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퇴근길, 현관 앞 (03)

남자들의 약속

by JUNI KANG


그날 밤, 민우는 자리에 누워 휴대전화의 주소록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철우.


훈련소에서 헤어진 뒤 한 번도 연락하지 못한 친구였다. 그때는 누구보다 가까웠는데, 자대 배치를 받고 나서는 자연스럽게 소식이 끊겼다. 선미를 만나고 나니 그 친구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선미에게 직접 연락처를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다른 동기들 몇 명과 통화한 끝에 그의 번호를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민우는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 말고, 그대로 상념에 잠겼다.




그 둘은 훈련소에서 쉬는 시간마다 늘 붙어 앉아 있었다.

다른 훈련병들은 그들을 ‘우우’라고 불렀다. 철우와 민우의 이름을 붙여 만든 별명이었다.

둘 중 하나라도 혼자 밥을 먹고 있으면 지나가던 녀석들이 꼭 한마디씩 했다.

“오, 웬일이냐. 우우가 혼자 밥 먹네?”


철우를 처음 봤던 순간이 떠올랐다.

10분 휴식 시간이었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지만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라이터가 없나 싶었다. 그런데 한참을 그러고 있더니, 그냥 담뱃갑에 다시 밀어 넣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민우가 물었다.

“왜, 안 피냐?”

철우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왜, 피냐?”

말문이 막힌 쪽은 민우였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철우가 쓱 웃으며 덧붙였다.

“훈련소 나갈 때까지 한 대도 안 필 거다.”

그는 바지를 탁탁 털고 일어섰다.

그 등을 보며 민우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저 녀석이랑은, 오래 갈지도 모르겠다고.


언젠가 철우가 먼저 물은 적이 있었다.

“너는 형제가 있냐?”

“아니. 엄마랑 나랑 단둘이야.”

잠시 말이 없던 철우가 낮게 말했다.

“너도 생각이 많겠구나.”

‘너도’라는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었다. 그 한 단어면 충분했다.


철우는 가끔 동생 이야기를 했다.

말끝이 조금씩 부드러워지는 걸 보면, 얼마나 아끼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특히 동생이 했다는 말을 전할 때면 그랬다.

“오빠는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졸업이나 해. 오빠 취직하면 그때부터는 나도 내가 알아서 살아갈게.”

거기까지 말하고는 잠시 말을 멈췄다. 목이 잠긴 듯 숨을 한 번 고르더니, 괜히 헛웃음을 흘렸다.

“아… 그 생각하면 눈물 나네. 그만하자.”

철우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훈련 막바지에는 30km 완전군장 야간 행군이 있었다. 그날, 철우가 발을 헛디뎌 발목을 삐었다. 민우는 말없이 그의 군장을 대신 짊어졌다. 절뚝거리며 뒤따르던 철우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미안하다.”

“괜찮아. 나중에 내가 힘들 때 네가 도와주면 되잖아.”

철우는 어금니를 꽉 물고, 민우의 어깨를 세게 움켜잡았다.

칠흑 같은 밤이었다.

철모와 소총이 덜그럭거렸고, 군화 소리가 요란했다. 손전등 불빛이 어둠 속에서 흩어졌다.

철우는 퇴소하는 날까지 결국 담배에 불을 붙이지 않았다.




민우는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길게 울렸다.

뚜르르— 뚜르르— 한참 만에야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이철우입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민우는 괜히 숨을 고쳐 들이켰다.

“철우. 오랜만이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어…! 우우냐?”

민우가 웃었다.

“그래. 우우다.”

“야, 이게 얼마 만이냐. 잘 지냈어?”

한참을 통화했다.


철우는 복학 신청을 마쳤다고 했다.

“이번엔 꼭 다녀야지. 그리고 빨리 졸업해야지” 하고 웃었다.

민우도 복학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등록이 될지 모르겠다. 학자금 대출 안 나오면 좀 힘들 것 같아서.”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철우가 덧붙였다.

“또, 동생이 학비를 내줬다.”

그리고 낮게 웃었다.

“미안해서 미치겠다. 빨리 돈 벌어서 다 갚아줘야지.”

깊은 한숨이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왔다.

“암튼, 조만간 만나서 밥이나 먹자.”

그렇게 통화를 마쳤다. 거리가 멀다는 건 핑계였다.

당분간은, 서로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만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선미를 만났다는 말은 끝내 꺼내지 못했다.


민우의 어머니는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직장을 그만두었다. 반쯤은 자신의 선택이었고, 반쯤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학자금 대출도 반려되었다. 연락조차 닿지 않는 아버지 명의의 재산이 많다는 이유였다. 결국 민우는 복학 신청을 포기했다.

“그래도 모아둔 돈이 조금 있으니, 그걸로 일단 복학은 해라.”

어머니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민우는 고개를 저었다.

“당장 생활비랑 병원비는 있어야지.”

그의 통장에는 군에서 모은 백만 원 남짓이 전부였다.

그는 그길로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알바 앱을 설치한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아 시내 편의점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밤 9시부터 아침 9시까지, 매일 근무였다. 넉 달만 버티면 1년 치 학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처음 며칠은 정신이 없었다. 물건 위치를 외우고, 진열을 정리하고, 계산대를 익히는 일들.

예전에 친구 대신 잠깐씩 아르바이트를 해본 적이 있어 적응은 빨랐다.

문제는 새벽 2시 전까지였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 때면 계산대 앞이 금세 뒤엉켰다.

진땀이 났다.

새벽 4시에서 6시 사이는 비교적 조용했다. 진열만 마쳐 두면 잠깐씩 책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아직 2시도 되지 않았는데 매장이 일찍부터 한산해졌다.


딸랑.

문이 열리며 웃음소리가 먼저 들어왔다.


술기운이 오른 여자 둘이 깔깔거리며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냉장고 앞에 서서 한참 음료를 고르더니, 계산대로 다가왔다.

그중 한 여자가 계산하려다 말고 민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갑자기 손뼉을 쳤다.

“어! 선배. 이게 얼마 만이에요!”


민우는 당황하며 들고 있던 책을 황급히 덮었다. 2년 전, 교양과목을 같이 수강했던 후배였다.

“어. 경하구나! 오랜만이다.”

“와, 선배. 진짜 반갑네요. 보고 싶었는데. 군대 갔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근데 저한테는 말도 없이 가서 진짜 섭섭했어요.”

경하가 눈을 흘겼다.

“그랬구나. 미안하다. 그냥 조용히 다녀오려고 했지.”

민우가 손바닥을 비비며 얼버무리고 있을 때, 함께 있던 여자가 짓궂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야, 경하야. 이분이 네가 가끔 얘기하던 그 선배야? 네가 좋아한다던 그 선배?”

깔깔 웃으며 경하의 등을 때렸다. 경하가 잠시 정색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맞아. 내가 선배를 좋아했던 거… 알긴 알아요?”

경하가 민우에게 턱을 들이밀며 물었다.

달짝지근한 술 냄새와 우아한 향수 내음이 한꺼번에 풍겨왔다. 놀란 민우가 머리를 뒤로 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어. 그… 그랬니…”

민우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옆에 있던 친구가 다시 깔깔거리며 경하의 팔을 잡아끌었다.

“가자. 차 왔다”
둘은 웃으며 매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민우가 밖을 내다보았다.

편의점 앞에 검은 승용차 한 대가 비상등을 켜고 서 있었다. 검은 양복 차림의 남자가 뒷문을 열어주었다. 경하는 친구를 먼저 태우고 잠시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차 문이 닫히자, 남자는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곧이어 차가 조용히 출발했다. 경하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편의점 쪽을 바라보았다.

민우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이내 시선을 거두고, 도로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민우는 1학년 때를 떠올렸다. 한 학기만 다니고 휴학했을 무렵이었다.

집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압류 통지서가 날아왔고, 살림살이에는 빨간딱지가 붙었다.

1년째 연락이 없던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는 받지 않았고, 문자에도 답이 없었다.

결국 민우와 어머니는 옷가지 몇 벌만 챙겨 나왔다. 월세방을 구했다. 며칠 동안은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래도 아버지는 연락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는 집에 거의 없었다. 필요할 때만 잠시 들렀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 무렵부터 어머니의 말수는 눈에 띄게 줄었다. 속이 쓰리다며 밤마다 약을 찾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더 이상 빚이 없다는 점이었다. 어머니는 아파트 관리소 경리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생활은 늘 힘들었다.


6개월 뒤 복학해 교양 수업에서 경하를 만났다. 신입생들 사이에서 경하는 이미 유명했다. 옷을 잘 입고 세련된 데다. 성격까지 활발했다. 게다가 씀씀이도 넉넉해 모든 남학생이 선망하는 대상이었다. 민우는 경하를 볼 때마다 묘하게 현실감이 없다고 느꼈다. 같은 공간에 앉아 있으면서도, 어딘가 다른 계절에 서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몇 번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마주 앉아 웃고,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그 시간은 민우에게 이상하리만치 흔적이 남지 않았다.

그 경하가 자신을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학교 선후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여겼다.


경하가 다시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왔다.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초밥 도시락을 계산대 위에 내려놓았다.

“선배, 이거 드시면서 일하세요. 이번 학기 복학하시면 꼭 연락해 주세요. 오늘은 너무 늦어서 먼저 들어갈게요.”

손을 가볍게 흔들고 돌아섰다.


유리창 너머로 양복을 입은 남자가 차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




작가의 이전글[소설] 퇴근길, 현관 앞 (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