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치미

엄마의 김치를 지켜라.

by 밤하늘에 펄

졸음이 솔솔 오는 나른한 주말 오후였다.

남편도 아기도 봉이도 잠 기운에 빠져 적당히 헤롱 대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날은 바람이 좋아 현관문도 열어놓았고 좋아하는 노래도 작게 틀어 듣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거실 소파에 있던 신랑이 별안간

“엄마????” 하고 말했다.

방에서 아기를 재우며 누워있다 놀란 봉이가 밖으로 나와 보았고 어스름한 현관 모기장 앞에 사람 형상을 확인했다.

시부모님이었다.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세요?”

“하하! 서프라이즈야!”

“우리 손자 보고 싶어서 왔지”

너무나 해맑게 들이닥친 두 분을 보며 당황할 새도 없이 봉이는 얼른 레이더 눈을 돌려 먹다 남은 음식이나 씻지 않은 그릇은 없는지 부엌을 체크했다.

그리고 어질러진 거실을 빠르게 치워 좁은 집에 앉을자리를 빨리 만들어야 했다.

“우리 아기는?”

“네. 지금 자고 있어요. 근데 잠든 지 얼마 안 됐어요”

“잔다고? 엥… 얼굴 보러 왔는데...”

잠시 실망감을 비춘 시아버지의 얼굴에 남편이 불편함을 느꼈는지 깨워볼까를 시전 했다.

선잠 때문인지 아니면 어른들의 말소리가 시끄러웠는지 금방 아기가 울었고 그는 얼른 방에서 아들을 안고 나왔다.


“내가 요즘 손자 생각만 난다.”

“아버지가 맨날 보고 싶다고 노래를 하시잖니.”

‘지난주에도 찾아뵌 거 같은데,,,’

결혼 후 한 달에 두세 번은 방문하는 시가였다.

“식사는 하셨어요? 저녁은 어떻게…”

“우리 점심 늦게 먹어서 생각 없어.

조금만 앉아 있다 갈 거야.”

봉이는 연락 없이 시부모님의 방문도 황당했지만 이런 상황에 한마디 불편함을 드러내는 멘트도 없이 자연스레 넘어가는 남편의 대처에 언짢았다.

하지만 부모님을 보고 좋아하는 티를 만연히 내는 남편의 얼굴을 보니 지금에선 그냥 함께 장단을 맞춰줘야겠다 싶었다. 조금만 있다 가신다 했으니..


“뭐 먹는 건 잘해 먹지?”

“네. 친정엄마가 반찬 자주 갖다 주세요.”

과일을 꺼내려 냉장고를 여는 봉이의 어깨너머로 시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저 큰 통은 뭐야?”

“엄마가 주신 동치미예요.”

“그래? 애미야. 네 시아버지가 동치미 엄청 좋아하시거든. 너희 회사 다니느라 집에서 밥도 잘 안 먹잖아. 근데 양이 좀 많은 거 같은데?”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았다.

하지만 봉이의 최대 단점.

알아도 모른척하는 능청의 짬바가 아직은 참 부족했다. 잠깐 동안의 껄끄러운 공기와 어색함을 견디질 못해 시어머니 그녀가 원하는 걸 바로 캐치하고 말해버렸다.

“좀.. 가져가실래요?”

“그래? 그래도 괜찮지?”

기다렸다는 듯 신이 나서 부엌장 속 알맞은 찬통을 찾는 그녀를 봉이는 결국 돕는 척해야 했다.

먹든 먹지 않든 내 동치미인데.. 하지만 언제나 답은 정해져 있지.

국물이라도 떠먹어봤음 조금 덜 아쉬웠으려나.

예고 없는 방문도 모자라 상실을 가득 안은 주말이었다.




밍구스러운 냉장고 오픈식과 동치미 이별 콜라보가 더 기억되는 그날.

누구는 시어머님의 적지 않은 반찬 공세에 불편함을 느낀다고 하던데 그 일방적인 기부를 나도 한 번쯤은 받아보고 싶었다.


한참 지나서야 내 이야기를 들은 친정엄마는

“주게 되면 그냥 줘.

딸은 엄마가 맛있는 거 또 해줄게.”

쿨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그날부로 우리 집 냉장고 경계선은 허물어졌기에 난 친정엄마께 얻은 반찬들을 바로바로 소진했고 말릴 수 없는 시어머니는 수확 없이 돌아가시곤 했다.

뭘 몰라도 한 참 모르고 결혼한 나는 처음부터 마음에 벽을 쌓을 생각은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지금까지 견고하게 벽돌을 쌓아주신 건 오히려 시부모님이셨고 지금도 열심히 미장질을 하고 계시다.


아직까지 건강한 삶이 있어 손주들과 가족들을 위해 요리함에 감사하다는 엄마.

작정하고 반찬 하나 만들래도 시간과 정성이 전부인 것을.. 결혼 후 뼈 저리 알아버린 딸은 또 한 번 엄마의 사랑을 곱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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