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이혼 하세요.

딸 같은 며느리 12

by 정루시아


2001년 1월 둘째를 낳고는 모유수유 후 집근처 오피스텔에 잠시 나가 한두 시간 원단을 자르고, 옷을 만들며 패턴 공부를 하니 세상 좋았다. 그렇게 아이들과 느긋한 시간을 보내던 중 패턴 콘테스트 소식을 들었다. 제 1 회 모델리스트 콘테스트! 학생부와 일반부로 나뉘어 진행(총 4개월: 1차 패턴, 2차 패턴 및 가봉, 3차 면접시험)되는 패턴 콘테스트는 나이 제한(만 35세)이 있었다. 내가 그 당시 만 35세였으니 2001년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 신청서를 제출했다.


둘째 백일 후 학생 3명이 콘테스트를 나가겠다 패턴 개인지도(3학년 후배 세 명은 학생부, 나는 일반부 참가)를 청해 함께 공부하고 시험을 봤다. 3시간 안에 제도와 구성 패턴을 제출하는 1차 시험도, 8시간 안에 제도와 원단가봉을 제출하는 2차 시험도 참 고됐다. 시험 볼 때마다 1~2Kg은 빠진 듯했다. 마지막 면접시험에선 제자와 대기실에 앉아 마음을 떨었다. 총 4인이 콘테스트에 나갔으니 '한 명이라도 붙으면 좋겠다.' 싶었다. 늦가을, 전국에서 7명(대상 1명, 최우수상 2명, 우수상 2명, 장려상 2명) 주는 시상식에 후배 겸 제자와 함께 상을 받았다. 제자가 학생부 최우수상을, 내가 일반부 장려상을. 그때 함께 도전하여 상을 탄 제자는 유명한 모자회사의 패턴실에, 다른 한 명은 호주에서 테크니컬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으니 참 좋은 인연이다.


서울패션센터(지금은 서울패션센터가 없어지고 서울디자인재단으로 일이 통합되었다.)에서 "장려상을 받게 되었다." 연락을 주었다. 수상식의 참여여부를 묻고는 수상자 한명에 3-4명 정도 가족동반 좌석이 배정되니 몇명이 올것인지를 알려달라 했다. 너무 기뻤다. 후배가 전화를 걸어 자신이 최우수상을 타게 됐다며 감사하다 말해 기쁨은 배가 되었다. 전화를 끊고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께 콘테스트에서 일반부 장려상을 받았다 말씀드리니 시어머니 반응이 냉냉했다. 어머니는 "장려상은 꼬드바리 상 아니냐?" 했다. 순간 뭐라 대답할 수 없었다. 수상식에 함께 가자 말씀드리려던 차였는데 맘과 말이 도망갔다. 대한민국 최초 패턴 전문 콘테스트에서 가르친 제자와 함께 상을 받고, 쟁쟁한 여성복 패턴사들과 경쟁하여 장려상을 받았다는데 "꼬드바리 상" 이라니 말문이 막혔다. 그냥 "네." 하고 웃었다. 수상식엔 남편만 갔다.


저녁에 남편에게 말하니 남편은 "그러니 아버지랑 노상 싸우지, 당신이 이해해." 했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어머님은 만사 꼬여 있었다. 입에서 고운말, 감사한말, 좋은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버님과 항상 다투셨고, 손녀, 손자를 돌보러 대전에 머무르는 날이 유일한 낙이었다. 아이들이 크자, 어머님은 남편의 출장 때만 가끔 대전에 오셨다.


2008년 여름방학 때였다. 대전 집 서재에서 연구논문을 작성하는데 현관문 비번이 눌렸다. 어머님은 핏기없는 얼굴로 들어오셨다. 등에 배낭을 짊어지고 연락도 없이 오셨다. 내가 "오셨어요, 어머니? 무슨일 있으세요?" 하며 "차를 드릴까요?" 했더니 어머니는 지친 얼굴로 "속이 탄다. 시원한 물 한 잔 줘라."하셨다. 물을 마시며 어머니는 푸념을 시작했다. "네 아버지랑은 못살겠다." 하시며, 대판 싸우고 말도 없이 배낭을 둘러매고 내려오셨단다. 어머니는 풀이죽어 "내가 가방을 싸서 역에 왔는데 갈 데가 없더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갈 곳이 없어, 너희 집에 왔다. 며칠 있어도 되냐?" 했다. 나는 "그럼요. 잘 오셨어요." 했다. 내가 뭐라 말 할 수 있겠는가? 어머님은 남편과 내게 푸념을 한참 늘어놓다 이틀 지나 올라가셨다.


그렇게 2년 동안 여름방학, 겨울방학이면 어머니는 배낭을 짊어지고 불쑥불쑥 집에 오셨다. 요약하면 죽어라 교사생활하며 돈을 모아 집안을 일으키고 시아버지 요구대로 퇴직금 일부로 산을 사서 묘지자리를 만들고, 이자를 따박따박 받으며 용돈으로 쓰던 은행 예금을 논을 사자 하도 졸라 덜컥 아버님께 주었더니 시아버지 이름으로 논을 사곤 용돈을 주지 않으니 어찌 사냐는 것이었다. 자신이 평생모은 돈은 모두 아버님 이름으로 이것저것 사고 자신은 이제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내려왔지만 시아버지는 전화도 없었다. 남편이 시아버지께 전화를 하면 "잘 모셔라." 했다.


그렇게 어머니는 배낭을 짊어지고 우리집을 찾았고 남편과 나는 이삼일 화가 풀리도록 모시다 천안 기차표를 끊어드렸다. 2010년 겨울 시어머니는 또 다시 오셨다. 첫날은 편히 쉬셨다. 둘째날 저녁을 먹고 다시 어머니의 한탄을 듣는데 남편이 "엄마, 엄마가 다 해줬잖아. 아버지 원하는데로, 돈을 주지 말던가! 줬으면 그만이지. 명의를 엄마 명의로 하던지. 엄마가 그렇게 안했잖아요. 돈만주면 뭘해 명의를 챙기던지. 사글세 받는걸 엄마가 받아요. 아빠 통해서 받지 말고, 아빠 연금 달래서 생활비 쓰고요" 했다. 내가 한참 얘기를 듣다 "어머니, 이혼 하세요. 재산분할 하면 50%는 받고 아버님 연금도 수령할 수 있어요. 그냥 이혼하세요. 그리 힘들게 싸우시지 말고, 성격도 안맞고 죄다 힘들기만 한데 뭐하러 함께 살아요. 아버님 명의로 된 땅도 팔아서 작은 아파트 사세요. 요즘 좋은 아파트 많아요. 볕 잘들고 깨끗해요. 노래교실이며, 운동시설이며 뭐하나 불편한것 없이 잘 해둔곳 많아요. 부부도 선의로 돈을 그냥 주면 안되요. 경제적 독립을 지켜야죠. 어머님이 큰 실수 하신거예요. 평생 어머님이 돈을 벌고 왜 지금 손을 벌려요. 그건 아니죠. 지금 사글세 받는 건물명의를 어머님 명의로 바꾸고 어머님이 직접 받아 쓰세요. 그렇게 안하신다면 그냥 이혼하세요." 했다. 어머니는 당황했다. 며느리가 이혼하라니. "야 이 나이에 무슨 이혼이냐? 다 늙어서.." 하시며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드시는 둥 마는 둥 하시다 어머니는 천안집으로 올라 가셨다. 어머니는 다시 그렇게 배낭을 짊어지고 불쑥 오시지 않았다. 그 뒤로.

어머니는 40년 넘게 교직생활하며 힘들게 돈을 모았다. 퇴직후 이자받는 재미로 사시다 시아버지께 뭉칫돈을 덥썩 넘기고는 한 삼년 속앓이를 했다. 그뿐이랴? 퇴직 후 어머니는 춤을 배우고 싶어 했다. 시아버지와 함께 춤을 추고 흥겹게 지내고 싶었는데 시아버지는 무슨 춤이냐 했다. 어머니는 노래를 부르면 세상 즐거운데 시아버지는 노래의 노자도 부르지 않았다. 어머니는 평지도 오래걷지 못하는데 시아버지는 날 다람쥐였다. 모처럼 시어머니와 산을 가도 시아버지는 혼자 정상을 찍고는 하산하다 조금 올라온 어머니를 만나 돌아오니 각자 산행을 할 뿐이었다. 시아버지는 사람들과 만나 이것저것 사먹는 재미, 돈 쓰는 재미를 즐겼는데, 어머니는 주머니서 나가는 모든 돈이 아까웠다. 어머니가 모으면 시아버지가 톡 털어 썼다. 차를 산다. 집을 고친다. 선산을 산다. 묘역을 만든다, 시아버지는 일(그렇다고 아주 허망한 일을 하시지는 않았다.)을 만들고 어머니는 아까운 돈을 내 주었다.


경제 성향 뿐이랴! 음식 성향도 너무 달랐다. 시아버지는 칼국수를 좋아했고 면이든 빵이든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셨는데 어머니는 그 흔한 칼국수도 마다했다. 케이크를 사오면 "수입산 밀가루가 몸에 얼마나 안좋은데 케익을 먹냐!"며 포장지를 여는 손을 민망하게 했고 아침 TV에서 제공하는 몸에 좋지않다는 식재료 성분, 조리방법, 궁합이 맞지 않는 음식 등을 식탁에 앉아 줄줄이 읊었다. 참 난감했다. 온 가족은 식탁에 앉아 어머니의 해박한 지식에 귀를 닫았다.


지금 생각하니 어머니는 미치도록 삶이 재미없었던것 같다. 시부모님이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살기 시작한 연유도, 시작점도 난 잘 모른다. 결혼 후 내가 봐온 시부모님의 모습은 틀에 박힌 만화 처럼 늘상 톰과 제리 같았다. 어머님이나 시아버님이나 서로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시아버지가 생각없이 빨래비누 다섯장을 내다버린걸 어머니는 한달 내내 타박했다. 단돈 만원도 안되는 비누에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며 싸움으로 보내다니, 그런 삶을 보는 내가 다 아까웠다. 그분들의 시간이... 어머니는 그렇게 지치게 싸우시다 결국, 아버님 명의 건물을 자신 명의로 바꾸고 직접 사글세를 받아 얼굴과 맘이 폈다. 존재의 독립과 경제적 독립은 언제나 동전의 양면같은 것인지...


두 분은 교직 퇴직 후 우아하고, 여유있고, 사이좋게 지내는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머니는 너무 억울해 했고 시아버지는 사람들과 만나 생각없이 내뱉는 어머니의 말에 화를 내고 창피해 했다. 적절한 타협의 지점이 없으니 힘이 빠질때까지 두분은 싸웠다. 계산해보면 20년은 싸우며 지내신것 같다. 젊어서는 직장생활로 힘을 빼고, 아이둘 낳고는 애 키우느라 허리가 휘도록 힘을 빼고, 은퇴후는 성격이 안맞아 싸우느라 있는 힘을 다 쓰셨다. 팔십이 넘은 어머니의 인생은 육아와 병행한 고된 직장여성의 삶과 퇴직후 남편과 싸우는 삶으로 크게 구분되니 참 서글프다.


어머니 연세 팔십이 넘으니 편해졌다. 미간에 잔뜩 들어간 힘이 풀리고 벌침같던 말도 사라졌다. 라면을 끓여 먹잖다. 칼국수를 먹고 시원하게 잘 먹었다 하시며 케이크을 드시곤 맛나다 하신다. 집에서 만든 음식 아니면 믿을 수 없고, 수입 밀가루를 어떻게 먹냐던 어머니가 이제는 모두 맛나단다. 군산에 오셔 유명하단 국수집과 중식도 좋다하신다. 밥값을 아까워 하던 어머니가 비싼 음식도 좋다 하신다.


부부생활 참 힘들다.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천안집 TV에선 연일 가수들이 귀청떨어지게 노래를 부르지만 시아버지는 큰 불만이 없다. 보청기 없인 잘 들리지 않는 시아버지는 집에서만은 보청기를 끼지 않으시니 말이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시간이 있다면 최소한 내가 마주한 어머니는 지금이 최고의 시간인듯하다. 노년의 인생! 아이러니하다. 두 분이 이제라도 편안하기를 바란다. 부부의 인생! 잠시만의 황금기라도 그게 어디인가?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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