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폴리오 정리하기

자아성찰은 언제나 도움이 된다

by weekendjune


직업인으로서의 기획자 01


IT업계에서 기획자라는 이름으로 일한지 어언 8년차가 되었다. 모 그룹의 UX팀 신입사원으로 들어갔을 때 내가 여기서 3년이나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 무색하게도. 회사에 진절머리를 내면서도 이직을 한 번 했고, 시니어의 문턱을 향해 순항 중이다.


기획자로서의 사명감, 열정, 유저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일종의 직업적 선의는 금방 바닥나기 쉽다. 여기저기서 몰려오는 요구사항, 수많은 담당자들과의 커뮤니케이션, 여러 번 뒤집어 엎는 기획안 같은 것을 반복하다보면 성취감보단 공허함이 자주 찾아왔다.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고 나는 여기서 전혀 보람도 행복도 얻지 못한다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그럼에도 월급은 소중하니까, 일은 해야 했다. 그러다보면 일터에서 '나'는 점점 더 배제하고 최소한의 할 일만 JIRA 이슈 클로징하듯 처리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같이 일하는 리더이자 멘토인 분에게 물었다.


"동기 부여는 어떻게 하나요?"


그 분의 대답은 "스스로 해야 한다"였다. 동기 부여는 누가 시켜주는 것은 아니라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쉽지 않겠는걸.'


그렇게 꽤 긴 슬럼프의 언덕을 올랐다가 요즘에야 겨우 하산 중인 느낌이다. 어쩌면 지난 1년간은 내게 있어 넷플릭스 재생목록을 하염없이 플릭킹하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뭔가 재미있는 걸 하고 싶은데 끌리는 건 없는 상태 말이다. 그래서 재생 버튼을 누르기 위한 첫걸음으로 포트폴리오를 정리하기로 했다. 내가 어떻게 일해왔는지를 정리하다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일을 잘 하고 또 하고 싶은지가 떠오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너무 오랜만에 정리하려니 뭘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했다는 것.

그래서 벽을 넘기 위해 나름대로 포폴 만들기 플로우를 만들어봤다.






1. 자아성찰 하면서 큰 스토리 잡기


정리하자면 포트폴리오는 나의 역량과 경험을 보여줘야 하는 문서다. 내가 가진 정보를 해체해서 재구성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무엇보다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떤 일을 할 때 (그나마) 즐겁고 뿌듯했는지, 사람들이 어떤 프로젝트를 가장 관심있게 볼지 등을 고민해봐야 한다. 그동안 쌓아온 커리어에서 어떤 점을 강조하고 싶은지 정리하기가 어렵다면 짧은 자기소개를 먼저 정리해보자. 짧은 자기소개와 내가 쌓아온 커리어는 비슷한 컨텍스트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


나는 자기소개를 크게 3가지 포인트로 잡아서 정리했다.


1) 삶을 작은 행복과 영감으로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점
2) 좋은 동료들과 함께 일 할 때 더 큰 에너지를 받는 사람이라는 점
3) 갤럽 강점검사 결과


규정하기가 어렵다면 동료들로부터 받은 피드백을 참고하거나 갤럽 강점검사나 mbti를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다. 또한 중요한 점은, 이 자기소개는 어디까지나 직업인으로서의 나를 소개하기 위한 목적임을 잊으면 안된다는 것. 내가 사교성이 좋다면, "저는 성격이 밝고 친구가 많습니다"가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을 잘 한다"나 "협업을 좋아한다"고 표현하자. 처음에 이 부분에서 애를 많이 먹어서, 자기소개 작성하는 데만 2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 다음으로는 그동안 해온 일을 쭉 리스트업해본다. 어떤 회사와 어떤 유형의 프로젝트를 해왔는지, 그 안에서 나는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 기여도는 어느 정도였는지, 사람들이 관심가질만한 경력은 어떤 것인지 등에 대해 정리해야 한다. 예전 포트폴리오에서는 회사 경력이 1군데였기 때문에 프로젝트 유형을 UX리서치와 UX기획으로 구분해 시간순으로 정리했다. 이번에는 회사별로 나눠서 시간순으로 프로젝트를 정리하고, 그 중에서 메인 프로젝트를 각 2~5개 정도로 추려서 제일 상단에 상세 내용을 별도로 정리했다.


그 다음으로는 해당 프로젝트들을 수행하면서 내가 쌓은 스킬을 뽑아본다. 툴 활용 능력같은 하드스킬 일 수도, 커뮤니케이션이나 데이터 중심의 의사결정 같은 소프트스킬일 수도 있다. 툴이 아니라 능력치 중심으로 스킬을 작성한다면, 해당 스킬 옆에 활용할 수 있는 툴 이름을 같이 기재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조금 러프해보이는 스킬에 대해서는 부연 설명을 함께 적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예시>

- 상위 정책 기획 및 상세 시나리오 작성 (Figma, Sketch, Keynote)
- 협업 부서와의 커뮤니케이션
ㄴ 디자인, 개발, QA, 마케팅, 법무팀 등 유관 부서와의 긴밀한 협업


이러한 자아성찰 과정을 거치고 나서 나는 다음과 같은 구조로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1. 경력 중심의 짧은 자기소개
2. 보유 스킬
3. 업무 경력
1) 현재 재직 중인 회사
- 메인프로젝트 (상세 기여도, 업무 방식, 기획 주안점 등)
- 전체 프로젝트 리스트 (기간, 프로젝트명, 수행업무 등)
2) 과거 재직했던 회사
- 메인프로젝트 (상세 기여도, 업무 방식, 기획 주안점 등)
- 전체 프로젝트 리스트 (기간, 프로젝트명, 수행업무 등)
4. 수상내역/특허
5. (업무 관련해서) 내가 나온 기사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내가 만들고 싶었던 것은 "한 페이지에서 이력서와 경력기술서, 포트폴리오를 모두 확인할 수 있는" 문서였다. 면접관 입장에서도 이력서/경력기술서/포트폴리오를 모두 다른 문서로 보는 것보단, 한 곳에서 전체 경력과 강점을 확인할 수 있는 편이 더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 내가 생각한 각 문서의 구분 기준

- 이력서: 지원자의 기본 정보와 대략적인 경력을 확인할 수 있는 문서
- 경력기술서: 내가 수행한 모든 업무 영역과 상세한 프로젝트를 리스트업한 문서. 수행기간, 프로젝트명, 수행한 업무 내용을 간략하게 기술한다. 어떻게 일했는가 보다는 '어떤' 일을 했는가에 포커스
- 포트폴리오: 직업인으로서의 나를 소개하는 문서. 나를 대표할 수 있는 주요 프로젝트와 업무내용 중심으로 기술한다. 나의 강점, 기여도를 파악할 수 있도록 '어떻게 ' 일했는가에 포커스





2. 다른 사람들 포트폴리오 찾아보기


요즘은 정보를 잘 공유하는 것도 스펙(?)인 세상이라, 조금만 검색해봐도 잘 정리된 포트폴리오가 많이 나온다. "직무명 + 포트폴리오"로 구글링하면 어렵지 않게 실제 샘플을 구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해서 찾은 포트폴리오들은 모두 참고용으로만 써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포폴은 비주얼이 무척 좋고, 어떤 포폴은 거의 경력기술서처럼 단순하게 정리되어 있기도 하다. 이런 형식적인 면에만 집중하다보면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가 흐려지기 쉽다. 나와 같은 직무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기술하고 어필했는지에 집중해서 살펴보는 것이 좋다.





3. 어디에 어떻게 정리할지 상상해보기


다른 사람들의 포트폴리오를 통해 영감받는 것까지 끝냈다면, 이젠 어디에 어떻게 내 이야기를 기술할건지 결정해야 한다. 나는 예전엔 스케치에서 A4 사이즈의 아트보드를 만들어 개별 프로젝트에 2~3장씩 할당하는 방식으로 pdf 파일을 구성했다. 하지만 이 방법은 현행화도 어렵고, 텍스트가 너무 많아지면 눈에 잘 안들어온다든가... 아무튼 기획자 포트폴리오에는 적절한 포맷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Notion을 활용하기로 했다. 평소에 메모할 일이 있을 때 잘 쓰고 있던 툴이고, 텍스트 양이 많아도 깔끔해보인다는 점에서 기획자용 포폴로 훨씬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현행화 작업이나 공유 측면에서도 훨씬 쉽다. 1번에서 언급했던 메인프로젝트들은 갤러리형 카드를 만들어서 그 안에 개별 프로젝트 별로 상세한 업무 내용과 기획 포인트를 정리했다. 그 외 전체 프로젝트들은 하단에 일반 텍스트로 단순하게 리스트업했다. Notion으로 만든 포트폴리오도 시중에 공개된 것들이 매우 많다. 감이 잘 오지 않는다면 이러한 문서들을 찾아서 참고하는 것도 매우 좋은 방법이다.




4. 그리고 필요하다면, 디테일 다듬기


이렇게 해서 문서를 모두 정리했다면 기본은 일단 완성한 셈이다. 그동안 해온 일을 정리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여정은 여기에서 끝나도 좋다. 하지만 만약 이직을 목적으로 포트폴리오를 정리했다면, 이 다음으로 할 일은 어떤 회사에 지원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지원하고 싶은 회사에서 요구하는 역량이나 직무에 따라 조금씩 커스텀을 하는 것이다.


-회사에서 채용하는 직무: 서비스기획자? 프로덕트 매니저? PO?
-해당 채용 공고에서 요구하는 역량에 맞춰 스킬이나 강점 정리하기
-짧은 지원 동기 추가하기


요즘 기획 관련 직군은 꽤 다양한 이름으로 채용되고 있다. 이름은 달라도 직무는 비슷할 수 있지만, 그래도 그 회사에서 어떤 명칭을 쓰고 있느냐에 따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역량이나 경험이 달라질 수 있다. 이 부분은 해당 공고의 상세 내용을 확인하면서 감을 잡아야 한다. 만약 시간적 여유가 없다면 이 부분은 스킵해도 괜찮다. 3번까지의 과정만 거치더라도 기본 틀은 완성됐을테니까(사실 이게 본게임이기도 하고). 하지만 내가 가진 역량이 이 채용공고에 적합하다는 점을 효과적으로 어필한다면 조금이라도 합격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을까싶다. :)




얼추 노션에 포트폴리오를 모두 정리하고 나니,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도 열심히 해왔구나 싶었다. 결과도 괜찮았고 성실하게 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여된 자신감이 조금 채워지는 느낌도 들고, 어떤 흐름으로 일 해야하는지 이제 조금은 더 알 것 같더라. 복잡했던 마음이 문서를 정리하면서 많이 정리가 되었다. 고생 많았어, 나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