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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평 Mar 18. 2020

비범한 살인자의 탄생

장대호의 옥중서신을 읽고

한강에서 몸통이 떠올랐다

좌우 위아래로 흩어진 대한민국 국민이 대동단결하는 일은 흔치 않다.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범죄다. 그것도 강력범죄. 종종 극악무도한 사건이 세상에 드러날 때면 국민은 누리꾼이라는 이름으로 댓글창에 모여 ‘사형 부활’을 제창한다. 구형이 되거나 판결이 난 날이면 속칭 ‘검새와 판새’를 향한 비난 여론이 쏟아진다. ‘이래서 떡검은 안된다, 그 피해자가 네 자식이었어도 그런 판결을 냈을 거냐’와 같은 식이다. 그 여론에 어깃장을 내게 만든 당사자가 있다. 그 이름 장대호. 한강 몸통 시신 사건의 피고인이다.


2019년 8월 12일 오전 9시가 조금 지난 시각, 고양시 한강 마곡철교 부근에서 남성의 몸통으로 추정되는 시신이 발견되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약 3km 떨어진 한강에서 팔과 머리 부분이 각각 발견되었다. 한강사업본부 직원의 신고로 세상에 드러난 이 사건은, 자수하러 간 피의자를 사건 담당 형사가 없다는 이유로 인근 경찰서로 돌려보낸 경찰청 민원실 직원의 부실 대응으로 또 한 번 논란이 되었다. 덕분에 경찰청은 해당 경찰관을 징계했고 당직 시스템을 바꾸는 등 사건 외의 뒤처리를 하느라 몇 차례 골머리를 앓았다.


그보다도, 가장 괄목할만한 점은 재판 등 일련의 수사 및 선고 과정에서 드러난 피의자의 태도였다. 피의자 장 씨는 사형을 구형받았음에도 재판에서 모든 혐의를 인정했다. 또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살해한 게 아니므로 유족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지 않고, 사형을 당해도 괜찮다"는 발언을 하는 등 제 나름의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피해자가 반말을 하며 시비를 걸고 숙박비 4만 원을 주지 않아서'라는 이 일상적 사연을 그 심대한 살인의 동기로 가히 제시할 정도의 인물이라면 그 떳떳한 태도는 놀랍지도 않다.


"나는 2005년부터 숙박업에 종사하였다."

우리는 주로 뉴스와 신문기사, 영화, 각종 탐사보도 프로그램에서 범죄자의 면면을 살필 수 있다. 기자의 눈과 앵커의 입, 배우의 동작, 형사의 말을 통해 범인이 살인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저질렀는지를 안다. 이것이 장대호의 옥중서신이 센세이션했던 이유이다. 살인자의 눈과 행동, 말이 독자 개인에 직접 전달되었다. 우리는 장 씨의 글에서 (그 자신의 주장에 따른) 그 사람의 행적과 의도를 알 수 있다.


2019년 12월 4일~5일, 이틀에 걸쳐 쓰였다는 장 씨의 회고록은 정갈한 글씨체로 수정한 부분 하나 없이 막힘없이 서술되어있다. 오른쪽 상단에 꼼꼼히 페이지 번호까지 달았고, 당시의 상황을 영상으로 찍어 기억하는 것처럼 큰 따옴표 안에 실제 대화를 기록했다. 특히 '~같다'보다는 '했다' 식의 단호한 어투를 선택하였고, 자신은 '나'로 피해자는 '놈'으로 일관된 호칭을 사용했다. 그러면서도 잘 떠오르지 않지 않는 기억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나름의 솔직한 화법을 선택했다. 이런 서술 형식은 독자로 하여금 그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믿게 한다. 일부 독자들이 장 씨의 글에 설득되는 첫 번째 지점이다.


대화 사이 그리고 행동 사이마다 스스로가 느낀 감정을 "그 순간 나는 몹시 당황하고 흥분하여", "아뿔싸!"와 같이 정확하고 생생하게 표현한다. "아침의 고요한 정적이, 3F에서 문 잠그는 소리까지 1F 카운터로 전달해주었던 것이다."와 같은 비유적 서술은 극도의 긴장감을 조성한다. 특히 살해와 사체 훼손의 묘사는 아주 구체적이어서 마치 가상현실 체험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에 대중은 "재밌는 스릴러 소설 한 권 읽은 듯한 느낌", "그냥 결국 화나서 죽인 건데.. 이 사람 글 왜케 잘 쓰죠? 무슨 추리소설 읽는 줄.. 이렇게 긴 글 흥미롭게 보게 하는 것도 보통은 아니네요." 등의 댓글로 화답한다. 이처럼 비현실적 실재를 생생하게 만드는 필력은 일부 독자들로 하여금 장 씨의 글에 매력을 느끼게 만드는 두 번째 지점이다.


나는 범죄심리학자나 프로파일러가 아니므로 이 한 뭉티기의 글을 가지고 그 살인행위의 동기를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 다만, 사람들의 반응이 참 재미있는 것이다. 인간은 종종 도덕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에서 통쾌한 감정을 느낀다. 이런 글은 흔하다. "장대호 회고록 읽고 뭔가 마음속에 통쾌함이 있는데 정상인가요?" 이런 댓글도 흔하다. "현대사회가 종교 때문인지 세계적으로 높아진 인권 때문인지 사람을 죽이는 것에 앞뒤 보지 않고 너무 과도하게 금기시되고 절대적으로 어긋난 개념으로 박혀있습니다. 님이 느끼신 것처럼 공격을 받은 생명체가 맞받아 공격하는 것은 세상 자연스러운 이치인데 말이죠." 장 씨 스스로가 활동했던 커뮤니티이자 그 사람의 추종자들이 집약해있는 일베에는 들어가지도 않았다. 디젤매니아라는 커뮤니티에서 찾아본 흔한 베댓이다. 이것이 장 씨의 글에 힘과 당위성을 실어주는 마지막 세 번째 지점이다.


범죄란 무엇인가?

장대호와 그 추종자들의 행태를 관전하고 있자니 범죄사회학을 공부하며 항상 마음에 품었던 질문이 떠올랐다. 어쩌면 가장 근본적일 질문, '범죄란 무엇인가'였다. 이는 어떠한 행위를 범죄로 규정할 것인지, 무엇이 범죄를 규정할 수 있는지, 범죄를 정하는 법은 왜 지켜야 하는지 등에 대한 하위 질문을 동반하는 물음이다. (물론 이와 같은 질문에 혹자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법학과 같은 규범학의 과제이지 사회학과 같이 가치중립을 전제로 한 경험 과학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기존의 사회규범을 주어진 것으로서 수용하기만 한다면 본질 중심의 학문 발전이란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회학에서는 흔히 탐구하지 않는 실제 형사 사례와 형법을 들여다보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던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앞서 언급한 기타 하위 질문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무엇을 법률에 의해 정해진 행위로써 형벌을 받게 되는 행위(범죄)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매우 복잡하다. 각 사회와 시대의 콘센서스(Consensus, 사회 구성원의 이해·합의)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검사내전」의 저자 김웅은 다양한 해석을 내놓는다. 첫 번째는 공리주의적 해석이다. 공동체 전체의 효용을 떨어뜨릴 수 있는 행위가 범죄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존 스튜어트 밀의 해악 원리다. 타인에게 해악을 주는 행위는 범죄이고 그렇지 않은 행위는 모두 합법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을 수정한 것이 공격 원칙인데, 이는 타인에게 해악을 미칠 뿐만 아니라 그 행위로 타인을 분노케 하면 그것은 죄로 분류해야 한다고 보았다. 세 번째는 법 도덕주의다. 부도덕과 부정의 정도가 심한 것을 범죄로 분류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다소 부도덕하더라도 범죄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이 세 번째 해석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데 가장 적절한 설명이다. 법 도덕주의의 바탕에는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국가의 간섭을 거부할 수 있는 기본적 자유가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악행이라도 그 기본적 자유에 해당한다면 처벌할 수가 없다. 그러나 기본적 자유에는 타인에 존엄성을 해치는 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물론 회고록에서 장 씨는 "나의 행위는 원고가 내게 저지른 잘못에 비할 때, 크게 지나친 것이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아준 것뿐"이라는 이어지는 말은 옳지 않다. 혹여 장 씨가 피해자에게 받은 정신적 피해가 마치 죽음과도 같았다고 한들 그것은 결코 죽음이 아니다. 장 씨는 또한 본인이 목숨을 빼앗은 피해자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사과하고 반성을 하는 것은 선후의 문제다. 나는 아직 원고로부터 어떠한 사과도 받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옳다, 장 씨는 피해자로부터 사과를 받았어야 했다. 그를 '죽일 것이 아니라' 사과를 받았어야 했다는 말이다.


당신도 소중하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말한다. "진정 용서하고 망각하는 유일한 방법은 응징 혹은 정당한 징벌을 가하는 것이다. 죄인이 적절하게 징벌되고 나서야 나는 앞으로 움직일 수 있고, 그 모든 일과 작별할 수 있다." 자칫하면 장 씨의 범죄를 합리화하는 말로 쓰일까 싶어 두렵다. 하지만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다른 데 있다. 누군가의 존엄성이 짓밟혔을 때 짓밟은 자로 하여금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물게 함으로써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개인의 존엄성은 무시와 분노, 안타까움과 같은 '감성의 소재'가 아닌 냉철하고 엄중하게 다뤄져야 하는 '두려운 것이고 원시적인 것'이라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당신이 장대호를 '시대를 잘못 만난 영웅호걸'로 표현한다면, 그 앞에서 인간의 존엄은 보잘것없는 하등의 가치가 될 수밖에 없다. 혹시라도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이 있다면 이해하지 말고 외우자 - 나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먹고살 수 없다.



* 씨의 글을 보고 싶다면 구글에 [장대호 회고록]이라는 키워드로 검색  쉽게 찾을  있습니다. 글에 '' 사람의 글을 덧대고 싶지 않아 링크를 생략한 점을 너그러이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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