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1786호, 1787호 실험 실패, 표본 4543개 남아있습니다.
실험 대상으로 뽑힌 건가? 7월 달부터 날 고용했던 외계인이 문자로 해고 통보를 보내왔다. 손님들이 은근슬쩍 앞치마에 꽂아준 팁도 다 긁어가던 그 외계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식당에 나와야한다며 충성을 맹세를 요구했다. 나는 그에게 가지고 있던 담배 몇 개비를 건네거나 매일 2시간 이상의 초과 근무를 하며 그 맹세에 응했다. 식당 이모들은 그가 외계인이라는 걸 어떻게든 알려 주려했지만 나는 도리질을 치며 믿지 않았다. 나는 꼬박 꼬박 돈을 주는 그가 그저 정말 고마울 뿐이었다.
병구는 실험대상으로써 외계인들이 주입한 고통은 그의 삶에 연속적으로 펼쳐진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정없이 때리고, 병구의 어머니는 결국 우산으로 아버지의 머리를 찌른다. 수업료를 못 낸 이유로 팬티 바람으로 아이들 앞에서 매질을 당한다. 교도소에서도 폭력은 이어진다. 폭력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길들이고 병구는 또 그 폭력 앞에서 죽어가는 여자 친구를 보며 눈물을 흘린다. 너무 말도 안 돼는 일들에 그가 지구인으로써 유일하게 세상이 뭔가 잘못됐다는 의심을 품는다.
병구와 순이의 정말 외계스러운 모자와 지하실의 수많은 마네킹들이 SF와 스릴러 장르가 혼합된 세계를 만든다. 병구의 얼굴은 두꺼운 그림자를 주어 눈만 거의 보이게 하는 방식이 재밌다. 추형사와 김 형사를 잡는 샷에서 카메라의 움직임은 갑자기 뮤지컬 장르인 물랑루즈를 생각나게 한다. 고등어 내장에 찢어진 종이가 흩뿌려진 샷이나 강 사장을 고문할 때 손바닥에 못이 빠지는 디테일을 다 보여주는 고어스러운 면도 있다. 블랙코미디라고 부를 수 있는 두 가지 장면도 발견했다. 강사장이 발로 차며 멈췄던 병구의 심장이 다시 뛰는 장면, 병구의 아지트에 온 추형사의 눈을 피해 발가락으로 리모콘 버튼을 누르는 병구가 너무나 우스웠다. 인쯔텐을 과다하게 섭취하고 환자복을 한복스타일로 재 코디한 어머니가 나오는 부분도 참 기발하다. 마음껏 펼쳐지는 한 감독의 상상력이 예술로 승화되는 부분이다. 장면, 장면 마다 영화가 잘 팔릴 수 있는 관습을 되풀이하던 기존 한국 영화들을 비웃듯 그걸 깨버린다. 전위적이다. 영화의 네러티브와 영상언어의 전개방식이 같다.
서울대 김 형사의 총이 결국 병구를 쐈다. 순이는 로봇의 팔에 목이 졸려 죽었다. 강 사장의 발길질로 병구의 얼굴은 묵사발이 됐다. 죽은 병구에게 강 사장은 ‘너희들은 날 못 이겨.’라는 대사를 내뱉고 떠난다.
PK45 행성의 외계인들이 만든 체계나 이념들은 어떤 것 보다 견고했다. 나 같은 지구인들에게 사유재산의 정의와 내 노동의 생산물과 비등하게 주워지지 않는 월급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건 아주 이상했다. 지구인들은 애초부터 그렇게 생겨먹은, 가능한 많이 교육 받아야하고 돈은 대부분의 것들을 이길 수 있는,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 그 세계를 의심해볼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열심히 일하다가 23살 너무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황유미씨를 기억한다. 아직도 산재가 인정되지 않았지만 2014년에 그 사건을 다룬 ‘또 하나의 약속’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견고한 삼성공화국에 조금씩 균열이 보인다. 많은 실험 표본들이 죽어가고 있지만 지구인들은 외계인들이 넣어놓은 고통이 무엇이고 무엇이 부당한지 조금씩 스스로 깨달아가고 있다. 나 역시 실험 대상이 되도 이제 무서울 게 없다. 지구는 PK의 행성의 왕자에게 그렇게 쉽게 부숴 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