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처럼아니 사실 거의 필수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여행은 갑자기 가기로 결정하는 것이 맞긴 하다. 어딜 어떻게 가야지논의하고 찾아보다 보면이런저런 이유가 생기고결국엔 못 가게된경험이 한두 번씩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나름 여행마니아로써 예전에 혼자서스페인 산티아고순례길까지 다녀오셨지만 아버지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실제로는 다른 많은 아버지들처럼 그냥 돈 쓰는 것을원하지 않기 때문이셨겠지만 아무튼 여행 경험이 거의 없으셨다.
그러던 아버지께서 칠순이 가까워지시자 드디어 여행을 한번 가보는 것도 괜찮겠다고 하시기 시작했다.두 분 다 은퇴하시고 슬슬 적적해지시는 타이밍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심사숙고 끝에 가장 먼저 보내드린 건 캐나다 로키산맥 패키지여행이었는데 여러모로 고생은 하셨지만 의외로 굉장히 즐거워하셨다.
어머니가 폰카로 찍으신 캐나다 로키산맥 에메랄드빛 호수
패키지여행 특성상 버스 타고 몇 시간 이동하다가 잠깐 구경하고 또 오랫동안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굉장히 고된 일정인데괜찮았다고 하실 줄은 몰랐다.아무튼 의외로 매우 만족하시니 뿌듯하긴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두 분 다 연세가 있으시니 누가 좀 주변에서 챙겨주면 좋겠지만 냉혹한 각자생존의 패키지세계에서 그렇게 달달한 걸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내가 마침 휴가도 쌓이고 시간이 좀 되는 김에 부모님을 모시고 가까운 일본이라도 다녀오려고 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갈 거면 가는 김에 좀 멀리 가자고 유럽을 가면 어떻겠냐고 하시길래 당연히 나는 농담으로 생각하고 그럴 거면 아싸리 뉴욕까지 가시죠 하고 우스갯소리로 말씀드린 것에 아버지가 뉴욕 좋지 콜을 외치신 것이다.어머니는 신이 나서 춤을 추셨다.물론 실제로 춤을 추신건 아니고 춤을 추는 이모티콘을 전송하셨다.
비행기표가격만 거의 천만 원에 가깝게 들 수 있다고 호텔도 그렇고 모든 것이 너무 과하게 비싸다고 으름장을 놔봤지만 가진 게 돈밖에 없다고 하실 줄은 몰랐다.
평생을 안 쓰고 사셨으니 돈이 있긴 하시지만 갑자기 플랙스를 외치시더니 바로 그날부터 두 분은 동네도서관에 가셔서 뉴욕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하셨다. 여행은 역시 실제 가는 것보다 가기 전이 더 설레는 맛이 있긴 하다.
뉴욕은 이미 다녀온 적이 있긴 한데 파리에서 갈 때는 그나마 가까운 편이라 괜찮았지만 서울에서 갈 때는 장거리 비행의 끝판왕이라고 볼수있는 거리다 보니 수십 번의 장거리 비행에 지친 나는 이제 솔직히 두렵고 무서웠다. 하지만 부모님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셨다.
이미 다녀오신 캐나다 로키산맥도 꽤나 장거리였지만 견딜만했다고 하시는 것이 굉장히 의외였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해외구경도 하시면 좋을 것 같았다.
하와이안항공Hawaiian Airline
하와이경유 인천-뉴욕 왕복
인당 170만원?!
믿을 수 없는 가격이었다. 코로나시국이 끝난 지 얼마 안 된시기였고 항공권가격이 천정부지로 높은 시기여서 일본가기도 살짝 부담스러울 정도였기 때문이다.
직항을 선호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무조건 경유를 선택하는 편이다 전체 비행시간은 길어지지만 그래도 중간에 쉬어가는 것이 좀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다. 물론 비용도 아낄 수 있어서 더 괜찮은 숙소도 얻을 수 있다. 부모님도 직항보다는 경유가 나을 것 같다고 하셨다.
그리고 하와이경유라서 하와이도 살짝 찍먹할 수 있는 데다가 심지어 귀국 편에선 하와이 1박 스탑오버 일정으로 되어있었다.
와.. 진짜 엄마아빠랑 뉴욕에 가겠네..라고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던 것 같다.
Hawaiian Airline
아무리 극 P인 나지만 부모님을 모시고 뉴욕까지 가게 되니 거의 처음으로 여행 계획이란 것도 세우게 되었다. 수십 개 관광지 목록을 만들어서 부모님이 가보고 싶어 하시는 곳과 굳이 안 가도 될 곳 그리고 시간이 되면 가봐도 괜찮을 곳 등으로 분류하고 대략적인 동선도 짜야했다.
엠스빌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타임스퀘어록펠러센터 카네기홀
현대미술관 자연사박물관
센트럴파크 컬럼비아대학
소호 첼시 다운타운 월스트리트
자유의 여신상 브루클린브리지
대략적으로 추리면 이 정도인 것 같은데 물론 실제로 간 건 미드섹스 엔 더시티 Sex and the city 에 나왔던 메그놀리아 Magnolia 카페도 포함해서 훨씬 많은 곳에 가긴 했다.
한국인 필수관광지 메그놀리아 카페
마법의 주문 <언제 또 오겠냐> 를 외우시면서 나의 부모님 두 분은 정말 놀라운 체력으로 맨해튼 섬 전체를 구석구석 빠짐없이 돌아보셨다.
자연사 박물관은 도저히 자신이 없어서 혼자 호텔로 돌아가서 3시간 정도 자고 돌아와서 1층 공룡뼈 앞에서 다시 만났는데 너무 쌩쌩하시고 행복해하시는 모습이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자연사박물관 1층 로비의 공룡뼈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역시 숙소였는데 혼자 여행할 때는허드슨 강 너머 뉴저지쪽의 저렴한 한인민박이 딱이지만 부모님을 모시고 가려다 보니 기차까지 타고 가야 하는 퀸즈외곽의 방 한 칸도 하루에 수십만 원을 줘야 했다.
레지던스인 메리어트맨해튼타임스퀘어
수십 시간의 연구 끝에 내린 결론은 맨해튼 미드타운의 한복판 브라이언트 공원Byant Park 앞에 있는 레지던스호텔이었다.일반 호텔룸보다 조금 넓고 취사가 가능해서 작은 싱크대까지 있는 것이 장점이었다. 여분 침대하나를 포함해서 1박에 30만 원이 좀 넘게 나온 것 같았다.
여행끝무렵에 느낀 거지만 맨해튼 중심가는 부모님에겐 좀 정신없고 시끄러워서 조용한 퀸즈의 주택가가 좀 더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연신 숙소위치가 아주 좋다고 칭찬하시긴 했다.
아름다운 도시 뉴욕이 부모님과의 추억으로 덮이게 될 줄은 몰랐다. 특히 레지던스인 호텔 10층의 1010호와 매일 빠짐없이챙겨 먹었던 매일 바뀐다면서항상 비슷했던 메뉴의 조식뷔페는 아마도 잊지 못할 것 같다.
뉴욕여행기의 시작은 아이러니하게도 하와이여행기로 시작할 것 같다. 뉴욕은 이제 됐고 하와이는 한번 더 오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될지는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