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사과잼은 누가 먹었을까?
연일 비다. 마당에 앉아 잡초 뽑은 기억이 참 멀다. 주말 집에 온 아들과 우산쓰고 정원을 걷다 "비가 매일 와 뽑을 수가 없네~. 잡초 보이지? 쟤네도 한철이니 그냥 놔둬야지." 하니 아들이 무심한듯 말을 던졌다. "엄마, 잔디는 생장점이 아래 있고, 잡초는 위에 있대요. 뽑지 말고 잔디 깎기로 자주 미세요. 그럼 잡초가 못 자란대요." 했다. 아들 눈을 몇 초간 바라봤다. "잡초 생장점은 잎에 있다고? 난 늘 뽑기만 했지 잡초 생장점은 생각도 못했구나." 했다. 아들은 생글생글 웃으며 "저도 영어 지문에서 읽은 내용이에요." 했다.
아들의 생장점은 위로 향하고 나의 생장은 아래로 향하는 듯하다. 요즘은 정말 그런 듯하다. 뻗어나가며 살아갈 궁리보다 '자꾸 되돌아봐'지는 걸 보면 말이다.
사돈이 보내준 복숭아를 먹다 몇 알 물러져 잼을 만들었다. 당직을 끝내고 피곤한 눈으로 들어온 남편에게 복숭아를 깎아주다 일을 벌렸다. 살살 만들면 되겠지. 연일 비가 오니 온 집안이 습습했다. 남편과 농담으로 "건조기서 바짝 마른 수건을 꺼내 거실에 한 두어시간 내두면 습기를 먹어 우리 둘이 돌려짜면 물이 뚝 떨어질 것 같은 날."이라 했다. 거실 습도는 80%를 넘었다. 거실 보일러를 켜고 제습기를 틀었다. 이열치열이라 했던가?
집안에 불을 지피고 설겅설겅 대충 자른 복숭아를 냄비에 넣고 한숨 끓였다. 단내가 솔솔 났다. 도깨비방망이로 숨 넘어간 복숭아를 살살 휘저으니 복숭아는 사르르 사르르 잘도 갈렸다. 정말 도깨비방망이구나!복숭아 모양이 사라지니 추억속 사과가 달려왔다. 사과를 쥐고 강판에 쓱쓱 문지르던 열살 작은 내 손과 마흔 넷 엄마의 큰 손이 복숭아 향을 타고 왔다. 설탕을 1:1 비율로 넣고 센 불로 끓이다, 중불로 끓이고, 약불로 졸이니 덥석 엄마와 만들던 사과잼 생각이 났다. 복숭아잼 만들다 웬 사과잼 생각!
장맛비에 사과가 우수수 떨어졌다. '올해 사과농사가 참 잘 됐다.' 좋아했던 엄마는 늦 장맛비에 낙과가 즐비하니 얼굴 주름이 땅을 향했다. 쓸만한 사과를 줍고 주웠다. 늦 매미소리와 엄마 한숨소리가 사과밭을 채웠다. 생채기가 나지 않는 사과를 따로 상자에 담고 여기저기 쓸린 사과를 두어 상자 담아 집에 왔다. 리어카를 끄는 엄마 등엔 땀비가 내렸다. 리어카를 밀기도, 잡기도, 설렁설렁 걷기도 하며 길을 걸었다. 마당 수도꼭지 앞 빨간 다라에 사과를 가득 넣고 휘휘 닦았다. 나뭇잎과 잔가지를 벗은 사과들은 예뻤다. 제법 먹음직한 사과들을 골라 냉장고에 넣고 작고 까치가 파먹은 붉은 사과를 양동이에 담았다. 엄마가 "사과잼을 해보자꾸나." 했다. 엄마는 잘 들지 않는 오래된 과도를 내게 건네주곤 "마루에 앉아 사과를 깎고 있을래? 엄마가 연탄 피우고 설탕 사 오마." 했다.
열 살 내 작은 손이 사과를 깎았다. 열 살 때 내손은 얼마만 했을까? 사과는 내 손을 꽉 채우고 조금 넘쳤었다. 까치 사랑을 독차지한 붉은 사과는 내 손에 차고 넘쳐 토막을 내어 깎었었다. 열 살의 내 손이 궁금하다 열 살 딸 손이 스쳐 지나갔다. 열 살 딸은 사과를 양손으로 잡곤 "엄마 사과 깎아주세요." 했다. 햇볕 좋은 늦가을 한밭수목원의 가을 나들이에서, 일요일 늦은 아침 잠옷을 엉성하게 입고서, 큰 사과를 두 손으로 가져와 밝게 웃으며 깎아달라 했다. 가스레인지 위에 보글보글 끓고 있는 복숭아 잼을 나무 수저로 살살 저으며 열 살 내 손과 열 살 딸 손에 들렸던 사과들이 떠올랐다. 자식의 인생은 미래를 향하고 부모의 인생은 추억을 향하는 듯하다.
양동이 가득 사과를 하염없이 깎았다. 엄마는 베이지 말고 살살 놀며 깎으라 칼날이 죽은 과도를 주었다. 퍼질러 앉아 한참을 깎았다. 하얀 모시적삼을 입고 마실 다녀오던 할아버지가 "넌 뭐하냐?" 물어, "할아버지, 엄마가 사과잼 만든데요. 엄만 설탕 사러 가셨어요." 말씀드리니, "그래? 사과잼?" 하시며 할아버지 눈이 환해 졌었다. 설탕을 사러 갈 때 엄마는 솜사탕처럼 밝고 환했다. 하루 종일 한숨을 쉬던 모습은 오간데 없이 사과잼을 상상하며 엄마 마음은 이미 달콤해져 있었다.
사과를 깎고 있으니 엄마가 커다란 설탕 봉지 두 개를 가슴에 품고 오셨다. 5킬로 설탕 두 봉지를 보자 입에 침이 고였다. 엄마랑 앉아 강판에 사과를 갈았다. "손 조심해, 잘못하면 손 다친다. 알았지?" 엄마는 쓱싹쓱싹 참 잘도 갈았고, 난 열심히 해도 더뎠다. 마당에 나온 연탄난로는 열기를 내뿜었다. 여름엔 석유곤로를 사용했지만 한참 불을 써야 하니 연탄난로만 한 게 없었으리라. 갈색으로 변한 사과를 큰 알루미늄 솥에 넣고 설탕과 섞어 끓이고 또 끓였다. 내 팔뚝보다 긴 나무 주걱으로 살살 저었다. 땀이 흘렀다. 엄마는 "잘하네~. 그래도 조심해야 돼. 폭폭 끓으면 그만 젓고, 엄마가 해야 돼." 했다. "왜요? 그냥 내가 해도 되는데요." 하니 엄마는 "안돼, 사과잼이 끓으면 튀거든, 데어. 큰일 나!" 했다.
한참을 저었다. 엄마는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들며 가끔 사과잼이 어찌되나 와서는 잼을 찍어 내게 맛을 보여줬다. 사과향은 났지만 밍밍했다. "조금만 더 하고 있어, 저녁 금방 되니, 그다음은 엄마가 할게. 위험해서 너는 못해!" 했다. 저녁을 먹고 배를 깔고 텔레비전을 볼 때 단 사과향이 폴폴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사과잼을 끝냈지 싶다. 온 마당이 사과향과 단내로 진동했다.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사과잼이 어찌 되나 한 마디씩 하고 가셨다.
아침! 눈 뜨자마자 마당에 갔다. 불꺼진 연탄위에 솥이 새초롬하게 사과 단내를 풍기며 앉아 있었다. 뚜껑을 여니 사과잼에 윤기가 반드르르 했다. 처음 보는 사과잼이었다. 한가득 넘실대던 사과즙이 바짝 졸여져 반짝반짝했다. 손가락으로 찍어 맛본 사과잼은 정말 맛났다. 그날 엄마는 시장에 나가 긴 옥수수 식빵을 사 왔다. 사과잼을 듬뿍 발라 빵을 먹었다. 빵을 먹는 것인지, 사과잼을 먹는 것인지 모르게 넉넉히 발라 먹었다. 참 맛있었다.
복숭아 잼이 보글보글 끓었다. 단내가 온 집안에 가득 찼다. 엄마와 만들던 사과잼 추억이 붉은 25개 연탄 구멍 눈 처럼 살아났다. "사과잼이 펄펄 끓어서 튀면 다쳐." 하던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당뇨로 고생하는 엄마지만 복숭아 잼 한통 들고 가야겠다.
가스레인지다, 전기쿡탑이다 하는 세상이다. 도깨비 방망이면 뭐든 다 갈리는 세상이다. 센 불로 끓이다, 중불로 끓이고, 약불로 조리려면 버튼만 누르고 다이얼만 돌리면 되는 편한 세상이다. 25개 눈 구멍을 가진 연탄불로 센 불, 중불, 약불을 조절하며 잼을 만들긴 어려울 때였다. 고된 삶이었던 엄마, 장맛비에 떨어진 낙과를 보고 종일 한숨을 쉬던 엄마가 사과잼을 만들며 그리 천진한 미소를 지은 날을 잊을 수 없다. 선물로 받은 복숭아 몇 알을 졸이며 미래로 향하지 못하고 자꾸 과거로 달리는 생각을 본다. 오십 중반인 나의 생각 달리기가 구십을 바라보는 엄마의 생각 달리기를 따라가지 못하리라. 식어가는 복숭아잼을 바라보며 엄마와 만들었던 사과잼을 추억해본다.
추신: 그 많던 사과잼은 누가 먹었을까? 할아버지, 할머니와 큰집 여섯식구와 가까운 동네분들과 나눠 먹었답니다. 앞집의 오빠가 지금 큰 형부이니 달콤함을 나누다 가족사랑을 나누는 사돈지간이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