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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ndys Jan 06. 2020

저도 글 잘쓰고 싶습니다.


2011년 겨울 나는 학교 학보사에 찾아갔다. 그 학기의 마지막 신문을 학교에 배포하려 분주히 준비 중인 사람들. 그중 누군가를 붙잡고는 다짜고짜 “저... 지금도 신문사 들어갈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일순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다. 그들에게 당혹스러운 빛이 스친다. 편집장과 임원진으로 보이는 몇 명은 빠른 눈빛 교환을 주고받고는 잠시 회의 타임을 가졌고 나는 곧 테이블로 안내됐다. 그리고 그들이 쓱 내민 종이 한 장.
 
받아 든 종이의 정중앙에는 “입사지원서”라고 적혀 있었다. 그 밑에는 자기소개와 카피라이팅 과제, 글을 써본 경험이 있는지, 신문사에 입사하고 싶은 이유 등 여러 항목들이 빼곡하게 들어있었다. 그저 “글쓰기 실력을 향상하고 싶어서” 신문사를 지원한 내게 주어진 첫 글쓰기 미션이었다. 뭐라고 쓸까. 고민할수록 막막한 마음이 커졌다. 지원서를 쓸 시간은 넉넉하게 주어졌지만 시간이 무색하게 형편없는 자기소개글을 내고 말았다. 다행히 면접에서 글에 대한 진정성과 패기를 내비친 덕분인지 운 좋게도 결과는 ‘합격’이다.

입사 후 매주 신문 기사 필사 원고지 10장이라는 과제와 함께 인턴 기자 6개월 수습기자 6개월, 인내의 시간을 보냈다. 수습 시절엔 주로 학교 소식을 취재하고 전달하는 보도 기사를 작성하였는데 보도 기사는 대게 육하원칙에 따라 작성해야 하는 양식이 정해져 있어서 내가 원하던 ‘글쓰기’보다는 ‘기사 작성 훈련’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내가 쓴 기사가 누군가에게, 어딘가에서는 읽힐 거란 사실은 분명 들뜨는 일이었다. 게다가 선배들의 칭찬은 수습기자도 춤추게 하는 힘이 있었다. ‘핵심 내용’만 전달하는 연습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냉혹한 평가도 늘 뒤따르긴 했지만.

1년을 버티고 정기자가 됐다. 실력도 ‘바를 정’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비로소 보도 기사 말고도 내가 쓰고 싶은 주제로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쓰고 싶은 글의 주제를 고르고 기획하는 일. 재미있었다. 게다가 직접 기획하고 취재한 글을 “정 OO 기자”라는 이름과 함께 신문 지면에서 마주할 때의 그 뿌듯함이란! 물론 B3 사이즈 신문지 두 쪽을 빼곡히 채워 글을 써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기사를 쓰기 위해 띄운 하얀 워드 창에서 외롭게 깜빡이는 마우스 커서를 보고 있노라면 내 머릿속이 더 하얘지는 것 같았던 무수한 순간들도 부지기수였다. 이 무렵 글이란 녀석이 내가 쓰고 싶을 때 술술 써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차츰 알아갔던 것 같다.


취재와 조사를 기반으로 작성하는 2면짜리 특집 기사는 작성에 어려운 점이 많았다. 우선 글의 분량이 많았고 사진과 글을 적절하게 배치하는 레이아웃을 고민하는 것도 문제였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특집 기사보다 기자의 주관적인 견해를 얘기해야 하는 한 장 짜리 ‘기자수첩' 코너가 가장 어려웠다. 기자수첩 코너는 기자인 내가 주어가 되어 써야 하는 글이다. 나만의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주제조차 정하지 못해 애를 먹는 경우가 많았다. 잘 쓴 글이든 못쓴 글이든 어쨌든 마감일까지는 완성된 ‘나만의 기자수첩’을 송고해야 하는 것이 기자의 책임이었으므로 그때만큼은 기자라는 직책이 버겁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개인적인 욕심에 글을 잘 쓰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많이 읽히는 글을 쓰는 사람.

아마 당시 알베르 까뮈나 빅토르 위고, 마크 트웨인 같은 고전을 읽으며 오래오래 읽히는 글에 대한 동경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누군가 쓴 글 한편에 진한 위로를 받기도, 푹 빠져들기도 했으니까. 나에게 글이란, 쓰는 행위란 생각 정리의 수단이자 사유와 사색의 원동력이어서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생각 정리를 잘한다는 뜻과 같았다.

그러나 막 글쓰기를 배우기 시작한 병아리 기자로서의 1년은 '글쓰기의 즐거움'보다 '고통스러움'을 각인시킨 시간이었다. 신문 한 호 한 호를 발행할 때마다 창작의 고통을 지독하게 느꼈기 때문에. 마감 전날엔 늘 글을 짜내느라 밤을 새웠던, 기자 생활 2년이 흘러 신문사에게 진한 이별을 고하며 생각했다. 다시는 글쓰기를 얕보지 말지어다.’
 

2년 후 2015년 4월, 한 독서 모임을 통해 글쓰기와 다시 만났다. 모임의 룰은 간단했다. 책을 읽고 한 편의 완성된 글을 지어 오는 것이었다. 신문사 이후 글쓰기라면 나름 좀 써봤다고 자부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웬걸, 글쓰기는 또다시 새로움과 신비함의 영역이었다.

매주 열리는 독서 모임에서 나는 매일 같이 짜릿하고 고통스러운 글쓰기를 반복했다. 책 읽고 글 쓰고, 이야기하고, 책 읽고 글 쓰고 이야기하고. 고통스러움의 끝에는 글에 대한 다른 사람의 피드백을 듣는 것과 댓글을 보는 것, 다른 사람이 써온 글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모임을 하면서도 글쓰기에 대한 고민이 여전했다. 답을 찾는 건 어려웠다. 누가 답 좀 알려주면 안 되나? 당시 썼던 글의 일부를 옮겨본다.


우리는  만나고 글을 쓰고, 읽는가. 글쓰기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만나며 이토록 치열하게 혹은 처절하게 글을 쓰고 책을 읽을까. (중략) ‘ 글을  쓰고 싶냐?’ ‘ 글을 쓰냐?’ 묻는다면 다른  못해도 지성인으로서  하나만큼이라도  쓰고 싶은   번째 이유요, 글이 읽혔을 때의 짜릿함이  번째 이유이다.”


치열하고도 처절하게, 힘들고도 재미있게 글을 썼던, 그리고 허세 가득한 8개월의 모임이 끝나고 다짐했다. ‘흥! 내가 앞으로 두 번 다시 글 쓰나 봐라!’



(2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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