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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녕그것은 Apr 04. 2019

밀카나는 '밤편지'다

[체코의 프레시 치즈] - "MILKANA" 



 새로운 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우리 회사에 3명의 인턴이 들어왔다. 셋 다 일자로 가지런히 내린 앞머리와 검은색 롱 패딩을 교복처럼 입고 다녀 한동안은 셋을 구별해내는 것이 꽤나 어려웠다. 셋은 꼭 쌍둥이처럼 함께 다니곤 했는데 그중 둘은 개인적 사정이 생겨 한 달 후 퇴사하게 되었다. 자연스레 혼자 남게 된 친구가 준하 씨다. 혼자가 된 준하 씨가 신경 쓰였다. 입사동기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졌으니 마음이 많이 흔들리지 않을까? 일이 너무 몰려 힘들다고 도망가진 않을까? 그렇지만 우려와는 다르게 준하 씨는 "조금 놀라긴 했지만 뭐 괜찮아요!"라고 유쾌하게 말했다. 밤샘 작업과 회의들도 지친 기색 없이 해내고 맥주를 좋아하시는 대표님과 때로는 술친구가 되어주기도 하며 지루할법한 어른들의 이야기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경청하곤 했다. 

 그 당시 준하 씨가 속한 팀이 가장 바쁜 스케줄을 쳐내고 우리 팀과 경쟁 PT까지 함께하던 상황이라 연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마음 한켠에 준하 씨가 염려되긴 했지만 나의 야근도 잦아진 터라 우리 모두 스스로를 챙기기에 정신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지 못하게 광고주 피드백이 빨리 도착했다. 우리 팀은 '갈 수 있을 때 가야 된다'며 쏜살같이 퇴근시간 자리를 떴다. 1층에 내려오니 그제야 두고 온 우산이 생각났다. 다시 회사로 올라갔는데 탕비실에서 나오는 준하 씨와 마주쳤다. 처음엔 눈치채지 못했는데 어딘가 안 좋아 보였다.


 "준하 씨.. 근데.. 울었어요?!"


라고 하자마자 준하 씨는 얼굴을 감싸고 다시 탕비실로 뛰어들어갔다.


 '울었어요' 라니.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구리다. 겨우 마음을 추스른 사람에게 '괜찮아?'라는 말은 마치 부풀대로 부풀어 오른 풍선을 바늘로 톡 하고 건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게 내가 또 준하 씨를 울린 것이다.

 준하 씨는 선배에게 살짝 혼난 듯했다. 그렇지만 혼나서 서러운 것보다 지금 당장 자신이 업무를 이해하지 못한 게 답답하고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게 속상하다고 했다. 그리고 눈 앞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했다. 

 

 준하 씨는 아무리 늦게 가도 지각하는 법이 없었다. 새벽 3시에 가도, 4시에 가도 항상 아침 9시에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피곤하지 않아요?"라고 물어보면 "저 체력 되게 좋아요!"라며 명랑하게 대답하곤 했었다. 근데 사실 자긴 굉장히 잠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 잠깐 책상에서 졸다 깼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는 것이다.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밀려왔다. 그렇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체력적으로나 업무적으로나 선배들의 템포를 하루아침에 맞추는 것은 쉽게 되는 일이 아닐 테니 자기 속도를 유지하면서 일해야 한다'라는 정도였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집으로 가는 길 한참을 생각해봤다. 속상함과 답답함. 너무 하고 싶던 일이지만 체력적인 한계가 오고 내 생활을 돌아봤을 때는 나도 사라지고 업무만 계속해서 쌓여갈 때. '내가 정말 잘 살고 있나'라는 의문이 동시에 들 때 덮쳐오는 괴리감. 나아가 가슴이 텅 빈 느낌은 뒤죽박죽, 시끄럽던 지구 한가운데서 모든 것이 멈추고 일순간 진공상태가 되는 것과 같은 신기한 경험이다. 


 우리는 모든 순간을 처음 살아가고 있다. 나도 그렇고 옆에 계신 10년 차의 차장님도, 준하 씨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대학교에서 회사는 다르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우리는 매년 한 단계씩 올라가는 연습을 했다. 그러나 사회생활이 시작됨과 동시에 다음 계단은 없다. 온통 바위와 돌로 가득한 오르막을 스스로 올라가야 하는 당혹감뿐이다. 나는 두발로 우뚝 선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네발로 기어 올라가야 하는 아기가 된 것 같다고나 해야 할까.







 처음 보는 오르막 앞에 선 준하 씨에게 명확한 솔루션보다는 '그냥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

나는 그녀에게 밀카나를 건넨다. 밀카나는 나만 알고 싶은, 그렇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알았으면 하는 그런 치즈다. 한팩에 딱 여덟 조각이 들어있는데 나는 이 여덟 조각 중 한조각도 허투루 먹지 않는다. 온전히 밀카나의 부드러운 풍미를 느끼기 위해 맥주나 와인을 곁들이지 않는다. 티브이나 책을 보지 않는다. 그저 집중하고 감탄할 뿐이다. 나는 아직 체코를 가보지 못했지만 입속에 퍼지는 밀카나와 함께 체코를 상상한다. 체코는 낭만의 도시라고 하던데 입속에 프라하와 체스키가 가득하다.





 '밤 편지'는 2017년 발매된 노래다. 아이유는 이 노래를 불면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보내는 이야기라고 했다. 동시에 자신이 잠들지 못하는 고통을 겪어보니 누군가 잘 자길 빌어주는 마음이 비로소 사랑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나에겐 밀카나가 '밤 편지'다. 소중하고 아끼는 마음. 더 나아가 그 이의 하는 일 모두 잘 됐으면 하는 사랑의 마음. 넘치는 이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편지를 보내듯 밀카나를 그녀에게 건넨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준하 씨는 오늘도 바삐 움직인다. 그 안에서 우리는 다정한 눈인사를 주고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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