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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고 후유증

마감이 작가를 만든다

by 정재은

내가 희곡을 썼다. 곧 공연될 희곡을.

오래전 일이지만, 대학 4년 동안 나는 극작을 배웠다. 졸업을 위해 세 작품을 제출해야 했고, 그중 하나는 동기들, 선후배들과 함께 무대에 올려야 했다. 자기소개서에도 적었듯이, 그 희열을 잊지 못해 공연계 주변에서 계속 일했다. 내가 쓴 글자들이 무대에서 살아 숨 쉬던 짧은 시간. 그 강렬한 느낌을 다시 경험하고 싶었지만, 당장 핸드폰 요금을 낼 돈을 벌어야 하는 것도 현실이었다. 결국 직장 생활을 선택했고, 경험이 쌓이면, 시간이 나면 다시 써야지 했던 것이 어느덧 25년이 흘렀다.


그러고 보니 브런치에 올린 첫 글도 신춘문예 낙선 소식이었다. 2018년에도 슬금슬금 시도는 하고 있었구나. 그러다 갑자기 원고 의뢰를 받았고, 짧은 시간 안에 썼다. 이렇게 써도 되는 걸까? 유난히 부담스러웠다. 물론 만족스럽지는 않다. 만족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 주어진 시간 안에 최선을 다하는 것일 뿐이라는 위안을, 원고를 제출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건넨다. 이게 최선이었어. 완벽하려는 욕심을 버렸다. 정말 대충 썼다. 낭독 공연을 거쳐 본공연을 올릴 예정이므로, 그때 더 수정하고 보완하면 되지 하는 마음이었다.


수많은 공연을 봤지만, 내가 직접 연극을 쓴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인물들은 계속 앉아서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움직임도,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요소도 없었다. 관객들을 졸게 만들기 딱 좋은 작품이었다. 등장인물은 여섯 명인데, 결국 다 나였다.


편집 일을 해봤기 때문에 마감은 반드시 지키려고 하지만, 또 편집 일을 해봤기 때문에 하루 이틀 늦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원고를 마무리하려던 주말, 날씨가 너무 좋아 피크닉을 갔고, 그 후엔 피곤해서 쉬었다. 결국 "내일까지 드리겠습니다"라고 약속한 후, 화요일이 되었다. 오랜만에 센트럴에서 약속이 있어 겸사겸사 보고 싶었던 전시도 예매해 두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면서 점심 도시락을 싸고, 입으로는 "빨리 먹어, 옷 갈아입어, 양치해"라고 외치는 분주한 시간이 흘렀다. 아이들을 늦지 않게 학교에 보내고, 노트북을 챙겨 지하철을 탔다.


어젯밤에 수정한 부분을 다시 살펴보며 마무리했다. 인물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장면을 바꾸고, 그에 맞는 대사도 추가했다. 할아버지가 타셔서 자리를 내드려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앞의 청년이 자리를 양보했다. 덕분에 고마운 마음으로 불안정한 지하철 와이파이 대신 핫스폿을 연결했다. 도착하기 전까지 수정을 끝내야 했기 때문에 속도를 낼 수밖에 없었다. Embankment 역에서 내려 메일을 전송했다.


드디어 희곡 한 편을 완성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기뻤다. 며칠 동안 나를 짓눌렀던 원고의 압박에서 벗어나니 마음이 편안했다. 마침 런던의 4월은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커피와 브런치는 맛있었다. 짧은 여유를 틈타 내일 도시락 재료로 쓸 양상추와 나의 플랫화이트를 위한 오트밀크도 샀다. 아이들 하교 시간에 맞춰 기가 막히게 도착했다. 여유롭게 집으로 돌아와 이른 저녁을 준비했다.


덩어리 고기로 만든 토마토 스튜를 아이들이 생각보다 잘 먹지 않았었다. 이미 한 번 얼렸다 녹인 것이라 다시 얼릴 수도 없었다. 갈아서 라구 소스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라구 파스타를 먹겠다고 했고, 나는 넓은 면을 삶고 스튜를 갈아 소스를 만들었다. 남은 음식을 버리지 않고 잘 활용할 수 있어 흐뭇했다.


아이들에게 파스타 위에 올릴 치즈를 갈게 했다. 면은 알덴테로 익혀 넓은 웍에서 소스와 버무렸다. 파스타를 그릇에 담으며, '방과 후 활동이 없는 방학 전 주는 참 여유롭구나. 한 시간 차이가 이렇게 평화롭다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갑자기 떠올랐다.


"세바스티안!"


어쩐지 너무 여유롭더라니. 아이 친구 픽업을 잊은 것이다. 급하게 파스타 한 접시를 덜어놓고, 아이들에게 먹고 있으라고 외치며 차 키를 들고 뛰쳐나갔다. 아이들을 집에 혼자 두는 걸 꺼리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아무도 문 열어 주지 마!"라며 당부하고 나섰다.


돌봄 교실인 티타이머에 도착하니, 아이가 외투와 가방을 챙겨 나왔다. 차에 태우자마자 "애들은 어디 있어?"라고 물었다. "응… 오늘 좀 먼저 갔어…"라고 얼버무렸다. 아침에 종이상자를 챙겨 갔기에 "오늘 만들기 재미있었어? 뭐 만들었어?"라고 물었다. 아이는 자신이 만든 탑이 두 번째로 컸다고 대답했다. 그러다 갑자기 "음… 왜 애들이 없는지 알겠다…"라고 중얼거리더니 조용해졌다. 나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활달하고 목소리도 큰 아이여서 가끔 데려다주는 길이 힘들었는데, 둘만 있는 차 안에 적막이 흘렀다.

아이가 집 앞에서 느릿느릿 걸어가 초인종을 눌렀다. 아이 엄마는 아이 표정이 안 좋아 보였는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제가 3시에 픽업했어야 했는데 늦어서 미안합니다."라고 말한 후, 아이에게 잘 있으라고 인사하고 나왔다.


집에 돌아와 문을 열자, 큰애가 계단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파스타를 더 먹고 싶었는데 팬이 뜨거워 덜지 못했어." 면이 넓고 길어서 나도 덜어내기 어려웠다. 파스타를 더 덜어주고, 나도 한 접시 덜어 식탁에 앉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계속 미안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이제는 단순히 캘린더에 입력하는 것으로 안심할 수 없다. 반드시 알림 설정까지 해둬야겠다.


다음 마감일이 또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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