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이 강하다.

《마음사전》을 읽고

by 정요한

인생이 게임이고 하루하루가 하나의 스테이지라면, 나는 나에게 주어지는 퀘스트를 빨리 끝내려는 습성이 있다. 어릴 적 메이플스토리 시절부터 익숙해진 이 세계관은 생각보다 심오하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하나, 사냥을 하고 '죽여야' 내 경험치가 쌓인다는 것. 둘, 퀘스트가 '주어지고' 나는 그걸 해내는 포지션이라는 것. 셋, 성장은 직선적이며 멈춰선 안 된다는 것.


이러한 메커니즘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게임하듯 인생을 풀어가게 하며, 생존이라는 목적으로 시간을 소모하는 데에는 유익한 면모를 보인다. 생존을 전제로 한 게임 앞에서 캐릭터는 '반응적' 자세를 갖추게 된다. Reactive. 수동적이라는 말과 같다. 이러한 자에게 발생하는 모든 이벤트는 꼭 고난의 냄새를 풍기진 않을지라도 '겪고' '지나가야' 한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반면에 생존의 굴레를 초월해 누비는 게임에 다다른 자들이 있다. 이들은 또 다른 재미를 느끼며 살아가는데, 보다 자유로운 모습을 띤다. 남들이 다 하고 다니는 퀘스트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들의 동기는 호기심이며 그들의 시간은 느린 것처럼 보인다. 때가 될 때마다 찾아오는 퀘스트를 거부하는 건 아니지만 반응적이지 않다. 스스로의 퀘스트를 알아서 정하는 개념에 가깝다. Proactive. 나는 아직 거기 다다르지 못했다.


내가 메이플스토리를 너무 열심히 했던 걸까. 해봤자 3차 전직이었던 것 같은데. 해볼 만큼 해보거나 끝을 보지 못해 아쉬운 마음에 여전히 그 세계관과 작동방식에 머물고 있는 걸까. 나는 왜 여전히 퀘스트를 기다리게 되는 걸까. 왜 한 스테이지 한 스테이지를 이렇게나 서둘러 통과하려고만 악을 쓰고 있을까.




어릴 적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자. 끝내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다 커버린 이들도 있지만 보통 어린 시절 세 발 자전거를 넘어 두 발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된다. 보통 다 하는 거니 자전거를 탈 수 있다는 게 그다지 자랑거리가 되지 않지만 못 타서 나쁠 건 없다. 두 발 자전거를 탈 수 있을랑 말랑 한 그 몇 시간. 그때부터 우리는 속도와 방향 컨트롤 간의 관계를 감각적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속도가 느릴 때 오히려 컨트롤이 어렵다는 걸 우린 무의식적으로 아는 것 같다. 속도가 느린 그 순간에 혹여나 넘어질까 두려워 일종의 도움닫기를 쓰며 출발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자전거가 굴러가기 시작하고 속도가 붙을수록 자연스럽게 안정된다. 그때부터는 그저 타면 된다.


차를 타고 가는 것보단 느리니 자전거 라이딩으로 풍경을 누리는 이들도 많이 있다. 속도에 따라 보이는 게 다른 법이다. 자전거가 주는 낭만이 있다. 그치만 페달링을 시작하는 그 느림. 그 위태로운 느림이 너무 뜨겁게 각인된 건 아닐까. 느려서 오히려 균형이 안 잡히는 것 같고, 느려서 픽하고 쓰러질 것만 같은 그 느낌. 인생이란 게 늘 라이딩은 아님에도 너무 빨리 속도를 높이려고 하는 건 아닌지. 감정도, 깨달음도, 아픔도, 긴장도 — 빨리 통과하면 그만이라는 듯.


《마음사전》을 읽으며 느낀 것은, 어떻게 이 미묘한 뉘앙스 차이들을 이렇게나 많이, 이렇게나 깊이 발견하고 정리해 두었을까?라는 경이로움이다. 좋은 책을 많이 읽어왔다고 나름 자부해 왔지만 이러한 '미쳤네'라는 느낌을 주는 책은 처음이다. 새롭다. 찰나의 가치를 깨닫는 것만 같다. 칠백 가지가 넘는 마음의 낱말들을 모아서 수첩에 적었다고 한다. 미세한 차이를 지닌 낱말들까지 옆에 다 적어두자니 천 가지는 훌쩍 넘는 듯했다 한다.


깊이를 더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에 대한 깊이. 나는 늘 너무 빨리 지나쳐왔던 것 같다. 감정이든 깨달음이든 고통이든, 충분히 머물지 않고 통과하는 데 급급했다. 저자는 퀘스트를 깨듯 마음사전을 만들어 간 것 같지 않다. 그저 바라보다 보니, 그저 궁금해하다 보니, 그저 그 미묘한 차이 사이를 누비다 보니 이런 흔적 모음을 남기게 된 게 아닐까. 김소연 그녀가 쫓기며 달리는 그림은 잘 그려지지 않는다. 공책을 손에 들고 호기심과 사랑의 기억들을 머금은 채 마음을 탐험했을 것 같다. 수적천석(水滴穿石). 깊어짐에는 늘 시간이 따르는 법이다.




자동차 박물관에 간 적이 있었다.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100개 이상 차를 모아둔 입이 떡 벌어지는 그런 곳이었다. 옛날 미국 영화에서만 보던 테일핀 클래식카부터 시작해 아메리칸 머슬카들, 포르쉐, 도로에선 한 번도 못 본 벤츠들까지. 자동차만 보러 다녀도 시간이 부족했지만 그 안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또 다른 게 있었다. 자동차 관련 유명 엔지니어나 유명 회사 경영자들의 어록을 쫙 적어둔 벽면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마리오 안드레티(Mario Andretti)라는 '세기의 자동차 경주 선수'의 말이 인상 깊었다.



"If everything seems under control,
you're just not going fast enough."

만약 모든 게 안정적이다 느껴진다면, 그건 당신이 속도를 덜 내고 있어서 그런 거요 라는 말씀이다.


속도를 위해 살아온 그가 할 법한 말이다. 하지만 《마음사전》을 읽고 나니 좀 다르게 읽힌다.


If everything seems under control, you're going too fast.


때론, 위태위태할 때, 균형을 잡으려 애쓰며 다급히 핸들을 이리저리 돌려볼 때만 느껴지는 게 있는 것 같다. 불안하지 않으려고 속도를 더 더 내는 습관에 브레이크를 걸어보려 한다. 불일치는 긴장 상태를 유발한다. 하지만 마음사전의 저자가 그랬듯, 미묘함을 캐치하려면 반드시 속도를 줄여야 한다.


순간을 포착해 내는 강력함은 느림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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