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령풍문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녕그것은 Aug 11. 2019

쓰디쓴 그 이름 콤플렉스

[1Q84 출간 10주년] 당신의 리틀피플은?





 약 2주 동안 출퇴근길을 함께했던 책이 있다. 올해로 출간 10주년을 맞았다고 하는데 나는 이제서야 읽어보게 됐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시리즈다. 1Q84는 두 개의 달이 떠있어 그곳이 비로소 1984년의 현실 세계와는 구별되는 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세상이다. 주인공 아오마메, 덴고의 이야기는 각 장마다 교차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하루키의 다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이게 정말 판타지인지 실제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촘촘했다. 평소 나는 판타지에 쉽게 몰입하지 못하지만 꼭 내 주변에 있을 것만 같은 아오마메와 덴고의 현실성 있는 캐릭터들이 집중력을 더하는데 한몫했던 것 같다. 


 이 중에서도 단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리틀 피플과 공기 번데기다. 리틀 피플은 소설 속 인물들을 제거해버리기도 하고 경고를 보내는 등 그들만의 절대적인 힘을 보여주며 주인공들과 끊임없이 대립하는 존재다. 리틀 피플은 애벌레가 번데기를 만드는 것처럼 둥지처럼 엮어진 공기 번데기라는 것을 만든다. 리틀 피플이 만드는 공기 번데기 속에는 개개인의 '도터'가 존재한다. 나는 자연스레 '마더'가 되는 것이다. 마더가 있어야 도터가 존재하게 되지만 이들은 서로의 존재 이유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책에서 '도터'는 '마더'의 '마음의 그림자' '의식의 밑바닥에서 끌어낸 것'이라고 표현된다.  도터는 마더의 외면하고 싶은 어두운 부분, 트라우마, 혹은 콤플렉스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콤플렉스는 쓰다. 그것이 나의 행동이나 결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 유전자나 어린 시절 나도 모르게 고착화된 경우는 더더욱.









 인생 경험 36개월 차에 나는 사랑을 나누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동생이 생긴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된 해에는 막내동생까지 태어났다. 11년을 살았지만 아직 어려운 일이었나 보다. 초등학교 4학년인 나는 동생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엉엉 울음을 터트렸던 것이 아직 기억난다. 첫째라 주어지는 특권을 누림과 동시에 장녀, 큰언니, 첫째, 믿음, 책임이라는 굵직한 단어들이 날 따라다닌 건 그때부터였다. 생각해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짊어지려고 꽤나 애썼던 것 같다. 믿음에 보답하는 것. 내가 있는 자리에 책임을 다하는 것. 받은 사랑을 쏟아주는 것. 


 의젓한 아이에게는 저도 모르는 고독함이 잦다. 그래서 청소년기 때는 엄마와의 주된 갈등이 거의 친구에서 비롯된 문제들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집에서 주어진 나의 자리를 외면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때 만들어진 내 성격이 어디서나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대하는 지금의 모습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면 그 또한 고마운 일이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오면 나의 도터는 첫째 콤플렉스. 성인이 된 지금, 나의 상상에는 언제나 테두리가 명확하다. 누구도 나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데 마치 줄에 묶여있는 낙타처럼 내가 나를 잘 벗어나지 못한다. 평면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는 알고 보면 각자의 입체성이 있듯이 나도 자유로워 보이는 겉모습 속 지독하게 현실적인 부분이 숨겨져있다. 




 1Q84의 주인공 아오마메는 자신을 위협하는 리틀피플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들과 끝까지 대립하고 하늘에 뜬 두 개의 달을 보며 세계를 끊임없이 의심한다. 아오마메는 리틀피플을 극복하는 대신 그들에게 정면으로 맞서며 1Q84의 세계를 현실 세계로 승화시켰다. 


 막내동생은 올해 열아홉 살 고삼이다. 언제까지나 아기일것 같던 막내도 내년이면 대학을 간다고 들떠한다. 요즘은 방학이라 입시 미술 학원을 다니기 위해 우리 집에서 머무르고 있다. 나는 평일엔 집에서 밥을 잘 먹지 않는데 막내는 매 끼니가 그 하루를 좌우하는 중요한 사안이다. 그래서 요즘 내 일과는 출근하기 전 전기밥솥에 예약 취사를 걸어두고 퇴근하고서는 보리 차를 끓이고, 동생이 좋아하는 우유를 사두거나 간단한 반찬, 찌개라도 만들어 두는 것이다. 조용히 퇴근 후 휴식을 즐기던 시간들이 둘째와 막내의 목소리로 새벽까지 시끌벅적하다.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웃는 동생들을 보면 때로는 황당해서, 때로는 그 모습이 더 우스워서 나도 모르게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이들의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선에서 가장 적당한 사진인듯




 내가 아오마메처럼 도터에 '대립'할 수 있을까?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고민들이 대립과 갈등으로 엮여있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새벽이 온 줄 도 모른 채 이제는 내 침대로 넘어와 재잘대는 동생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