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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셜노마드 Jul 16. 2015

국내 CSR 슬쩍 되돌아보기

기업의 사회적 책임, 어디까지 와 있고 어디로 가야 하나?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용어와 개념이 한국사회에서 본격적으로 확산한 지 이제 15년가량 되었다.


2003년에 2개의 국내 대기업이 지속가능성 보고서라는 이름의 공식 보고서를 최초로 발간했고, 이후 매년 지속가능성 보고서 또는 CSR 보고서를 발간하는 기업들이 꾸준히 늘었다. 같은 기간 CSR을 전담하는 개인과 조직도 많이 증가했고,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CSR을 담당하는 임원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2010년이 지날 무렵에는 L 모 그룹 지주회사 내에 계열사들의 CSR을 진두 지휘하는 경영진급 임원과 전담팀이 신설되는 고무적인 사례들도 있었다. 기업의 자발적인 CSR 실천을 촉진하기 위해 만든 유엔글로벌콤팩트 한국협회도 매년 회원 수가 지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기업들뿐 아니라 공익과 사회적 책임을 전문으로 하는 언론 섹션들도 생겨났고, CSR을 다루는 기사도 급격하게 늘었다. 국내 투자자들은 요원하지만, 글로벌 책임투자자들의 목소리도 무시하지 못 할 만큼 커졌다. 이런 사례들을 볼 때, CSR이 기업 경영에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여진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CSR 분야의 양적인 성장이 질적인 성숙과 진정성까지 담보하지는 못한다는 사실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CSR 비전체계를 갖추고 원대한 포부를 대외적으로 선언한 기업들이 오너의 배임과 횡령, 비윤리적인 조직 운영, supply chain 내에서의 인권문제, 조직 내 차별, 생태계 파괴 등으로 대중들에게 비난받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가장 일반적인 CSR 활동인 지속가능성 보고에서도, 상당수 기업은 수 천만 원 또는 억이 넘는 돈을 들여 보고서를 발간하는데도 매년 별다른 고민 없이 발간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심지어는 이전 보고서와 문구 하나 틀리지 않는 내용을 그대로 베낀 사례도 다수 존재한다.


일례로, 직접 분석했던 한 기업은 보고서 내에서 사회공헌 활동을 설명하면서 내용은 이전 보고서에서 복사하기, 붙여넣기 한 듯 같은데 단어만 ‘동반성장'에서 ‘CSV’로 변경한 적이 있었다. 관점이나 철학 없이 트렌드 반영하기에 급급한 것이다. 이런 경우 담당자에게는 또 하나의 일이요, 받아들이는 이해관계자에게는 또다른 홍보수단 이상의 의미가 없다.


최근에는 CSR이라는 용어 자체가 고루한 개념으로 취급받거나, 왜곡되어 사용되는 경우도 점점 증가하고 있는 것 같다. 아직도 CSR을 사회공헌이나 윤리경영과 동의어로 이해하는 ‘어르신'들이 계시는가 하면, CSP(Corporate Social Performance)나 CSV(Creating Shared Value) 같은 개념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식의 억지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CSV는 좋은 인사이트를 주는 개념임에도 일각에서는 CSR과 의도적으로 연관시켜 오용하고 남용하는 문제가 심각하다. 노동, 인권, 윤리 등 실천도 쉽지 않고 부담스러운 주제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어 CSR을 내심 불편해하던 기업들에게 CSV는 이해관계자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솜사탕이자 기업 이미지 제고를 위한 날개가 되어주기도 한다. 아직까지는 대기업 중 C 모 그룹과 S 모 그룹 정도 외에 CSV를 제대로 실행할 역량과 의지를 모두 갖춘 기업은 잘 보이지 않는다.


물론, 대다수 기업에서 CSR 관련 조직의 중간관리자와 실무담당자들은 상당한 진정성과 고민을 가지고 업무를 대한다. 자신이 속한 회사의 거버넌스와 주어진  자원하에서 가장 바람직하면서도 실행 가능한 CSR 전략과 사업들을 완수해내고자 하는 분들의 노력에는 박수를 칠 만하다. 때문에, 이들은 자신들의 CSR 활동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외부의 시선이 도리어 답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이들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다. 실무관리자급에서 나오는 좋은 아이디어와 노력이 내부 보고 과정에서 이해도가 높지 않은 임원들의 기호로 인해 틀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을. 경영진의 의지와 철학이 결국 그 기업의 CSR 수준과 방향에 결정적 요소라는 점은 굳이 이론적 근거가 대지 않아도 자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 내 담당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국내 기업의 CSR 실천 수준은 냉정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


내가 크고 작은 기업들을 자문하고 심사하는 ‘CSR 전문가'로 수 년을 활동하다가 슬로워크(slowalk)라는 작은 회사의 Chief Sustainability Officer로 경로를 틀게 된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지속가능성과 사회적 책임의 시대에 CSR을 진정성 있게 실천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모델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고 본다.


CSR에 나름의 관심도 가지고 어느 정도 인적, 물적 자원도 투자하는 기업들은 많지만, 진정성에서  의심받지 않고 이해관계자로부터 감동과 존경심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정말 ‘바람직한 기업'은 너무 부족하다. 바람직한 기업이란 무엇일까? 존경받는 기업은 어떤 기업일까? 이런 질문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기업을 접할 때 ‘대안적'이라는 생각이 들고, 깨달음을 얻은 듯 정신이 번쩍 뜨이고, 나도 정말 다녀보고 싶다는 바람이 드는 ‘반응’은 공통적일 수 있다고 믿는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다니는 회사가 그런 바람직한 기업의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제대로 한 번 고민해보려 한다. 그리고 그런 기업이 이해관계자들에게도 매력적인 기업일 수 있다는 CEO와 구성원들의 믿음을 함께 실현해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10년 정도 전에는 우리나라의 CSR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런 논쟁이 활발했다. 

국내 기업들의 CSR 수준을 질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에 처음부터 집중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우선은 최대한 많은 기업들이 CSR을 접하고 기초적인 수준으로라도 널리 확산시키는 것에 집중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는 CSR 전문가들에게도 이득이고 기업들에게도 부담 없는 양적 확산 쪽으로 발전해 왔다. 그 결과, 오늘날 CSR은 나름 식상한 주제가 되어 버린 측면이 있고, 기업의 CSR을 제대로 돕겠다고 기치를 내걸었던 상당수 컨설팅 기관들은 어느 순간부터 자기  밥벌이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인다. 기업 담당자들 중에는 실망감은 늘고 열정과 보람은 줄면서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사람들도 눈에 띈다. 이제는 양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맞아! CSR은 저렇게 해야지'라고 무릎을 탁 칠 수 있는 기업들이 좀 나와줘야 한다.


마지막으로, 현시점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하나 있다. 사실 CSR에 대해 위에서 언급했던 분석과 비판도 대개는 대기업들에 대한 것이다. 반면에, 우리나라 기업체 수의 99% 이상을 차지하는 중소, 중견기업은 CSR 리스크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음에도 CSR을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는 여력은 더 부족하다. 이런 점에서, 중소기업의 CSR에 대한 지원과 관심이 매우 활발한 유럽의 토양이 부럽기도 하다. 앞으로는 중소, 중견기업의 CSR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한 사회적 노력이 더 많아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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