 통해 자유무역을 지향한다.


Ⅴ. 모두스 비벤디, 대한민국의 전략.


좋은 외교정책이란 무엇일까? 국제 사회에서 우리나라의 이익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해야 하며, 동시에 우리 스스로가 어떤 결정을 해야 할지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오가는 외교 문제는 결국 국내정치의 연장이다. 미국의 전설적 외교관 헨리 키신저는 오늘날 외교정책이 포퓰리즘과 AI 기술로부터 부정적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책 결정권자들이 단기적인 이익과 여론 감정에만 기댄다면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또한 외교 전략은 복잡한 사회 정치적 맥락에 바탕해야 하는데 이는 AI 알고리즘만으로는 풀어갈 수 없는 영역이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경우, 장기적 이익과 균형에 기반한 외교 정책은 흔들리게 된다. 시민이 무엇을 요구하고 정치인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에 따라 수만 명의 일자리와 생명이 좌우될 수 있다. 국제정치에 대한 이해가 민주시민의 교양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떠하고 비전이란 무엇인가. 결국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이란 국가에 대한 가치평가(valuation)9)이다. 우리의 이익은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해야 극대화할 수 있는가? 오늘날 외교 현장은 경제적 이익을 거래하는 담판장이 되었다. 국제질서의 규칙이 뒤바뀌는 상황에서 우리는 국가 간 관계, 경제 정책을 새롭게 조율해야 한다. 만약 특정 산업에 대한 유리한 조건을 도출하기 위해, 다른 부문을 희생해야 한다면 우리는 어떤 정책 조합을 구성해야 할 것인가? 이는 외교정책을 수행함에 있어 대내외 정책을 유기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미국 시골 마을의 불만이 트럼프 현상을 불러왔듯, 트럼프의 한 마디가 국내 일자리의 지형도를 바꿔 놓을 수 있다.


9) 가치평가(밸류에이션)이란 특정 자산 또는 기업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밸류에이션은 기업의 현재 가치를 판단하여 적정 가격을 산정함으로써, 투자 결정이나 인수합병 등 다양한 상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 한스 모겐소는 모두스 비벤디(modus vevendi)를 강조했다. 모두스 비벤디는 라틴어로 ‘살아가는 방식’으로 번역되며,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타협안’을 의미한다. 현실주의자들은 세계를 비극적으로 인식한다. 비극적 인식은 현실에 대한 절망이 아닌, 한계에 대한 인정이다. 그래서 비극적 태도는 제약된 조건 속에서 최선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노력이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이상은 현실에 온전히 적용되기 어렵다. 그러나 보편적 규칙에 근거한 질서가 가장 안정적이며 최선이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세계는 복잡한 그물망처럼 촘촘히 얽혀 있고, 그 속의 우리는 운명에 휩쓸리는 존재인 동시에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주체이다. 중요한 것은 이 복합성을 자각하며 대응하는 과정이다. 정직한 야만이 튀어 오르는 시대에서 우아한 위선을 지켜 나가야 한다. 이상만 가득한 자유주의는 무모하고, 비전 없는 현실주의는 공허하다. 우리는 꿈이 있는 모두스 비벤디를 걸어가야 한다.





참고문헌


도서)

· 로버트 카플란, 『현명한 정치가』, 유강은 역, 미지북스, 2025.

· 레이 달리오, 『빅 사이클』, 조용빈 역, 한빛북스, 2023.

· 박종희, 『힘과 규칙』, 사회평론아카데미, 2024.

· 브랑코 밀라노비치, 『왜 우리는 불평등해졌는가』, 서정아 역, 21세기북스, 2017.

· 살레하 모신, 『달러 전쟁』, 서정아 역, 위즈덤하우스, 2024.

·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의 세계 질서』, 이현주 역, 민음사, 2016.

· 홍호펑,『제국의 충돌』, 하남석 역, 글항아리, 2022.


연구보고서 및 논문)

· 한국은행 조사국·경제모형실, 「2025년 2월 경제전망보고서」, 한국은행, 2025.

· Costanza Bosone, Giovanni Stamato, “Beyond borders: how geopolitics is reshaping trade”, European Central Bank, Working Paper Series, No 2960. 2024.

· Réka Juhász, Nathan Lane, and Dani Rodrik., &The New Economics of Industrial Policy&, Annual Review of Economics, 2024.

· Miran, S. I. , 「A User&s Guide to Restructuring the Global Trading System」, Hudson Bay Capital, 2024.

· Niel Ferguson, 「Ferguson‘s Law: Debt Service, Military Spending, and the Fiscal Limits of Power」, Hoover Institution, 2025.


언론기사)

· 정원석, ‘日 "수익 90%, 美 소유 아냐"…더 꼬이는 5500억달러 진실’ , 중앙일보, 2025.07.27.

· 차태서, ‘다시 겨울이 온다, 신냉전 초입에서 구냉전의 교훈 찾기’, 시사IN 885호, 2024.09.07.


https://blog.naver.com/kukyogi1984/22406591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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