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공연을 보려면
공연을 한참 동안 못 봐서인지 유난히 힘 빠지는 겨울을 보냈다. 일정을 비워두고 극장까지 간다는 것은 때때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병원에 계신 아버지를 두고 공연 취재를 위해 늦은 시간까지 공연을 봐야 했던 문화부 기자분의 넋두리가 떠올랐다. 아이들을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 공연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저녁 7시에 공연이 시작한다고 해도 끝나고 돌아오면 밤 10시, 11시가 되니 이미 잘 시간을 넘기고 1박 2일 동안 아이들을 맡겨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월간지 기고 아이템 선정을 위해 공연들을 살펴보다가 놓치고 있던 공연을 발견했다. 좌석수가 251석이라 티켓을 구하기 어렵기로 유명한 돈마 웨어하우스 Donmar Warehouse 작품이었다. 공연 예매 페이지를 열어놓고 남아 있는 자리가 있는지 살폈다. 매진된 날짜는 '가능한 좌석이 없다'는 문구가 떴는데, 간혹 저 문구 대신 '좌석배치도'를 보여주는 회차가 있었다. 막상 좌석배치도에는 선택할 수 있는 좌석이 없는데도 기대를 갖게 했다. 윈도 창을 닫지 않고 열어두었다가 수시로 새로고침 했다. 공연은 2월 8일에 끝나는데 그전에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클릭하며 앞으로, 뒤로 회차를 옮겨봤다.
그러다 갑자기, 선택할 수 없는 회색 자리들 사이로 빨간 점 하나가 보였다. 그것도 무려 1층! 정면이 아닌 사이드 좌석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빠르게 클릭하고 예매를 진행했다. 캡처할 여유는 없었다. 결제가 완료되고 e티켓을 받을 때까지 행여라도 어그러질까 긴장했다. 다행히 아무런 오류 없이 예매가 됐다! 겨우내 움츠러들고 쳐졌던 마음이 단번에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선 예매, 후 스케줄 정리. 감사하게도 낮 2시 30분 공연이었다. 러닝타임을 확인해 보니 2시간 20분. 집에 돌아오면 6시 정도 될 터였다. 그때까지 아이들을 맡길 곳을 찾아야 했다. 두 가지 옵션이 있었다. 학교에 돌봄을 신청하는 방법, 친구 집에 부탁하는 방법. 일단 학교 돌봄 신청을 오래 안 해봐서 어떻게 하는지 로그인 아이디와 비번을 확인해 놓고 아이들에게 의사를 물었다. 10세 어린이는 꼭 자신에게 물어보고 일정을 정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아이들이 학교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10세 어린이는 친구 집에 가있겠다고 했다. 내 멋대로 돌봄 신청을 안 하기를 다행이다. 그러면 친구 엄마가 되는지 물어봐야 할 차례다. 다행히 된다고 하셔서 아이들을 학교에서 데려갔다가 내가 올 때까지 봐주기로 하셨다.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면서 아이들에게 일정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가볍게 혼자서 기차와 전철을 타고 시내로 갔다. 공연장 근처에 있는 먼머스 커피에 가서 모카포트용 원두를 샀다. 하루에 커피 한 잔이 건강을 위해 지키려고 하는 원칙이지만, 원두만 사서 나오기는 아쉬워서 이 날은 두 잔을 마셨다. 진한 오트 플랫화이트를 마시면서 아이 친구 엄마에게 아이들 봐주셔서 감사하다는 문자를 보냈다. 로비에서 프로그램북을 구매한 후 극장 문이 열리자마자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내가 극장을 좋아하는 이유는 늘 새롭다는 것. 공연마다 다른 무대를 보는 것도 즐겁지만 객석은 거의 비슷한 모습이었는데 'Natasha, Pierre and the Great Comet of 1812'에서는 모든 자리마다 동그란 전구가 빛나고 있었다. 벤치형으로 이어진 의자 등받이에 이 공연만을 위해 한 사람 간격으로 단단하게 고정된 전구들이 켜져 있었다.
무대 가운데 원형 구조물과 2층에 세워진 MscoW 등을 감상하며 사진을 찍었다. 내 자리는 D36으로 열 중간쯤이었다. 프로그램북을 보고 앉아 있으니 다른 관객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친구와 함께 온 발랄한 두 관객은 같이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나도 “이 공연 표를 구하다니 너무 기뻐!!!”하며 호들갑을 떨고 싶었다.
내 오른쪽 옆자리에는 나이가 지긋하지만, 극장 나들이에 한껏 멋을 낸 여성 두 분이 앉았다.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앉아 있었다. 다음 차례로 온 노부부는 D열 가장 안쪽 자리였다. 나는 앉아 있는 상태로 다리를 있는 힘껏 의자 쪽으로 당겨 두 분이 지나갈 공간을 내어드렸다. 곧이어 젊은 여자 관객이 왔다. '쏘리'를 외치며 다른 관객들 앞을 지났다. 그녀는 내 옆 두 여성분을 지나며 "I'm gonna have to shimmy!"라고 말했다. 시미가 뭘까 생각하고 있는데, 지나가라고 비켜주던 D34 여성분이 'shimmy'라는 단어 선택이 너무나 적절하다며 친구와 한바탕 웃는 것이다. 바로 사전을 찾아봤다.
이런 단어가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히프와 어깨를 흔들며 춤추는 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단어가 있다니! 게다가 엉덩이와 어깨도 아니고 '히프'라고 옆자리 관객이 칭찬한 대로, 정말 이 상황에 적절했다. 그녀의 탁월한 단어 선택에 감탄했다. 시미로 한바탕 웃고 난 후, D열 다른 관객을 맞을 때는 나와 내 옆자리 여성분들, 입구 쪽 부부가 일어서서 통로로 나갔다. 한 명이 올 때마다 차례차례 나갔다가, 다시 차례대로 들어왔다. 두 번을 그렇게 했는데도 내 왼쪽 옆자리가 아직 비어 있었다. 오른쪽 옆자리 관객이 둘러보더니 '우리 아직 한 번 더해야 해'라고 말해줬다. 드디어 내 옆자리 D37 남자 관객이 도착했고, 우리는 또 연결된 소시지처럼 줄줄이 나갔다가, 그 사람을 들여보내고 줄줄이 들어와 앉았다. D열이 가득 찼다.
객석에 켜져 있던 전구 불빛이 약해지면서 극장은 어두워졌고, 공연이 시작됐다. 연주자들이 1층과 2층 사이드에 흩어져 앉아 있었고 많은 배우들로 무대가 꽉 채워졌다. 프롤로그가 엄청 신났다. 각 인물을 소개하는 곡이었는데 마치 자기소개하기 게임을 하듯 이름과 특징을 반복했다. 원형의 구조물에 둘러앉아 노래와 안무를 노련하게 해냈다. 관객들은 긴장을 풀고 깔깔 웃기도 하고 폭소를 터뜨리며 공연에 집중했다.
나중에 인스타에 사진을 공유하고 알게 된 사실인데, 내가 봤던 공연은 한국에서 '그레이트 코멧'으로 공연했던 작품이었다. 공연의 콘셉트이나 규모가 너무 달라서 같은 작품일 것이라고 전혀 짐작을 못했다. 한국에서는 배우들이 연주를 겸했고, 코멧석이 있어 이머시브적인 관객과 배우들 간의 거리가 매우 가까웠다고 한다. 2012년 미국 초연 모습도 독특했다. 같은 작품의 다른 프로덕션을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돈마 웨어하우스에서 공연한 런던 프로덕션은 독특하고 좁은 무대를 활용했다. 2층 난간에서 이루어진 장면도 있었고 봉을 타고 오르기도, 빠르게 내려오기도 했다. 불장난이 끝난 것을 알게 된 나타샤의 슬픔은 그녀의 등에서도 느껴졌다. 그런 그녀를 위로하는 소냐의 목소리에 짙은 호소력이 있었다. 세상을 통달한 듯 깊은 공허가 느껴지는 피에르도 좋았다. 객석 사이로 배우들이 들고나며 관객들 가까이에서 호흡했다. 이 공연의 신나는 프롤로그도 오래 기억하겠지만, 무엇보다 극장의 좁은 객석을 지날 때마다 히프와 어깨를 흔들며 shimmy를 떠올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