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 이야기 10화
첫 미국 출장을 다녀왔다. 약 약한 달간의 여정 속에서 내 가슴속에 가장 깊숙이 박힌 말은 스페이스 뮤지엄에서 본 라이트 형제의 말이었다.
라이트 형제의 배경이나 학벌은 별 볼 일 없었다. 하지만 날고 싶다는 꿈을 품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직접 만들고, 날려보고, 부서지고, 고치고를 반복. 이걸 보면서 라이트 형제야말로 스타트업이 본받아야 할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첫 비행을 2주 만에 만들어냈다. (비행기도 2주면 되는데 스타트업 제품은 훨씬 더 빠르게 만들어야 하지 않나)
이번 미국 출장을 결정하게 된 이유도, 직접 그 시장에 부딪혀보지 않고서는 글로벌 진출을 위해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끝까지 모를 것 같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많이 넘어지면서 배웠고 또 발전시켜 나갔다. 오늘은 미국에서 직접 부딪히며 배운 3가지를 작성해봤다.
미국에서의 첫발은 입찰 산업에선 가장 유명한 입찰/제안 전문가 협회(APMP) 주최의 컨퍼런스였다. 우리에게 APMP 컨퍼런스는 살아있는 교과서와 같았다. 수많은 경쟁사를 직접 만나고 그들의 서비스를 체험하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RFP 자동화와 제안서 작성 솔루션"들이었다. `AutogenAI`, `Responsive`, `Pwin` 같은 회사들은 제안서 작성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AutogenAI`는 사용자 경험이 아쉬웠고, `Responsive`는 정확도 문제로 고객의 외면을 받기도 했다. 반면 `Pwin`은 CEO가 직접 고객 지원에 나서는 등 적극적인 모습으로 높은 만족도를 끌어내고 있었다. 이를 통해 단순히 기능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고객과의 신뢰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다음으로 "시장 정보와 데이터를 분석하는 솔루션"들이 눈에 들어왔다. `Deltek`의 `GovWin`처럼 방대한 데이터를 가진 전통의 강자도 있었지만, 투박하고 낡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투박하더라도 데이터가 많고 훌륭하니 사용할 수밖에 없는 솔루션이라는 인식이 업계 전반에 깔려있었다. 반면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GovSignal`은 탄탄한 데이터 파이프라인을 구축하며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다들 AI를 내세우는 뻔한 경쟁속에서, 데이터의 본질에 집중하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결론적으로, 미국 시장은 이미 수많은 플레이어가 각축을 벌이는 치열한 전쟁터였다. 하지만 직접 부딪히고 배우면서 그들의 장단점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경쟁자만 바라보지 않고 현장에 있던 다른 고객들의 생각도 함께 듣다 보니 거기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Sweetspot(고객은 원하는데 경쟁자가 갖추지 못한 지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솔루션이 RFP가 나온 이후의 '실행' 단계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분명 이유가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많은 잠재고객들은 RFP 이전(Pre-RFP), 즉 '시장 진입(Market Identification)'과 '사전 영업(Capture)' 단계를 도와주는 솔루션이 필요하다고 했다. 여기서 첫 번째 'AHA' 모먼트가 나왔다.
우리는 처음에 한국 사무실에서 내부 가설로 개발된 '비드 리포트(Bid Report)' 서비스를 들고 고객들을 만났다. 하지만 반응은 기대와 달랐다. 다들 "좋네요"라고 말했지만, 그뿐이었다. 후속 미팅이나 계약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없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피드백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네쉬빌에서 APMP행사를 마치고 미국 입찰의 중심지인 워싱턴 D.C로 넘어온 첫날 바로 회의를 진행했다. 우리가 들고 온 비드 리포트 회고를 통해 더 이상 비드 리포트는 진행하지 않는 걸로 빠르게 결정했다. 그 결정의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고객의 반응이었다. 행사장에서의 반응 그리고 현지에서 고객 미팅을 위해 여러 번 비드 리포트를 내세워 미팅 요청을 했지만 한 건 잡기도 쉽지 않았다. 반응이 없는 것도 고객 피드백이라고 봤다.
그럼 피벗은 무엇으로 해야 할까?
그것 역시 고객이 가장 원했던 것으로 하자. 바로 RFP 이전 단계인 Pre-RFP(사전영업)을 도와주는 솔루션을 만들자였다. 위에도 적었지만 경쟁자들이 '실행' 단에 몰려있어 그것을 피한게 아니다. 오히려 그들도 풀기 어렵다고 여겼던 고객의 더 큰 문제를 풀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큰 문제를 풀려면 한 달간의 미국 출장만으로 되겠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기획 하루. 개발 하루. 단 이틀 만에 MVP(Minimum Viable Product)를 만들었다. 라이트 형제도 1차 비행기 날리는데 2주밖에 안 걸렸는데.. AI시대에 이틀 만에 만드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Teamwork"이었다. 나와 함께 미국에 간 Growth를 맡고 있는 원준님 그리고 Product을 맡고 있는 예련님. 이렇게 우리 셋은 클라이원트 안에 또 하나의 작은 스타트업이었다.
아~하면 어! 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임. 내가 처음 클라이원트를 세웠을 때 우리 코파운더인 승도님, 구열님과 셋이서 했던 그 호흡을 그대로 이 두 분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각자가 가진 강점들이 이 팀워크를 통해 더 빛을 발하게 만들었다. 원준님은 미국인보다 더 미국인스러웠다. 누구를 만나든 편하게 말을 걸고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우리의 네트워크가 만들어지고 고객들의 피드백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예련님은 우리 회사의 막내지만 인생 2회 차 같은 느낌이다. 일반적인 개발자들이 가지고 있는 갇혀있음이 없었다. ML엔지니어지만 프론트, 백앤드 뭐든 해야 한다면 다 할 수 있다는 오픈 마인드. 그리고 그걸 해내는 실력과 속도. 이런 두 사람과의 호흡이 잘 맞아 첫 번째 피벗은 아주 빠르게 진행이 될 수 있었다.
이틀 만에 만든 MVP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고객을 만나자"였다. 그럼 어떻게 고객을 만날 수 있을까. 딱 2가지로 좁혀졌다.
첫 번째 방법은, 온라인으로(주로 링크드인) 우리가 만든 MVP를 소개하고 미팅 요청을 하는 것이었다. 위에서도 얘기했지만 전에 Bid Report로는 미팅 한번 잡기가 그렇게 어려웠는데 우리가 만든 MVP가 Pre-RFP Capture에 특화되어 있다 보니 고객 반응이 완전히 달라졌다. 정말 하루 스케줄이 꽉 찰 만큼 미팅이 잡히기 시작했다. 고객들의 반응은 주로 내가 원했던 사전 영업 툴을 못 찾았는데, 그걸 만드는 스타트업이 있다니! 어떻게 솔루션화 시켰나 보자 라면서 미팅에 응했다고 했다.
두 번째 방법은, 미국에서만 할 수 있는 걸 하자였다. 그럼 미국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건 그냥 오프라인에서 직접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잠재고객과 오프라인 미팅을 유도하여 더 깊은 대화를 이끌기도 했고, 전시회에 참여하거나 지인의 지인들을 최대한 동원해서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인상 깊게 한 오프라인 활동은 바로 각종 위워크를 돌면서 정부입찰 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무작정 말을 거는 것이었다. 원준님은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자아가 두 개가 있어서 일할 때는 완전 철판 깔고 들어간다. 위워크에서 탁구 치는 애들 붙잡고 같이 탁구 치자고 하면서 정부입찰 하는지 물었다. 그들은 정부 입찰에 직접 들어가진 않았지만 우리 경쟁사의 영업 에이전시를 했었던 능력 있는 친구를 알고 있어서 우리에게 소개해줬다. 그 친구 덕에 우리는 경쟁사의 정보도 더 알아냈고, 잠재 고객 발굴을 통한 영업 기회도 얻어냈다.
나도 위워크에서 일하고 있는데 앞에 백인 여성분이 Government contract 관련돼서 전화로 누군가와 통화하는 걸 엿듣다가, 바로 말을 걸었다. "방해해서 미안한데 정부 입찰 하는 것처럼 들렸는데, 우리 입찰 분석 솔루션 만드는데 잠깐 시간 내줄 수 있어?"라고 했더니 본인은 정부 지원사업을 하지만 남편이 입찰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남편은 어딨냐고 했더니 바로 내 뒷자리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ㅋ 그렇게 소개를 그 자리에서 받고 바로 우리 서비스를 설명해 줬다. 이분은 민간 입찰만 주로 했었는데 안 그래도 최근에 정부 입찰로 확장하려고 컨설턴트 미팅까지 잡아놓은 상태였다. 그러면서 본인과 매우 밀접한 서비스를 만들고 있다면서 만족해하셨다. 물론 미리 잡아놓은 컨설턴트에 밀려 최종 결과까진 이어지지 못했지만 이 당시에 우리 서비스와 가장 핏이 잘 맞는 고객이었다.
마지막 2주를 남기고 우리는 선택과 집중을 하기로 했다. 한두 푼 하는 서비스도 아니고 만불 이상의 서비스를 계약하기 위해서는 리드 타임도 필요하고 데이터의 정확도도 필요했다. 그래서 현재 상황에서 모든 고객을 맞출 수 없으니 가장 확률이 높은 단 한 명의 고객에게 맞춤화한 제품으로 고도화시키기로 했다. 이번 미국 출장에서 팀원들과 입버릇처럼 흥얼댔던 노래가 있었다. Eminem의 Lose yourself에서 나오는 도입부 "One shot, or one opportunity". 우리에게 주어진 제한된 시간에 단 하나의 총알을 하나의 타겟에 맞춰야 한다면, 그건 누굴까라는 고민과 동시에 결정을 한 것이다. 그렇게 철저한 준비를 한 상태에서 미팅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MVP는 MVP였고, 고객의 다양한 요구에는 전부 대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우리는 그 계약을 따냈다. 이유인 즉슨 제품 자체의 데이터와 사용성은 부족했지만, 클라이원트가 본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각도로 고민한 흔적들이 결국 솔루션을 찾을 수 있겠다 생각이 되어 계약을 해주시기로 하셨다.
이 경험을 통해 중요한 교훈을 하나 얻은 건, 고객은 완성된 제품이 아니라,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확신'을 산다는 것이었다. 비록 제품은 없었지만, 우리는 그 고객에게 집중하여 문제 정의부터 솔루션까지를 고민했고, 무엇보다 계약을 하게 되면 단순 제품만이 아닌 직접 발로 뛰며 고객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 주겠다고 했다. 이 부분이 나중에 계약 결정을 하시게 된 큰 이유 중에 하나라고도 해주셨다.
위에 공유한 1. 경쟁사를 통한 시장 이해 2. 고객 피드백을 통한 피벗 3. 제품 없이 첫 고객 만들기. 이 세 가지 모두 우리가 직접 미국에 가지 않았으면 그 어느 것 하나 이룰 수 없는 성과였다. 내가 예비창업 때부터 주구장창 떠들던 세계정복을 하고 싶다는 꿈은 하늘을 날고 싶다는 라이트 형제의 꿈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 있지만 진심이고 직접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이트 형제가 첫 동력 비행에 도전한 뒤 깨달은 것은 분명했다. "단순히 뜨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제어(Control)가 핵심이다"였다. 즉, 의도한 방향으로 날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미국 시장으로의 첫 진출과 첫 고객 확보는, 겨우 날개를 펼친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진짜 이륙하고, 안정적인 비행을 하기 위해선 고객을 만족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고객 확보는 충분하지 않다. 고객 만족이 핵심이다.
참조 2 - 클라이원트 공식 블로그 - 미국 출장 1주차 회고
참조 3 - 클라이원트 공식 블로그 - 미국 출장 2주차 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