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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ed Enabler Jul 03. 2022

24. 그 만의 노력이 그의 남다름인 것을...

"저희 아이는 제대로 해오는 것이 없어요!"

이 말속에 부모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말을 깊이를 따라 들어가 보면, 아마도 "아이가 제대로 무엇인가를 해오기를 바래요."라는 희망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


우리는 나아지기를 원한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그런 마음속에서 아쉬움과 불편함을 보고 미래의  희망을 말하기보다는, 현재의 부족함을 먼저 말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리고 나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런 시선을 아이에게 적용할 때 아이는 불완전하고 부족한 존재가 된다.



나의 아이는 타고나기를 완전함을 추구하였다.

3살쯤인가 요플레를 먹는데, 뚜껑을 떼다가 그것이 흘러버리고 말았다.

아이는 오열을 하며, "다시 원래대로 해줘!"를 외쳐댔다. 괜찮다고 아주 조금 흘린 것이라고 해도 아이의 울음은 쉽사리 그치지 않았다.

"엄마가 새 걸로 바꿔주까?" 우는 것을 달래는 것에 힘이 부치고, 그 조금 흘린 것이 대체 왜 오열할 일인지 알 수 없어, 나도 모르게 좀 쉽게 가자 싶었다.

그러나 어림없는 일이었다.

 "아니야, 처음부터 다시! 원래대로! 엉엉"


과거를 돌리라는 그의 주문에 난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아이는 그랬다.

그대로의 완전함을 추구하는, 주장하는 형태는 그렇게 표현이 되었다.


한 번은 아이가 6살 때 일인데, 동네 아이들 보드게임방 선생님께서 그 또래 아이들이 모여하는 보드게임 대회를 나가보지 않겠냐 하셨다. 아이가 보드게임을 좋아하니 좋은 소식이 기대된다는 말씀도 덧붙이시면서...


그날 아이는 게임의 50프로를 참석하지 않았다.

부모의 참석은 허락되지 않았기에 들은 얘기로는 게임 초반 순서를 정하는 가위바위보를 안 하겠다 버티면서 시작된 일이었다고 한다.


"가위바위보를 안 한 이유가 뭐야?"

"그건 운이잖아."


실력으로 겨루고 싶었던 아이는 운에 의한 불확실성을 보고 게임에 참가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설사 단지 순서 정하기였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얻은 것은 무엇이니?

해보고 지는 것은 순위가 있지만 해보지도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순위조차 매길 수 없어. 해보고 지면 다음에 내가 어떻게 할지 알 수 있지만, 참가조차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단다."


아이는 그 의미를 알아들었을까... 그건 모르지만 7살 때 다시 참석한 그 대회에선 상을 하나 얻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가 터닝포인트를 만나 굉장히 달라졌다는 것은 말하기만 좋은 일이다.

갑작스러운 변화도 없었고, 순탄한 것도 없었다.

매년, 매 순간 아이의 완전함을 다뤄야 했다.

학교를 다니며 나타난 주요 형태는 미완이었다.


코로나가 풀리며 학교를 종종 가기 시작한 초등 2학년에는 국어 교과서를 보면 어느 페이지는 완전히 비워져 있었다. "오늘 이 부분 배우지 않은 거야? 아무것도 안 쓰여있네." "아니... 생각하다가 못썼어."

"응? 다들 썼는데 너는 못썼다는 말이야?"

"응, 나는 더 멋진 걸 쓰고 싶었거든. 더 좋은 걸 생각하느라 아예 못썼어."

"그래?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지금 써보자."


아이의 완전함과 탁월함은 '남들과 다르게'라는 그만의 슬로건을 업고 날개를 달아, 더욱 미완이 되었다.


"나는 남들과 다르게 하고 싶어!"

마음만 가득한 그의 결과물은 항상 늦거나 끝을 맺지 못한 형태가 되어 가고 있었다.


며칠 전 아이의 무거운 필통을 열어보니 웬 종이 쪼가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자세히 보니 잘라진 종이들에는 글이 쓰여있었다.

"이게 뭐야?",  "국어사전"


얼마 전 학교에서 나만의 국어사전 만들기를 했던 기억이 났다. 그때 아이는 국어사전 만들었냐 물었더니, 대충 모호하게 넘어갔고, 나는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알아야 할 일은 어김없이 나에게 저절로 보여진다. 상세히 들어보니 선생님께서는 종이를 아이들에게 나눠주시고, 그 종이를 접고 접은 후 그 위에 글을 써서 사전을 만들라 하셨단다.


"나는 좀 다르게 하고 싶었어. 그래서 다 잘랐어. 잘라서 붙이려고 했는데 시간이 너무 걸려서 자르고 글을 쓰기만 한 거야."

"그랬구나. 엄마랑 같이 해 보까?"

"아냐, 그냥 이거면 돼"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붙이기만 하면 되니 A4 한 장만 가져와봐. 너는 ㄱ, ㄴ, ㄷ 순서로 종이를 찾아줘. 엄마가 A4에 붙일게."


처음에는 내가 붙이고, 아이는 글을 찾았다. 좀 지나 아이는 글에 풀도 칠하고 붙이기도 하며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사전은 완성되었다.


"사전 글자는 어떻게 선택한 거야?"

"내가 사전을 보고 내가 잘 모르겠는 단어를 찾아서 쓴 거야. 이것 봐 엄마, 옆에 한자도 같이 넣었잖아."

"와 정말 그렇네, 한자 넣은 생각 너무 좋다."

"이렇게 만들어보니 어때?"

"정말 뿌듯해."

"봐봐. 이거 만드는데 얼마 안 걸렸잖아. 이 사전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 뭔지 알아?" "뭔데?"


"이렇게 해봐야겠다 하고 아이디어를 내는 것, 이렇게 자르고 모르는 글을 써넣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해. 너는 학교에서 국어사전을 90% 한 거야. 이렇게 완성이 되는 데는 단지 10%만 필요했던 거야. 그 90%를 만든 노력과 과정이 대단한 거야. 만약 또 학교에서 완성이 안되면, 집에 가져와서 엄마랑 10%를 채우자."


세상 하나뿐인 그의 국어사전


아이는 완성된 국어사전을 꽤나 뿌듯해했다.

"정말 멋진 너의 국어사전이구나."




아이가 학교에서 나름의 완성까지 하고 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학급 내에서 매번 완성이 없는 아이, 창작에 느린 아이라는 인식은 아이에게 어떤 느낌일까, 지금도 이런데 나중에까지 이러면 어떡할까?

그것을 막기 위해, 보완하기 위해, 개선하려고 부모가 집중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상황이 발생하면 과거의 행동을 끌고 오고, 미래의 불안을 당겨와 그에 대한 걱정과 질문들로 가득 찬다.


"좀 평범하게 해."

"다른 애들 하는 것처럼 해. 혼자 튀지 말고."

"시간 내 끝낼 수 있게 해.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

"에구 욕심만 많아서는..."

부모는 바란다. 내 아이가 좀 더 잘 적응하기를, 좀 더 완성된 모습이 되기를...


그런데 엄청 중요한 사실은 그 시간을 부모인 내가 겪지 않는다는 것이다. 난 그 학급에, 그 시간에, 그의 외부 험에 없다. 있을 수가 없다.

오로지 그 혼자 고민하고, 대처해야 한다.

나는 그 순간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 상황을 맞이하길 원하는가?


나는 그가 그의 재능을 살리고, 자신 있는 태도로 그 상황을 맞이하길 바란다. 나는 그가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그 안에서 죽이지 않고 그 만의 방식으로 살려내 원하는 방향에 도달하기를 희망한다.

나는 그가 그의 작품에 애착을 갖고, 과정을 즐기며 성취감을 느끼길 소망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이벤트를 만들어주는 귀여운 외계인을 통해 나도 아이처럼, 나에게 좀 다른 질문을 던져보고 있다.


무엇이 과연 아이에게 도움을 주겠는가.
무엇이 그의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속의 재능을 꿈틀거리게 하겠는가.

만약 아이가 제대로 해오는 게 없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잘하는 것을 미친 듯이 하고 있는 것이라면?
남들과 다르게 보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눈치 보지 않고 해보고 싶은 도전을 하고 있는 모습이라면?

자신의 날개를 피는 법을 알아보려 다 채 펴지지 않은 날개로 이리 날아보고 '쿵', 저리 날아보고 '콩 하는 아기새에게 어미새는 어떤 도움을 줘야 할까.

                    

모두가 같아질 필요는 없다.

다르다는 것은 틀리다는 것이 아니다.


'나 여기 있어요. 나 여기 나의 빛으로 여기 있어요!'

'그래, 너 거기 있구나. 너의 다름으로...재능으로...

너로서 그렇게 크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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