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혼돈의 시대, 우리들의 상식을 묻다
2024년 12월 3일.
대한민국 전역에 '종북 세력 척결과 자유 헌정 질서 수호'를 명분으로 한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이후 발표된 포고령과 함께 국민들의 기본권은 박탈당했고, 무장한 계엄군은 민의의 전당으로 불리는 국회에 무력으로 진입했다. 한밤 중에 꿈만 같던 그 모든 장면을, 시민들은 실시간으로 목도하였다.
전 세계로부터 민주주의 모범국으로 평가받고 있던 대한민국에 전시, 사변 혹은 이에 준하는 전제 조건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선포된 비상계엄은 가히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계엄은 단순히 무장 군인이 시민들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경고성 이벤트에 그치지 않았다. 우리가 겪어왔던 쓰라린 상처를 다시 들춰냈고, 그 아픈 역사를 거쳐 이룩한 우리의 민주주의에 치명적인 생채기를 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
요즘 우리를 둘러싼 사회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상식이 그 위상을 잃고, 암묵적으로 지켜져 왔던 관례는 사라진 지 오래다. 정치의 근간을 이루는 대화, 협치, 타협은 이제 사치품으로 전락했다. 서로가 지켜왔던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증오와 대립의 물결을 타고 휘발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상황이 비단 대한민국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독일은 의회의 총리 불신임으로 조기 총선을 앞두고 있고, 프랑스는 예산안을 둘러싼 극심한 대립과 대통령을 향한 하야 압박이 극심한 상태이다. 미국의 정치는 양극화된 지 오래이고,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보편관세 부과, 나토 탈퇴 등 기존과 차원이 다른 과감한 정책을 내세우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2년이 넘도록 전쟁 중이며 북한군의 개입으로 정세는 더욱 혼란해지고 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헤즈볼라도 무력 도발과 함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상황이다. 시리아에서는 반군이 독재 정권을 축출하고 정권을 잡기도 했다. 한마디로 대혼돈의 시대이다.
혹자는 이 시대를 '뉴노멀'이라 칭한다. 세상의 기준이 새로운 축으로 변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세계는 '노노멀'에 가깝다. 그 어떤 기준조차 존재하지 않은 채,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점차 사라져 가고 보편적 상식과 가치가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기술이 발전하면, 제도가 보완되면 모든 일들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비롯해 우리가 맞서왔던 수많은 불의와 부정, 그 과정 속에서의 헤아릴 수 없는 희생들. 앞으로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어왔다. 그동안 세상은 많이 바뀌었고, 민주주의는 더욱 성숙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1세기 사회에서 언론을 통제하고, 군인이 일반 시민의 기본권을 억압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건의 전말이 하나씩 드러남에 따라 망상은 상상이, 상상은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에서 우리가 그동안 지켜왔던 믿음과 가치가 한순간에 휘발될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 순간이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상은 변한다. 변화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변화를 거역하고 과거의 기준만을 고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때때로 변하지 않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오래전부터 우리가 투쟁을 통해 지켜왔던 가치들 말이다. 자유는 소중하다는 것, 갈등에는 대화와 토론이 필요하다는 것, 다름을 인정하고 협력함으로써 더 나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는 것. 어떠한 상황에서도 상대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굴복시키려는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 민주주의는 본래 불편한 것이라는 것. 이러한 것들을 이 시대가 되새겨야 할 상식이라 부르고 싶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라 해서 상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3.1 운동에서부터 이어져온 시민들의 비폭력 시위는 당시 시대가 지녀야 할 상식을 바로잡는 역할을 했다. 역사를 통해 다수의 민중을 이기는 소수의 권력은 없다는 것이 증명되어 왔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힘이다.
비상계엄을 말미암아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개개인의 참여와 목소리 하나하나가 가지는 가치를 역설하고 싶다. 찬성과 반대, 진영 논리를 떠나 시대의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 그리고 세상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무엇보다 세상을 외면하지 않고 변화를 당당히 직시하며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상식'을 세상에 꺼내어 놓는 것. 대혼돈의 시대에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일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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