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준효 Sep 27. 2017

무인양품과 우리 미의식

하라 켄야의 <디자인의 디자인>을 읽고_

1.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은 예술가는 아름다운 작품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곧 이 작품은 갤러리에 걸리게 되고 예술가를 대신해 관객에게 목소리를 낸다. 곧 그 작품은 '아름다워' '왜 날 슬프게 하지' '우울하다' 등 관객의 감상을 얻어 풍성한 아름다움을 가지게 된다. 예술을 창조하고 향유하는 이 과정은 브랜드 제품을 사고파는 과정에서도 볼 수 있다. 만든 사람의 메시지를 상품이 대신하여 우리에게 전하고, 우리가 그 메시지에 감응하면 그 물건을 구매한다. 그리고 그 물건이 내 것이 될 때 우리는 물건에게 새로운 의미를 더해준다. 이렇게 상품 구입을 통해 메시지를 주고받는 그 순간 브랜드는 세상에서 가장 대중적인 예술이 된다. 나 또한 선물에 의미를 담기 위해 브랜드를 활용한다. 위안부 할머니 꽃 그림으로 완성한 마리몬드 맨투맨티를 신학생 친구에게 선물해서 소외계층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신부님이 되어달라는 메시지를 전하거나, 금속으로 제작된 모나미 펜을 사회초년생 형에게 선물해 견고함과 실용성의 가치를 전한다. 이렇게 브랜드 제품은 메시지를 만나 따뜻함, 견고함, 그리고 실용성을 품는다.

    그래서 나는 1기본적으로 전하려는 메시지가 있고 2그 메시지가 의미있을 때 그 브랜드를 훌륭한 브랜드라 말한다.  모든 예술이 감동을 줄 수 없듯이 감동을 주는 브랜드를 찾기란 여간 쉽지 않은 일이다. 겉으로 예쁘고 멋있고 화려하지만 주변엔 하나같이 속이 깊지 않은 브랜드들 뿐이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잡지에서 '진짜 광고'를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광고는 아무리 봐도 브랜드 광고가 맞는데 제품은 어디에도 없는 이상한 광고였다. 대신 하얀 설원과 파란 하늘이 있었고 좀 더 들여다보니 광활한 설원을 걷는 사람과 그 옆에 '無印良品'이라는 네 글자가 있었다. 광고를 통해 처음 알게 된 이 브랜드, 무인양품은 다른 회사와 자신을 구분 짓는 1정체성이 확립되어 있었고 2자신만의 동양적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3메시지는 곧 브랜드 네임 '무인양품'이었다. 감동을 주는 브랜드! 그래서 예술이 되는 브랜드를 드디어 만난 나는 무인양품의 디자이너를 찾았고 그 결과 하라 켄야라는 디자이너의 <디자인의 디자인 Design of Design>을 읽기 시작했다. 이런 광고를 만든 천재 디자이너가 책까지 잘 쓰면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며 반신반의한 채로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완독한 뒤 이 책은 나에게 올해의 책이 되었다. 실제 디자인 사례로 디자인 개념을 정립해주고 일본 미의식을 쉽고 깊이 있게 얘기하는 세상에 몇 안 되는 책이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한국 미의식에 대해서 사유하고 있었다.

무인양품 지면 광고


2.1.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하라 켄야의 디자인 개념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한 첫 걸음은 그의 작품 무인양품을 체험해보는 것이다. 하라 켄야의 무인양품은 생활양식(lifestyle)을 파는 일본의 브랜드이다. 여기서 생활양식을 판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의류·전자제품·음식 등 생활 전반의 물건을 판다는 의미이고, 두 번째 의미는 생활 양식을 제시한다는 의미이다. 생활용품을 판다는 점에서 다이소와 비슷하지만 새로운 생활 양식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다이소와 전혀 다르다. 무인양품이 제시하는 생활양식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 번째는 '최고의 합리성'이다. 1980년대 무인양품은 비싸서 못쓰는 요리재료로 알려진 표고버섯을 저렴한 가격에 팔기 시작했다. 품질에 이상이 없지만 모양이 부서진 버섯들을 모아 새 상품을 기획했기 때문에 가능한 가격이었다. 이와 같은 제품들은 소비자들로 하여금 "이 제품은 최고야"라는 강한 선호를 띄게 하지 않지만 "이만하면 충분해"라는 생각이 들게하는데, 이것이 무인양품이 표방하는 '최고의 합리성'이다. 무인양품이 제시하는 생활 양식 두 번째는 '無의 가능성'이다. 모든 무인양품 제품들은 디자인하지 않은(無) 듯 심심하고 단순한 외양을 갖고 있어서 어느 장소에 놓아도 홀로 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있든 어떤 활동을 하든 전혀 어색하지 않을 새로운 가능성이 있는 공간. 비어있기 때문에 채울 것이 생기는 진정한 의미의 공간(空 비울 공, 間 사이 간)을 무인양품이 만들어낸다.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이 있다.(無可有)"로 정리되는 동양 철학을 바탕으로 제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마침내 '無의 가능성'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무인양품이 주는 독특한 경험은 하라 켄야의 재정립된 디자인 개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시각적으로 꾸미는 것이 디자인이라는 통념과 달리, 하라 켄야는 디자인을 '정보유통' 행위이다. 그가 말하는 정보유통 디자인은 사회에 유의미한 정보를 생산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유통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그는 기존의 디자인에 '사회적 정보 생산' 개념을 더해 디자이너로서의 사회적 사명감을 강조한다. 이 디자인 개념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디자인은 확고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게 되는데, '최고의 합리성'과 '無의 가능성'이라는 정보를 전파하는 무인양품이 좋은 예시이다. 실제로 무인양품은 제품의 정보를 통해 소비자들의 안목을 변화시킨다. 최고의 합리성을 경험한 소비자들은 쓸모없지만 화려한 첨단 기능에 현혹된 상품 평가 기준을 버리고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가치 평가 잣대를 되찾는다. 無의 가치를 경험한 소비자들은 각각의 강한 개성으로 불협화음이 넘쳐나는 세계에 '비워냄' '양보'의 동양적 가치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하나의 브랜드가 해내는 이 놀라운 일들은 이 책의 주제이자 하라 켄야의 디자인 철학인 '정보유통' 개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2.2.

    실제로 무인양품에 방문해서 디자인의 '사회성'을 경험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브랜드 제품 구매를 통해 동양의 미美 가치를 체험하는 것은 정말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여태까지 한 문화권의 철학을 알기 위해서는 미술, 음악을 찾아 보고 듣는 등의 특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무인양품 매장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없이 제품을 구매하면 그만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동양 미술의 여백의 미美를 수없이 봐왔지만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그것을 알고 느끼는 게 우리 생활에 어떤 도움도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인양품을 통해서 無라는 동양의 가치를 다시금 깨닫고 그저 아는 것을 넘어서 실천할 수 있겠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정체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의미 있는 동양적 미美가치를 현대적인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켰기에 무인양품은 그 어떤 브랜드보다 예술을 하는 브랜드였다. 전혀 관념에만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고 지나치게 상업적이지도 않은 특별한 브랜드가 무인양품이었다.

    그러나 무인양품과 하라 켄야의 철학을 무비판적으로 감상만 하며 읽은 것은 아니었다. 하라 켄야의 어떤 일견은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일견은 無의 가치가 일본만의 미의식이라는 간접적인 주장이었다. 그는 무인양품이 지닌 無의 가치를 소개하면서 일본 문화를 설명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읽으면 '無의 가치는 일본의 것이고 그걸 무인양품으로 말하고 있구나'라고 독자들이 착각할 수 있겠다는 비판적인 생각이 들었다. 일본 국기의 빨간 원圓은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의 많은 생각을 담을 수 있다고(無可有) 그는 설명했는데, 동양의 미의식을 일본의 국기와 억지로 연결시키는 것이 굉장히 나로서는 불편했다. 그리고 일본이 가장 장식적 요소가 많은 미술을 하면서 국기 하나로 無의 가치를 독점하려는 것은 오만한 짓이었다. 동양의 미의식을 담아 냈기 무인양품을 좋아하지만, 일본 미의식이 억지로 연결되는 순간 무인양품에 대한 나의 호감도는 반감된다. 무인양품에는 일본만의 미의식이 담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3.

    "우리의 미의식이 누군가의 소유물로 독점될 수 있는 상황에서 나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동양적 가치를 빼고 나면 우리에게는 어떤 우리만의 미의식이 남을까." 이 책을 읽고 굉장히 오랫동안 고민했다. 우선 우리나라를 대표한다는 K-pop 브랜드는 우리의 정체성을 설명해주지 못했다. 힙합과 재즈는 흑인들의 저항정신을 담고 있지만 K-pop은 우리의 정신을 얘기하지 않는다. 그 밖에 내 주변의 물건들을 살펴보았지만 결국 나는 '남과 우리를 구분시키는 우리만의 정체성'을 찾지 못했다. 오랜 역사와 정통성을 갖고 있으니까 당연히 그것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을 생각하려니 생각할 게 없는 공허함. 그것을 몰라서 내가 왜 한국인이여야만 하는지 모르겠고, 그것을 몰라서 한국인으로서 나의 특별함이 무엇인지 헷갈렸다. 그래서 나는 그것, 우리의 철학과 미의식을 되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경제적으로 빠르게 급성장해야 했기에 우리가 가진 것을 돌아볼 수 없었다면 우리 세대에서 이뤄내야 할 것은 잊어버린 정신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우리가 모른다는 것일 뿐이지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많은 분들이 우리의 미술, 음악, 의식 등을 연구하고 있고 빛을 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것은 그렇게 찾아낸 우리의 미의식이 당장 우리 주변에 없다는 것이다. 모든 철학과 미의식이 책 속의 글과 그림으로만 존재하기에 대중적인 관심도 적고 접하기도 어렵다. 의미 있는 정보가 갖춰진 상태에서 효과적인 유통 방법을 계획하는 하라 켄야의 디자인 개념이 필요한 시기가 우리에게도 왔다. 그리고 그 효과적인 유통 방법은 단연 대중이 가장 쉽게 소비할 수 있는 '브랜드'이다. 우리의 정신만은 남겨놓되 형태는 지극히 현대적인, 그래서 그 누구라도 새로운 미美가치를 발견할 수 있지만 접하기 전혀 어렵지 않은 우리의 브랜드가 필요하다. 더 나아가 그렇게 찾아낸 우리의 아름다움이 세계인들에게도 실용적 가치를 제공하여 세계 문화에 기여할 때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진정 실현될 것이다. 동양의 미의식이 현대적인 무인양품을 만나 세계에 대안적인 삶을 제시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정신을 현대적인 방법으로 말할 때가 왔다.

    보이지도 않고 본 적도 없기에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우리의 미의식이 세계인에게 새로운 생활양식을 제시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 형태는 현대적이되 우리의 정신을 남긴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1 한국적 미의식 존재 여부와 2 고유 미의식을 현대화시키는 것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일이다. 나는 이에 대한 답을 김환기 화백의 작품으로부터 얻었다. 김환기 화백의 <무제 27-VII-72 #228>을 보면 깊은 감정이 깃든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푸른 점들의 배열이 만든 균형 잡힌 조형에서 현대 디자인적 요소를 찾을 수 있고, 색과 점의 형태에서 깊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지독히 푸른색에 그리운 조국 동해바다 색을 담았고, 그리운 사람 시간 물건에 대한 먹먹함을 먹으로 찍어낸 듯한 점에 포개어 놓았다. 우리의 정체성과 정서가 담긴 이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현재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없다는 것에 안타까우면서도, 김환기 화백이 해냈다는 것에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한다. 우리의 아름다움이 브랜드에서도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김환기, <무제 27-VII-72 #228>



3.

    나는 하라 켄야의 <디자인의 디자인 Design of Design>을 통해서 디자인 개념을 재정립하고 무인양품 디자인을 살펴보며, 끝으로 우리의 미의식과 우리에게 필요한 디자인을 생각해보는 여정을 마쳤다. '비어있는 것은 새로운 가능성을 품는 것이다'라는 철학으로 새로운 생활양식의 가능성을 품는 무인양품과 이 모든 것을 디자인한 하라 켄야를 보면서 모름지기 우리는 공동체 일원으로서 사회에 무엇을 기여해야 하는가를 생각했다. 한국인으로서 나는 어떤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그것이 예전부터 궁금했던 나는 언젠가 꼭 이 물음에 답할 행동을 실천하고 싶다. 한국의 미의식을 찾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 구체적인 방법이 무인양품과 같은 좁은 의미의 브랜드가 될지 아니면 사진과 같은 대중예술 브랜드가 될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사회에 적극 참여하는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오랫동안 끈질기게 고민해온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아름다움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 이것을 알게 된 것은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이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정체성과 같은 큰 질문(big qeustion)에 관심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정체성과 관련한 문제는 누군가 꼭 질의해야 하며 답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변하고 사람들은 그래서 항상 새로운 것을 찾는다. 하지만 소중한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소중한 것을 지켜나가려고 하는 한 사람. 그 한 사람이 필요하며 나는 꼭 그 사람이 되고 싶다. 세상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찾다가 우리의 것이 무엇인지 모르게 될 때, 자기가 한국인으로서 가진 정체성이 얼마나 자기에게 중요한 것인지 모를 때, 그래서 결국 집을 떠날 결심을 할 때, 그 때 나는 우리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 글의 끝도 예술에 대한 나의 정의로 맺으려고 한다. 사회의 한 존재로서 사명감을 갖고 의미 있는 돌을 세상에 내던지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예술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라 켄야와 무인양품은 훌륭한 예술가, 예술품이었으며 나와 우리도 예술가가 될 것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