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만 피는 꽃
성미는 자유롭고 싶었다. 간호사 동료들과 철마다 등산과 스키를 즐겼고, 시간이 나면 요가나 수영을 했다. 타고나길 가늘게 태어난 데다 먹성을 부려도 살이 찌지 않아 몸매 관리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최 교수를 만나지 못하는 날이면, 하루가 심심하고 허전했다. 집에 들어서면 25평 아파트가 어쩐지 휑하게 느껴졌다. 꿈에도 최 교수가 자꾸 나왔다. 꿈속에서 성미는 해변의 파도 소리를 들으며 최 교수와 하얀 모래사장을 걷고, 야자수로 둘러싸인 방갈로 안에서 사랑을 나눴다. 신선한 바람과 햇살이 그들의 사랑을 축복하는 듯했다. 잠에서 깨고 나면 성미는 혼잣말을 했다.
“미친년… 정말 돌았구나. 꿈에서 섹스를 하다니. 이럴 바엔 아무 남자 붙잡고 진짜 놀지 그랬냐? 독신주의 좋아하네, 정말.”
병원 이직을 거절한 지 열 달쯤 지났을 때, 최 교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잘 지내시죠. 시간 되시면 오늘 저녁 뵐 수 있을까요? 연락 주세요.’
성미는 무심한 듯 답장을 보냈다.
‘네, 그럼요. 잘 지내시죠? 시간 비워 놓겠습니다.’
저녁에 만난 정갈한 한식당에서, 작은 방에 차려진 음식들은 먹음직스러웠지만 선뜻 젓가락이 가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걷어내려 성미가 웃으며 말했다.
“교수님, 별일 없으시죠? 수술실 세팅은 이제 문제없죠?”
“예, 그렇죠. 덕분에요.”
최 교수는 식탁을 가리키며 식사부터 하자고 권했다.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을 먹었다. 식사가 끝나고 차가 나왔을 때, 최 교수는 한동안 성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제가 이혼하면… 저한테 오실래요?”
성미는 차를 마시던 중 깜짝 놀라 멈칫했다. 식사 몇 번, 술 몇 잔, 드라이브 몇 번이 전부였는데… 이혼 후 자신과 함께할 생각이 있는지를 묻다니. 예상치 못한 질문에 성미는 머리가 멍해졌다.
“과장님,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성미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농담 아닙니다. 성미 씨 생각이 궁금해서요. 진지하게 생각해 주세요.”
“교수님… 그렇게 진지한 말투로 농담하시면, 저 무안해요.”
“제가 혼자 착각한 걸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농담 아닙니다. 다음에 다시 뵐 때까지 생각해 주세요.”
그날 밤, 최 교수는 조용히 성미를 아파트까지 데려다주었다. 모든 게 어리둥절했지만, 성미는 기뻤다. 유부남이지만, 그런 멋진 사람이 자신에게 진지하게 고백을 해주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른 채, 다시 마주 앉은자리에서 성미는 먼저 입을 열었다.
“교수님, 저는 평생 혼자 살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만약 결혼을 한다면, 교수님 같은 분과 살고 싶다는 생각은… 가끔 했어요. 너무 좋은 분이시니까요. 하지만 교수님은 이미 결혼하셨고, 아이들도 있잖아요. 저는…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누구에게 매여 사는 건, 아직도 무서워요.”
성미는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해진 서른아홉의 노처녀였고, 자신이 낳지도 않은 아이들을 책임진다는 것에는 두려움이 앞섰다. 최 교수가 좋았지만, 현재를 송두리째 흔들 만큼 절박하지는 않았다. 그의 고백은 진심이었지만, 성미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최 교수는 조용히 고개를 떨구고 “알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식사를 마친 후, 그는 늘 그랬듯 성미를 아파트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차에 앉아 있던 성미는 쉽게 문을 열지 못했다. 그냥 내리면, 다시는 이 사람을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망설이다 성미는 말했다.
“과장님, 저희 집에서 차 한 잔 하실래요? 저희 집엔 남자라곤 들어온 적 없지만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 교수는 성미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얼마나 오래 그 차 안에서 키스를 했는지, 성미는 시간 감각이 무너지는 걸 느꼈다. 대학 시절 사귀던 남자와 나눈 어설픈 키스가 전부였던 그녀에게, 최 교수의 성숙하고 절제된 입맞춤은 온몸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성미가 과일과 차를 내왔고, 최 교수는 아담한 그녀의 집에서 식탁에 앉아 집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성미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보드랍고 따뜻한 손을 감싸며, 눈을 맞춘 최 교수는 손가락을 천천히 맞물렸다. 성미의 모든 감각이 손끝에서 살아나는 듯했다. 저도 모르게 아랫배가 뜨거워지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차를 마신 뒤, 그는 가볍게 성미를 안아주고는 아파트를 나섰다.
그 후로 둘은 가끔 등산을 가고, 맛집을 찾아 점심을 먹었다. 같은 책을 읽고, 그 책에 대해 짧은 토론을 하기도 했다. 잘린 치즈 조각처럼 틈틈이 시간을 나눴고, 아주 드물게는 성미의 집에서 식사도 했다. 그런 날이면 최 교수는 늘 좋은 와인을 준비해 왔다. 둘은 부부처럼 와인을 마시고, 영화를 보고,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최 교수는 항상 선을 지켰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시간이 갈수록 성미는 자신이 왜 최 교수의 제안을 거절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분명, 진지하게 자신과 결혼하자고 했는데, 왜 거절했을까?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최 교수의 키스가, 손길이, 목소리가, 존재 자체가 더 깊이 그리워졌다.
지독한 하루였다. 새로 온 교수가 수술실 준비가 엉망이라며 생트집을 잡고, 레지던트와 간호사들에게 소리소리를 질렀다. 성미는 후배 간호사와 술을 마셨고, 술이 과했다. 집에 돌아오자 무심코 메시지를 보냈다.
‘교수님, 세상 살기 정말 힘드네요. 김 교수 말이에요. 형편없는 실력에 어찌 이 병원에 왔는지… 오늘 너무 끔찍했어요. 보고 싶어요.’
‘어디세요? 괜찮으세요? 제가 뭐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네요…’
‘집이에요. 지금 막 들어왔어요. 제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네요. 죄송해요.’
‘그래도 집이라니 다행이네요. 어서 푹 주무세요. 일요일 점심에 댁으로 갈게요.’
‘네, 그때 뵐 게요.’
성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래, 나도 내 편이 있구나. 내가 기대도 되는 사람이 있구나.’ 싶었다.
일요일 점심, 최 교수는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성미가 반갑게 웃으려는 순간, 그가 다가와 성미를 번쩍 들어 안고는 소파 위에 눕혔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보고 싶었어요. 나도 없는데, 그렇게 술을 과하게 마시다니…”
최 교수의 목소리는 걱정과 그리움이 섞여 있었다. 성미는 그날, 처음으로 사랑하는 남자를 온전히 그녀의 품에 안았다. 그녀는 서툴렀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만, 최 교수는 천천히 그녀를 이끌었다. 조심스럽고 정성스러웠다. 서두름 하나 없이,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서로를 바라보며, 매만지는 손끝이 따뜻하고 감미로웠다. 사랑이란 이렇게도 부드럽고 아늑한 것임을, 그날 처음 알았다.
늦은 점심을 함께 먹은 뒤, 최 교수는 담담한 표정으로 성미의 손을 잡았다.
“아무 일 없어요. 변한 건 없어요. 사랑해요. 그리고… 조금만 시간을 줘요.”
“그래요, 변한 건 없어요. 저도 사랑해요. 상관없어요. 어차피 혼자 살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니까요.”
성미는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사랑이 가득 담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그와 결혼하려고 사랑한 건 아니었다. 그가 좋았기에 사랑했고, 사랑했기에 함께한 밤이었다. 그리고, 그건 조금도 후회되지 않았다.
그날 밤, 성미는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최 교수는 유부남이며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런데 어쩌다 자신이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지, 성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숨결, 부드럽고 세심한 손길, 덥수룩한 종아리 털이 스치는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특히 그가 강약을 조절하며 성미의 몸을 일깨우던 순간들은 생생히 머릿속을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