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퇴근길, 현관 앞 (09)

유리 위의 만찬

by JUNI KANG


선미와 민우는 경하가 보내준 세단을 타고 가기로 했다. 선미는 자신이 가진 옷 중에서 가장 비싼 옷을 입었다. 민우도 오늘만큼은 재킷을 입었다. 선미를 본 민우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와, 선미 진짜 예쁘다.”

“오빠도 오늘 너무 멋져요.”

도서관에 가던 선미의 후배들이 이 모습을 보고는, 둘이 너무 잘 어울린다며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하지만 민우와 선미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이내 조용해졌다. 사실 민우는 약속 장소가 어디인지도 모른다. 검은 양복이 데려다주면 그저 그곳으로 갈 뿐이었다.


자동차는 시내의 한 빌딩 지하로 들어갔다. 민우와 선미는 검은 양복의 안내를 받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가 전용 카드를 대고 45층을 누른 뒤, 정중히 인사를 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내리시면 안내해 드릴 겁니다.”

엘리베이터는 쏜살같이 올라 45층에 도착했고, 맑은 벨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 앞의 여직원이 인사를 했다. 직원을 따라 들어간 곳은 전면이 유리로 되어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은은한 조명이 실내를 가득 채우는 거대한 연회장이었다.

홀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에는 좌석이 6개 준비되어 있었고 한쪽에 정장 차림의 남자 한 명이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 발소리를 들은 남자가 벌떡 일어서며 민우 쪽으로 돌아섰다. 순간, 선미와 민우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어!”


철우였다. 놀란 철우가 먼저 물었다.

“너희들이 여긴….”

“아니, 네가 여기에 어떻게?”

셋은 서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서 있었다.

옆에 있던 여직원이 자리를 안내했다. 우선 민우를 가운데 앉히고 민우의 왼쪽에 선미를, 오른쪽에는 철우를 앉혔다.


자리에는 이미 만찬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와인, 과일, 그리고 고급스러운 식기들. 번쩍이는 포크와 나이프, 새하얀 냅킨 등이 식탁 위에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선미는 생전 처음 보는 낯선 풍경에 벌써 주눅이 들어 있었다. 민우는 머릿속이 복잡해지며 입술이 바짝 말랐다. 앞에 놓인 물잔을 들었다.

그때, 부드럽고 서정적인 클래식 음악이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침묵을 깨고 철우가 민우를 보며 말했다.

“어찌 된 일이냐?”

“후배가 좀 보자고 해서….”

“후배?”

“응. 주경하라고.”

“아! KABEST 부회장님 따님.”

“뭐, 그럴 거야. 암튼.”

“그분이 너를 보자고 했다고? 후배라고?”


음악 소리가 사그라지면서 반대쪽 문이 열렸다. 경하가 검정 재킷을 입고 웃으면서 또박또박 걸어 들어왔다.

세 사람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후, 민우와 마주 보는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한 사람씩 눈을 맞추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주경하라고 합니다.”

민우는 경하의 생소한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평소 알던 경하가 아니었다. 세련되고 품위 있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경하가 물티슈로 손을 닦으면서 가볍게 말했다.

“제가 좀 늦을 것 같아서 음악 좀 틀어 드리라고 했어요. 제가 영국에서 자주 듣는 음악이거든요. 선배, 이 음악 아시죠?”

“아니, 한두 번 들어본 거 같긴 한데, 잘 몰라.”

민우가 겸연쩍게 웃었다.

“이런, 저만 좋아하는 구요. 다음에는 좋아하시는 음악을 틀어 드리라고 해야겠네요. 하하.”


직원들이 들어와 와인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경하가 선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그리고 민우 선배랑 너무 잘 어울리세요.”

선미가 대답하지 못하고 그냥 웃으면서 고개만 숙였다.

“선미 씨라고 하셨지요? 저랑 동갑이라고 들었어요. 앞으로 좋은 친구가 되도록 노력해 볼게요.”

경하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곤 활짝 웃었다. 선미는 고개를 숙이며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경하는 철우를 바라보았다. 긴장한 철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철우 씨. 선배 친구분이시고, 선미 씨 친오빠 되시고.”

“네. 그렇습니다.”

철우가 긴장한 듯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선미가 웃었다.

“오늘은 편하게 한 잔 드세요. 민우 선배 친구분이라고 해서 한번 뵙고 싶었어요.”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 하나 없이 조용하게 식탁이 채워져 갔다. 경하가 잔을 들었다.

“자, 다들 한잔하시죠. 우리 선배와 선미 씨의 앞날을 위해서, 그리고 이철우 씨의 건승을 위하여!”

다들 잔을 비웠다. 식사가 이어지면서 술이 여러 잔 비워졌다. 경하가 주로 영국 이야기를 했고, 다들 웃으며 들었다. 이따금 민우가 이것저것 묻기도 했다. 경하가 웃으며 민우에게 되물었다.

“선배는 학교에서는 나한테 궁금한 거 하나도 없다고 하더니, 오늘은 궁금한 게 있나 봐요?”

민우와 경하만 웃었다.


“철우 씨는 일 잘하신다는 얘기 들었어요. 혹시 회사 생활에 뭐 불편하신 건 없나요?”

“네. 지금은 불편한 거 없이 일 잘하고 있습니다.”

“팀원들 다 좋지요?”

“네. 그렇습니다.”

“다행입니다.”


이번에는 선미에게 화제가 돌아갔다.

“선미 씨는 디자인 실력이 뛰어나다고 들었어요. 저도 선미 씨가 디자인한 가방 봤어요. 정말 매력적이던데요. 그래서 제가 B 백화점 브랜드 팀장에게 선미 씨를 만나보라고 했어요. 좋은 기회니까 한번 만나보세요.”

예상치 못한 발언에 세 사람 모두 눈이 커졌다. 선미는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평소 자신이 만든 가방이 백화점에 놓여 있는 꿈을 수도 없이 꾸었다. 그중에서도 그녀가 늘 꿈꾸던 B 백화점을 경하가 언급한 것이다. 세 사람 모두 유리병처럼 속이 훤히 드러난 기분이었다. 사방이 트여 있는데도 한발도 움직일 수 없는 기묘한 무력감이 그들을 덮쳤다.


민우는 술을 마실수록 정신이 또렷해지고 있었다. 철우는 회사 내에 막강한 배경이 생긴 듯해서 조금은 든든해졌고, 선미는 뭔지 모를 꿈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민우는 경하가 보이는 관심과 배려가 마땅치가 않았다. 마치 일기장을 들켜 사생활이 낱낱이 파헤쳐진 듯한 기분이었다.


잔에 있는 술을 한 번에 다 들이마신 민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나에게 경호원을 붙인 이유가 뭐야?”

목소리는 낮았지만, 불쾌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뒤에 서 있던 직원이 조용히 다가와 민우의 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민우는 그마저도 슬쩍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경하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손짓으로 직원을 불렀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뭔가를 지시했다. 순간 고개를 숙이고 돌아선 직원의 손짓에 따라 실내에 있던 직원들이 모두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잠시의 정적을 채우듯 경하가 천천히 와인을 한 잔 다 비우고 나서 스스로 잔을 채웠다. 선미는 그 모습이 너무 우아해 보였다.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아. 그건 선배한테 사과드릴게요. 미리 말씀을 드려야 했는데.”

잠시 포크를 들어 샐러드를 뒤적이던 경하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천장을 올려 보았다. 희고 긴 목선이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본 선미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잔을 들었다. 이번에는 선미가 천천히 잔을 비웠다.


그 모습을 보던 경하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KABEST 그룹의 총괄회장님은 저의 할아버지예요. 부회장님은 우리 아빠고요. 엄마는 B 백화점을 계열사로 갖고 있는 B 그룹의 부회장이에요.”

철우의 뺨에 땀이 흘러내렸다. 선미는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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