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
승합차 뒤편에는 작은 상자들이 실려 있었고, 금속 장식들이 가지런히 펼쳐져 있었다.
버클과 체인, 고리 같은 가방 부자재들.
그녀는 그것들을 하나씩 들어 햇살에 비춰보며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작업복에 앞치마 차림.
일에 집중한 얼굴은 지난번과 또 달라 보였다.
민우는 잠시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괜히 숨이 가빠졌다.
망설이다가 한 걸음 다가섰다.
“으흠…”
헛기침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울렸다.
직원 한 명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이어 그녀가 돌아보았다.
잠깐의 정적.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이내 표정이 풀렸다.
“어… 그때…”
민우는 괜히 손을 앞으로 모았다.
“네. 비닐우산입니다.”
직원들 사이에서 작은 웃음이 터졌다.
그녀도 웃었다. 지난번보다 훨씬 편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 미소가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그날…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네요.”
“괜찮습니다. 저도 어딜 가던 길이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시선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여자가 장식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샘플 확인하는 날이에요.”
그녀가 설명하듯 말했다.
“멋지네요.”
“그래요? 한번 보실래요?”
그녀는 장식 하나를 들어 보여 주었다.
“이건 고급 가방에 사용하는 장식이에요.”
설명하는 그녀의 얼굴은 지난번과 달라 보였다.
부끄럽던 표정 대신 단단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민우는 그게 좋아 보였다.
그날 빗속의 그녀가 아니라,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민우가 손짓으로 그녀를 서너 걸음 떨어진 뒤로 불러냈다.
직원들이 눈치를 보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녀가 민우의 눈을 쳐다보며 물었다.
“근처에 계시나 봐요?”
질문은 가벼웠지만, 훅하고 들어왔다.
민우는 잠시 숨을 골랐다.
“사실은…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 선미 씨가 보였어요.”
그녀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잠시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내리셨어요?”
민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민우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냥… 보고 싶었어요.”
말하고 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멀리서 직원들이 상자를 정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금속 장식들이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뒤를 돌아보던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저, 잠깐만요.”
그녀는 직원들에게 돌아가 몇 마디를 건넸다.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제법 익숙해 보였다.
뭔가를 지시하는 듯했다.
잠시 뒤 다시 돌아온 그녀가 앞치마 끈을 풀며 말했다.
"잠깐, 시간 좀 되는데요."
숨을 한 번 쉬더니 가볍게 말했다.
“커피 한잔하실래요?”
그녀가 이끄는 대로 골목을 걸었다.
좁은 골목 안에는 순대와 떡볶이, 그리고 주스와 커피를 함께 파는 작은 카페가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사랑방처럼 드나드는 정겨운 곳이었다.
둘은 가게 안쪽에 마주 앉았다.
그녀는 자몽차를, 민우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민우가 지갑을 열었지만, 그녀가 먼저 계산대에 섰다.
“오늘은 제가 살게요.”
“아, 제가 사려고 했는데…….”
“지난번 아빠 도와주신 보답이에요. 당연히 제가 사드려야지요.”
“네. 감사합니다.”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날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려서 죄송했어요. 돌아가는 뒷모습을 잠깐 보니 한쪽 어깨가 다 젖어 있더라고요. 우리 아빠 때문에 그런 것 같아서 계속 마음에 남았어요.”
민우는 겸연쩍은 마음에 크게 웃었다.
“아니에요. 담아두지 마세요. 군대 있을 땐 맨날 젖어서 다녔거든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민우를 바라보았다.
“아, 군대 다녀오셨군요. 저는 저랑 동갑쯤으로 봤어요.”
“네. 작년 12월에 전역했습니다. 이제 두 달 지났네요. 다시 사회에 적응하는 중입니다.”
민우가 쑥스러운 듯 웃자, 그녀가 반갑게 맞장구를 쳤다.
“어머, 그러셨구나. 우리 오빠도 작년 12월에 전역했거든요.”
“아, 그래요? 어디서 근무하셨나요?”
“Y 지역 철책에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멀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했어요.”
“그렇군요. 저는 W 지역에 있었습니다. 전역 일자가 비슷하면 훈련소 동기일 수도 있겠는데요.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우리 오빠 이름은, 이철우라고 해요.”
민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잠시 기억을 더듬던 민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P 대학 다니고, 집이 M 시라던 그 친구 맞나요?”
“네, 맞아요! 오빠 아세요?”
“아, 이런. 세상 정말 좁네요. 저랑 훈련소 동기입니다. 같은 내무반을 썼던 친한 친구입니다.”
그녀가 놀라 입을 가렸다.
“어머! 세상에, 정말요?”
민우가 정색하고 여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 그렇군요."
민우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왜 이 여자가 그렇게 마음에 남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훈련소 시절, 쉬는 시간마다 철우와 붙어 지냈다. 그는 이따금 동생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오빠가 먼저 대학에 다니면 자기가 학비를 대겠다며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취직했다는 이야기였다.
공부도 잘하고 똑똑한 아이인데 못내 아쉽다며, 제대하고 졸업하면 반드시 대학에 보내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가끔 사진도 보여 주었다. 단정하고 예쁜, 단발머리 고등학생 시절의 사진이었다.
그 시절, 민우는 보초를 서며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다. 어머니가 암 수술을 받으시던 시절, 등록금을 수술비로 내고 한 학기 휴학을 결정해야 했던 암울한 기억이 떠 올랐다. 철우의 동생은 어떤 마음으로 오빠를 먼저 생각했을까. 생각할수록 기특했다. 나도 저런 동생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민우는 철우에게 너는 좋은 동생을 두어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늘 예쁘고 착한 여동생이 있는 친구가 부러웠다.
그렇게 그녀는 민우의 기억 속 깊은 곳에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가만히 민우의 이야기를 듣던 선미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 역시 친구들이 모두 대학에 갔을 때, 공장 창밖으로 대학생들을 바라보고 ‘캠퍼스’라는 단어를 되뇌며 속울음을 삼켰던 기억이 떠올랐다. 오빠가 휴가를 나왔을 때 회사 앞 식당에서 삼겹살을 사주고 차비를 쥐여주자, 오빠가 눈물을 흘리며 고맙고 미안하다고 하던 모습도 생각났다.
군복을 입은 그가 눈물을 보이는 게 그때는 창피했다. 사람들이 보면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사람처럼 보일까 봐, 혹시라도 동료들과 마주칠까 봐 괜히 더 초조해졌다. 그녀는 그를 얼른 보내려 등을 떠밀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날은 오래도록 미안한 날로 남았다.
홀로 계신 아버지도 떠올랐다. 좁은 밭뙈기 하나 일구며 혼자 지내는 모습. 그 생각에 괜히 목이 메었다.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여자가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쳤다. 민우는 휴지를 건네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미안해요. 괜히 저 때문에…….”
“아니에요. 그쪽 때문에 그런 거 아니에요. 아참. 우리 오빠 친구니까, 이제 오빠라고 불러야겠네요.”
여자가 눈물기 어린 얼굴로 빙긋 웃었다. 민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제가 죄송해요. 주책없이 눈물이 나와서…….”
“아닙니다. 괜찮아요.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민우는 이슬 맺힌 그녀의 맑은 눈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요란하게 울렸다.
눈물 맺힌 눈동자가 쉽게 시선을 놓아주지 않았다.
“민우라고 해요. 박민우.”
얼떨결에 자신도 모르게 이름을 외치듯 말했다.
“네. 저는 이선미라고 해요.”
민우가 어설프게 손을 내밀었다. 선미가 환하게 웃으며 그 손을 맞잡았다.
민우의 얼굴이 귀밑까지 빨개졌다.
민우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헛기침을 해댔다.
“다음에는 제가 저녁을 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선미가 잠시 망설이며 민우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휴대폰을 꺼내 번호 입력창을 띄워 건넸다.
“저녁 식사까지만…. 이예요.”
“아. 좋습니다.”
번호를 입력하는 민우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 모습을 본 선미가 배시시 웃었다. 휴대폰을 돌려받은 그녀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민우의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건널목 앞에서 발을 멈춘 민우는 괜히 주머니 속 휴대폰을 다시 한번 만지작거렸다.
웃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때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아르바이트를 부탁했던 친구에게서 온, 온갖 욕설이 담긴 문자였다.
하지만 민우의 입가에는 여전히 웃음이 걸려 있었다.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매서웠다. 그런데도 가슴은 뜨거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