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덕희와 성미의 출발

긴 길의 시작

by 정루시아

인천공항 만남의 장소에 일찌감치 도착한 덕희는 사전 모임에서 받은 산티아고 순례길 책자를 들여다보았다. 이미 한 번 정독했지만, 책 내용을 다시 읽을수록 출발이 믿기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평생 억척같이 돈을 모아 동생들 학비를 대고, 자식들 교육비에 썼던 자신이 이렇게 큰돈을 흔쾌히 들여 첫 해외여행인 순례길에 오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책을 손에 든 채 공항 의자에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웠다.

아침밥에서 해방되어 유럽의 낯선 땅을 30일간 자유롭게 걷는다니! 인생은 참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여행사에서 받은 일정표와 책자 속 순례길 지도를 번갈아 살펴보며 여정을 상상하던 찰나, 성미가 성큼성큼 만남의 장소로 다가왔다. 성미는 환한 미소로 손을 번쩍 들었다. 예순이 가까워졌는데도 주름 하나 없는 피부는 밝고 투명했다. 머리를 올백으로 한껏 머리 위에 몰아 묶어서 그런지 성미의 눈이 위로 당겨 올라간 듯했다. 그래서일까? 십 수년은 더 젊어 보였다. 큰 바둑판 무늬의 후드티를 입고, 옅은 회색 운동복 바지와 보라색 양말을 신고 있어 순례길이 아닌 따스한 바닷가 관광지를 가는 40대 여행객으로 보였다.


성미는 165cm 정도의 키였지만 팔다리가 가늘고 길어 170cm는 되어 보였다. 배낭을 내려놓으며 성미가 덕희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덕희! 뭐 해? 여기서도 공부해? 야, 진짜 우리 떠나는 거 맞아?"


성미는 덕희가 순례길 책자를 열심히 읽는 모습을 보며 주일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성당 마당에서 공깃돌놀이를 하던 시절말이다. 덕희는 언제나 자기 순서가 돌아오기 전까지 연습을 하던 아이였다. 다섯 개의 공깃돌을 손등에 올렸다가 잡아채는 연습을 쉬지 않았기에, 덕희의 차례가 되면 한참을 이어하곤 했다. 가난했지만 남의 것을 탐내지 않았고, 시시비비가 갈리는 일에는 말없이 승복하던 모습이 기억에 선명했다. 그래서일까, 덕희는 친구들 사이에서 누구에게도 시샘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끈기가 있는, 믿을 수 있는 친구였다.


그런 덕희를 보며 성미는 문득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딱 집어 말할 수 없었지만, 성미를 살아오며 자신의 마음속에 수많은 초라함이라는 잡초를 무성하게 키우고 있었다.


"성미야, 넌 아가씨 같다. 누가 봐도 오십 대 후반 아줌마로는 안 보여. 아니지, 이제 우린 할머니지. 나도 주미도 할머니인데, 넌 연예인 같다! 늘씬하고 야들야들하니."


성미는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너~, 연예인 눈앞에서 본 적 없지? 무슨 연예인이야. 난 그냥 노처녀도 아니고 노할머니야. 결혼도 못 한.

그런데 넌 뭘 그렇게 책을 뚫어지게 봐? 눈 버려. 우리 나이엔 보는 것도 아껴야 해. 허긴, 준비하면 역시 덕희지. 뭐든 공부하고 챙기고. 남편이랑 애들은 잘 있지?"


"그럼, 잘 지내지. 다들 자기 삶 사느라 바쁘고. 너희 엄마는 요즘 어떠셔?"


"그럭저럭 괜찮아. 그래도 맨날 여기저기 아프다 하셔. 뭐, 원래 나이 들면 다 아프지 않겠어? 안 아픈 게 이상한 거지."


성미는 배낭을 내려놓고 덕희 옆에 조용히 앉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인천공항에서 책을 보고 있는 덕희를 보니 성미 마음이 푸근해졌다. 작고 똘똘한 덕희는 어깨에 나잇살이 붙어 둥글둥글한 느낌이었지만 허벅지는 튼실해 생동감 있는 기운은 여전했다. 셋째를 대학 보내고 수년간 주말마다 산악회를 따라 전국의 산을 누빈 자태가 드러났다. 은행 산악회에서 총무도 하며 일이건 취미 건 열심히 살아온 덕희는 작은 체구에 탄탄함이 배어 있었다.


성미는 다섯 친구 중 수연과 제일 잘 맞았고 가장 편한 친구이기도 했다. 주미는 지나치게 내성적이고, 숙이는 세 아이를 키우느라 바쁜 데다가 생각의 결이 달랐고, 수연은 시원스럽게 말하는 성격이라 마음이 가장 편했다. 적어도 수연이 이혼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래서였을까? 3년 전 수연이 함께 순례길을 가자고 했을 때 잠시 일을 쉬어도 되지만 나서지 않았다. 남편의 불륜으로 이혼한 수연이었다. 수연과 30일을 걸으며 수연을 위로하기엔 성미는 떳떳하지 못했다. 그런데 2년간 코로나 사태로 몸과 마음 모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덕희가 순례길을 간다 하니, 성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직서를 냈다. 일이 하고 싶으면 근처 요양병원에서 다시 시작하면 되니 말이다.


어려서 함께 놀고 집안 사정도 잘 알지만, 성미는 덕희에게 조심스러웠다. 직장생활도, 가정생활도 늘 당당해내는 덕희의 자신감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함께 갈지 말지 한 달을 고민했다. 좋든 싫든 30일을 함께 걷다 보면 소소하게 자신의 상황을 자신도 모르게 털어놓을 것 같아서였다. 깊숙한 장롱 속에 아무도 모르게 감추고 싶었던 자신의 치부를 꺼내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결심한 건, 덕희가 남 일에 좀처럼 간섭하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친구들이 말하는 그 이상을 묻지 않았고, 그런 덕희였기에 성미는 함께 가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성미는 대학병원 간호사로 취직했다. 내과 병동에서 수습 간호사 시절을 보낸 성미는 밤낮이 바뀌는 3교대도 힘들지 않았다. 새벽에 환자를 돌보고 링거를 교체하고, 보호자와 마주하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4년이 지난 후 수술실로 자리를 옮길 때 수간호사의 제안에 망설임 없이 "네, 갈게요" 하고 대답했다. 그렇게 성미는 수술실 간호사가 되었고, 그곳에서 처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수술실에 적응하는 초기 몇 달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기구 세팅이며 환자 준비, 수술 기록 관리 등 모든 것을 익혀야 했다. 처음 수술실 도구를 세팅할 때는 엄격한 분위기 속에서 군인처럼 바짝 긴장했던 기억이 뚜렷하다.


"간호사님 행동 하나로 수술실이 엉망이 될 수 있어요. 정신 바짝 차려야 해요. 교수님이 수술할 때 작은 거 하나 거슬리면 난리 나요!"


성미는 초긴장 상태로 몇 달을 보냈고, 결국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최고라는 걸 깨달았다. 피를 보는 일이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매일 마주하다 보니 일상이 되었다. 수술실은 적성에 맞았고, 긴장된 순간들이 오히려 성미에게는 활력으로 다가왔다. 신입에서 베테랑 간호사로 자리 잡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수술실에서 6년이 흘렀고, 실력 있다는 소문이 자자한 최 교수가 성미가 근무하는 여의도 병원으로 부임했다. 최 교수는 온화했다. 날카로운 메스를 다루는 의사임에도 성격은 부드러웠다. 싱겁게 웃는 일은 없었지만 과하게 경직되지도 않았다. 큰 키에 적당한 살집이 붙은 그는 말 그대로 우아하게 수술실을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