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성미와 최 교수

달맞이꽃 같은 사랑

by 정루시아

최 교수가 온 후로 성미는 수술실 근무가 좋았다. 능수능란한 손재주와 빠른 판단, 간결한 지시는 수술실에 안정감을 불어넣었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만족도가 높았다. 레지던트나 팰로우도 최 교수를 따랐고 매사가 매끄러웠다. 최 교수는 성미보다 7살이 많았고 부임했을 때 이미 두 아이의 아빠로 강남에서 유명 학원강사로 일하는 아내가 있었다. 최 교수가 온 몇 개월 후 성미가 작은 실수를 했다. 옛날 김교수라면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칠 일이었지만 최 교수는 조용히 성미를 과장실로 불렀다. 남겨진 성미와 팰로우, 수습간호사가 수술실을 정돈하며 한 마디씩 주고받았다.


"역시 최 교수님은 인품이 다르네. 김 교수였으면 별일도 아닌 걸로 소리소리 지르며 난리 쳤을 텐데. ‘잠시 교수 연구실로 들리세요’라니."

“그러게요. 김 교수 같았으면 저도 엄청 욕먹었을 텐데.” 팰로우도 맞장구를 쳤다.


수술실 정리를 마친 후 성미가 교수 연구실을 찾아가자, 최 교수는 드립 커피를 내리며 차분하게 말했다.


“어렵죠? 수술실이 워낙 예민한 곳이잖아요. 그런데 간호사님이 잘해 주셔서 저도 덕분에 적응이 한결 쉬웠어요. 그런데 몇 가지 바꿨으면 하는 부분이 있어서요.”


그는 A4 용지에 인쇄된 주의사항 및 건의사항을 조심스럽게 건넸다. 연구교수실에서 수술복이 아닌 흰 가운을 입은 최 교수가 커피를 내리며 말했다. 서향 창으로 비쳐든 오후 햇살이 방 안을 부드럽게 채우고 있었고, 그 햇살 속에서 최 교수의 조용한 말투는 성미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그날 이후로 수술실은 성미에게 기다림의 공간이 되었다. 최 교수의 말투, 손짓, 눈빛 하나하나가 소중했다. 그건 성미만의 감정이었고, 자신도 정확히 알 수 없는 그리움 같은 감정이었다. 좋은 원두를 사다 드리면 다른 간호사들은 '영양가 없는 짓'이라며 핀잔을 줬다. 그럴 때마다 성미는 웃으며 말했다.


“최 교수님 드리면 그분이 혼자 드세요? 가끔 우리한테도 내려 주시잖아요. 다 오고 가는 정이죠. 그분 떠나고 김 교수 같은 분 또 오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로부터 6년쯤 흘렀을까. 최 교수가 Y대 병원으로 자리를 옮긴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가 성미에게 조용히 말했다.


“Y대병원으로 옮길 예정입니다. 손발이 잘 맞는 간호사님, 함께 오실 수 없을까요?”


성미는 순간 ‘최 교수가 없는 수술실’을 떠올리며 가슴 깊은 곳에서 찬바람이 스며드는 걸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그를 따라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는 더없이 따뜻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고, 그와 함께 있으면 세상의 복잡한 것들이 단순해지는 것 같았다.


성미는 커피잔을 내려다보다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창가에 등을 지고 앉은 최 교수의 눈빛이 성미의 가슴을 환하게 비추었다. 마치 따스한 햇살처럼. 성미는 그가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힘들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교수님, 가신다니 아쉽네요. 생각은 해볼게요. 하지만 너무 기대하진 마세요.”


성미가 말을 마치고 일어서자 최 교수는 성큼 일어나 성미 옆을 지나 교수실 문고리를 잡고 서 있었다. 성미는 의자를 제자리에 밀어 넣으며 몸을 돌리다 잠시 최 교수를 바라봤다. 채 일 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였다. 성미가 “커피 잘 마셨어요. 과장님” 할 때 최 교수가 성미에게 손을 내밀었다. 왼손은 문고리를 잡고 오른손은 성미에게 악수를 청하듯 말이다. 성미는 떨리는 심정으로 최 교수 손을 잡고 최 교수를 바라봤다. 한동안 손을 잡고 있었다. 최 교수는 왼손에 잡고 있는 문고리를 열지 않았다. 둘이 얼마동안 서로의 눈을 바라봤는지 알 수 없었다. 30초였는지, 1분이었는지, 5분이었는지, 10분이었는지, 아니면 인생 전부의 시간을 담았는지!


성미는 최 교수를 따라 Y대로 이직하지 않았지만 가끔 최 교수를 만났다. 처음엔 "잘 지내시냐" 안부인사를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좋은 커피원두를 전해드려도 되겠냐" 했다. 그러다 새로 온 교수가 소릴 지르며 팰로우 말처럼 개지랄을 떤 날이면 "술 한 잔 사주실 수 없냐" 했다. 최 교수가 먼저 성미에게 연락하는 일은 없었다. 성미가 시간을 내달라면 최 교수는 바쁜 일정에도 스케줄을 조정해 시간을 냈다. 뭐 특별히 하는 것도 없는데 그를 만나면 마음이 편안했다. 그는 여전히 성미에게 위로였다. 성미는 그와 만날 약속이 잡힌 날이면 마치 살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 어느 날, 최 교수가 저녁을 사겠다며 연락을 줬다.

약속 장소에 나간 성미는 어깨가 축 늘어진 최 교수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늘 침착하고 단정한 모습만 보아왔던 그였기에, 수술실에서 무슨 사고라도 난 건 아닌지 불안감이 스쳤다. 최 교수는 어두운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정말 이직하실 마음 없으세요? 쉽지가 않네요. 집안도 시끄럽고, 어렵게 모교에 자리가 나서 왔는데... 손발도 잘 안 맞고, 여러모로 편치가 않아요. 간호사님이 오시면 좋을 것 같은데.”


성미는 마음을 다잡으며 일부러 가볍게 말했다.


“교수님이야 워낙 잘하시니까 곧 괜찮아지실 거예요. 병원마다 분위기가 다르잖아요. 그런데 얼굴이 좀 수척해지셨어요. 사모님이 잘 안 챙겨 주세요?”


감정을 눌러 담은 말이었지만, 그 순간 얼굴도 본 적 없는 최 교수의 부인이 문득 부러워졌다. ‘이렇게 훌륭한 남편을 둔 사람은 얼마나 복이 많은 걸까.’


“아닙니다. 제가 쓸데없는 말을 했네요. 병원을 옮기는 게 쉬운 일이 아니죠. 알겠습니다.”


성미가 조심스레 선을 긋자, 최 교수는 눈에 띄게 실망한 듯했다. 조용한 일식집에서 저녁을 먹은 뒤, 둘은 자리를 옮겨 가볍게 맥주 한 잔을 나누었다. 술잔을 가볍게 비운 최 교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거 아세요? 간호사님이랑 일할 때 정말 좋았어요. 마음을 읽는 것처럼 필요한 도구들이 제 손에 척 올라와 있고... 눈빛만 봐도, 손짓만 봐도 수술이 매끄럽게 진행되잖아요. 그런 호흡 맞는 사람, 정말 흔치 않거든요.”


말을 마친 최 교수는 성미를 바라보다가, 테이블 위에서 땅콩을 집으려던 성미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저... 참 좋아합니다. 그냥, 같이 있으면 마음이 너무 편해져요. 괜히 용기가 나고, 뭐든 잘될 것 같은 그런 좋은 감정이 생깁니다.”


성미는 순간 당황했다. 손을 빼야 할지, 그대로 두어야 할지 머릿속이 멍해졌다. 마신 술이 갑자기 확 올라왔다.

그 후로 성미는 최 교수와 한 달에 한 번쯤 저녁을 먹거나 맥주를 마셨다. 가끔은 한 시간쯤 드라이브를 하기도 했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최 교수와 드라이브를 하는 일은, 성미에게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서른이 갓 넘었을 무렵, 노모가 결혼 얘기를 꺼내면 성미는 단호하게 말했다.


“난 내 마음대로 살 거야. 괜히 결혼해서, 엄마처럼 살고 싶진 않아. 평생 고생하고도... 결혼하라 하고 싶어? 아버지 바람기로 그 고생하고도?”


성미가 짜증 섞인 말투로 쏘아붙이면, 어머니는 눈을 피하며 구시렁댔다.


“그래도 결혼은 해야지. 혼자 쓸쓸해서 어찌 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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