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환 문학관을 다녀왔다.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으로 잘 알려진 박인환은 1926년 인제에서 태어나 1956년 3월 ‘이상’의 기일을 기념한다고 3일간 폭음한 탓에 결국 급성 알코올중독성 심장마비로 요절했다. 기껏 30년 세월을 살다가 우리 곁을 떠났다. 왜 문인 중에는 그렇게 급하게 세상을 뜬 사람이 많은 것일까? 내가 문학관 기행을 시작하면서 처음 찾았던 기형도, 그리고 김유정과 이상, 박인환도 모두 삼십 언저리에 사랑하는 사람들 곁을 떠났다. 그저 슬픈 일이다.
인제 상동리에는 박인환 문학관이 있다. 문학관 내부는 박인환이 평소 즐겨 찾던 명동 거리의 주점가를 재현해 놓았다. 박인환의 마지막 시인 ‘세월이 가면’이 탄생한 대폿집 ‘은성’(아시다시피 많은 문인의 아지트였던 주점으로, 최불암의 모친이 운영했다)도 포토존으로 구성해 놓았고, 박인환이 운영했던 서점 ‘마리서사’와 모더니즘 시 운동의 시초가 된 선술집 ‘유명옥’, 위스키 시음장 ‘포엠’, ‘모나리자 다방’ 등 다양한 장소가 재현되어 있었다.
‘세월이 가면’은 은성에서 이진섭, 나애심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즉석에서 지은 시로, 박인환의 시에 이진섭이 곡을 붙이고 나애심이 불렀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가사에는 빠진 부분도 있다. 나중에 도착한 테너 임만섭에 의해서도 불려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훗날 우리가 아는 ‘박인희’에 의해 지금 우리가 아는 곡으로 재탄생한 박인환의 대표 시이다.
박인환은 ‘국제신보’ 주간 송지영의 추천으로 시 ‘거리’를 발표하며 문단에 발을 디뎠다. 이후 ‘신천지’에 ‘남풍’을 시작으로 글을 발표하였고, 문학평론가, 번역가로도 활동했다고 한다. 영화평론 분야에서는 국내 영화뿐 아니라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 제작, 상영된 수백 편의 영화를 소개하며 한국 영화계에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으며, 이진섭, 오종식, 유두연, 이봉래 등과 함께 ‘한국영화평론가협회’를 발촉 했다. 그런 활동에 가려서 박인환은 다른 시인에 비해 남긴 시가 많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박인환의 대표 시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이 죽기 직전에 쓴 시다.
양복을 즐겨 입고 명동 거리를 주름잡으며, 위스키 '조니 워커'와 '카멜' 담배를 즐겼던 것으로 미루어 박인환을 부유한 시인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실상 박인환의 짧은 인생에 녹아있는 화두는 ‘가난’이었다고 한다. 박인환에게 있어서 ‘가난’은 주눅 들어야 하는 ‘가난’이 아닌, 있는 그대로, 가진 것 그대로 순박하게 살아가던 고향 인제의 사람들의 삶과 같은 것이었다.
박인환이 활동한 시기는 다른 요절 문인과 마찬가지로 기껏 10년 남짓이었다. 20세에 마리서사 서점을 개업한 후, 다음 해에 등단했고, 그 이후로 23세에 동인지 ‘신시론’을 발간했다. 잠시 자유신문사 문화부 기자 생활도 했으며, 세계일보에 ‘나의 생애에 흐르는 시간들’, ‘민성’에 ‘지하실’, ‘신천지’ 5월호에 산문 ‘아메리카의 영화시론’, ‘신천지’ 10월호에 ‘사르트르와 실존주의’ 등을 발표했다. 이듬해 경향신문으로 자리를 옮겨 합동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했다.
이후 전시에는 종군기자로 활동했고, 시 ‘신호탄’, ‘고향에 가서’, ‘문제 되는 것’, ‘벽’ 등을 발표하였다. 박인환은 휴정 협정 후, 피난지였던 부산 광복동에서 서울로 돌아와서 ‘박인환 선시집’을 발간했다. 그 짧은 활동 기간 중에 전쟁이라는 비극도 겪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 기간이 더 짧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래도 박인환은 그 짧은 활동 기간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어느 시인에 비해 현재 많은 사람의 입에서 불리는 유명한 시를 발표한 시인이었다.
내가 방문한 그 시기에 마침 ‘박인환 문학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백일장과 시 낭송회를 비롯해서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행사와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문학관에서 열리고 있던 “박인환 시 그림책 ‘오월의 바람’ 원화 전시회”에 소개된 시를 적어 보겠다.
오월의 바람
그 바람은
세월을 알리고
그 바람은
내가 쓸쓸할 때 불어온다
그 바람은
나에게 젊음을 가르치고
그 바람은
눈물과 즐거움을 갖고 있다
그 바람은
오월의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