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 연기 주제로 박하사탕의 한 대사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대사가 가지고 있는 무게감을 알기 위해 아주 오랜만에 다시 박하사탕을 시청했다. 언제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아 무슨 내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냥 재미있었다는 기억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내용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에게는 그런 느낌의 영화가 여러 편 있지만 책도 여러 권 된다. 공교롭게도 이번에 다시 읽기 시작한 책이 양귀자 선생님의 '모순'인데 이 책도 그렇다. 분명 아주 재밌게 읽었던 기억은 있는데 책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반 정도 읽었을 때 주인공 이름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책 내용은 여전히 새롭다. 마치 처음 보는 책처럼 뒤의 내용들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화 '박하사탕'을 본 지가, 책 '모순'을 읽은 지가 대략 언제쯤이었을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족히 10년은 훨씬 지났을 것이다. 그럼 그렇게 재밌게 보고 읽었던 것들이 도대체 왜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
내가 이번에 박하사탕을 보고 나서 든 생각은, 10여 년 전의 내가 과연 이 영화를 온전히 이해했을까. 아니. 분명 와닿는 무언가는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 나름대로의 해석도 있었으리라. 그런데 지금. 오늘. 분명 난 원숙하지도 성숙하지도 않은 여전히 미완전적인 존재임에는 분명하나 40을 눈앞에 둔 오늘의 나에게 영화 박하사탕은 분명 예전의 그것과는 또 다른 묵직함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다시 10년 혹은 20년이 지난 후에 내가 이 영화의 내용에 대해서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할까? 글쎄. 난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우선 제목만으로 대충은 무슨 내용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안다. 영화 박하사탕의 제목 박하사탕이 인간의 순수성을 의미한다는 것을. 그럼 그때는 몰랐을까. 음. 그보다 제목에 대해서 궁금해하기는 했을까. 그때의 나 역시 분명 인간의 인생과 시간, 철학에 대해 많은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음은 알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를 곱씹고 음미하고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그 무게감을 온전하게 느낄 만큼의 내 몸의 내구성을 지니고 있었을까.
슬픔과 분노 혹은 깊은 감동을 오롯이 느끼기에는 그만큼의 체력과 멘탈이 필요하다. 그 무게감이 너무나도 엄청나서 그것을 견디기 위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만큼의 내구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박하사탕을 시청한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 나 자신이 이 영화에 대해서 예전보다 조금은 더 받아들일 만큼의 내구력이 생겼을까.
영화는 주연배우 설경구 님이 '나 돌아갈래!'하고 외치며 과거로, 가장 가까운 과거부터 돌아가는 식으로 흘러간다. 실제 촬영도 영화의 흐름과 똑같이 가장 최근의 과거부터 촬영했다고 한다. 감독이 배우와 관객이 같은 호흡으로 달려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였다고 한 것 같다.
첫 씬에서 주인공 영호(설경구 님)는 아주 거친 캐릭터로 나온다. 모든 행동이 매우 거칠다. 너무 거칠어서 상당한 거부감마저 느끼게 한다. 2025년을 살아가고 있는 내가 보기에는 정말 혐오감이 드는 캐릭터였다. 저런 사람이 주위에 있었다면 절대 상대하고 싶지 않은 부류의 인간이었다. '어떻게 저따위로 행동하지? 그냥 쳐다보기도 싫어.' 그런 느낌이었다. 나아가 설경구 배우가 실제로도 저렇게 못돼먹고 막무가내 거친 사람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며 영호의 과거들이 하나하나 들춰지면서 주인공 영호가 처음부터 그렇게 깡패같이 거친 사람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영호 역시 시대의 폭력 속에 희생된 희생물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더 순수하고 너무 깨끗했기 때문에 모순된 폭력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그럼에도 살아남아야 했기에 더 처절하고 더 허무할 정도로 쉽게, 검게 물들어 버린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 영호가 그렇게까지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 정도로 괴로워했을까. 괴로움이라는 것도 순수한 양심을 가진 존재의 특권이다. 뼛속까지 계산적인 속물들은 이러한 괴로움을 느낄 수 없다. 그들은 때가 탄다는 것은, 검게 물들다는 것은 이 세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성숙한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치부하며 그렇지 못한 이들을 아직 철이 들지 않은 병신으로 취급해 버리곤 한다. 그리고 그렇게 온갖 구정물을 뒤집어쓴 채 풍겨대는 악취와 추악함에 익숙해져 후각마저 마비된 듯하다. 순수한 영혼의 울부짖음 마저 비웃는다. 아직도 어린애 같다며.
영호의 분노는 그것과 맞닿아 있는 기분이었다. 주위 누구도 영호의 울부짖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 영호를 이해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자신이 너무 나약하여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두 발을 딛고 서 있을 힘조차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 같다. 낭만을, 순수한 사랑을 쫓는 것은 어린아이들만 하는 '짓거리'로 느껴진다. 이미 너무 많은 길을 와버린 영호에게 더 이상 그를 위로하거나 이해해 줄 수 있는 존재 따위는 없다. 주위는 온통 구정 물통이다. 영호의 순수성의 상징이었던 순임(문소리 님) 마저 죽음을 앞둔 채 혼수상태로 병상에 누워있다. 영호는 그저 과거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대한 분노, 절규.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영호의 절규가 더 절절하게 느껴진다. 왜 저렇게까지 소리를 질러대나 했던 그 대사가 이제는 내 마음속 근질 거리는 분노의 두드러기를 시원하게 벅벅 긁어주는 느낌이다. 마치 '나 다시 돌아갈래!'가 아니라 '야 이 개 위선자 씨발새끼들아! 이 족 같은 세상아!'라고 시원하게 외쳐대는 기분이다. 그리고 그런 영호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토록 당했으면서도 그토록 세상에 쓴맛을 온몸으로 뒤집어썼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여전히 저렇게 분노할 수 있는 절규가 존재할 수 있음에 그런 순수성이 여전히 아니 더 강하게 꿈틀대고 있음에 그 캐릭터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마치 흰 조약돌을 아무리 깊은 구정물 속에 집어넣어도 물들지 않는 것처럼 세상에 모진 비바람 다 맞아도 비록 그 알맹이가 깎아져 나갈지언정 그 속살을 검게 물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영호는 애초에 속살까지 온통 하얀 박하사탕으로 태어난 존재인지 모른다. 그 존재는 세상의 폭력에 물들어 가장 잔인한 존재로 변질된 듯 보였지만 끝내 그를 검게 물들이지 못한 것이다. 결국 그는 그 어둠이 끝내 자신을 잠식 시 키지 못할 것임을 알고 죽음을 택한 것이다. 어둠은 영호를 잠식시킬 수 없었으나 세상은 새하얀 박하사탕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기에 그는 죽음을 택한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박하사탕이었던 것이다.
아직 영호가 순수성을 잃지 않은 것은 1979년도까지였다. 그러나 1980년대, 90년대 군대를 다녀오고 사회생활을 해나갔던 그 20년의 세월이 그를 잔인한 인간으로 변질시켰다. 그는 선택해야만 했다. 살아남을 것인지 죽을 것인지. 그리고 계속해서 살아가기를 선택한다면 그는 변해야만 했다. 너무 깨끗한 것은 살아남을 수 없기에 자신을 더럽혀야만 했다. 그리고 그 변질을 부정해야만 했다.
만약 영호가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나의 아버지 나이쯤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난 지금의 아버지를 바라본다.
현재의 잣대로 아버지에 대해 생각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2025년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서사 그 자체이다. 지금의 아버지가 만들어지기 까지는 60여 년의 세월이 그와 함께 한 것이다. 아버지는 종종 인생에 회환이 몰려오곤 한다는 말씀을 하신다. 그리고 종종 지독한 악몽에 시달리며 잠에서 깨어나시기도 한다.
난 종종 죄를 짓고도 후회하지 않는 인간들을 본다. 그런 인간들은 꽤나 잘 살아가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정직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과연 정답인가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따금씩 그들이 후회해야 할 때 후회하지 않고, 아프고 고통스러워야 할 때 그러지 않는 모습을 보며 깊은 혐오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때마다 어떤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 만족할 만한 결과를 만드는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렇게 짐승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는 뼈저린 다짐을 한다.
완벽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느껴야 할 최소한의 양심까지 저버리며 살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얻어야 할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나 역시 많은 과오를 저지르며 살아왔고 후회할 만한 일도 많이 했기에 가끔 예전을 생각하면 괴롭고 힘들기도 하다. 그러나 과오가 고통스럽다고 정당화시키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그런대로 내 삶의 일부이고 내가 계속해서 그 고통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 내가 아직 양심을 버리지 않았다는 최후의 보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느덧 나도 내가 어릴 적 기억하던 아버지 나이가 되었다. 브래드 피트 주연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대사가 생각난다. '우리는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할 순 없어도 온전히 사랑할 수는 있다'. 박하사탕에서의 영호가 했던 잔인성과 폭력성에 대해서 옹호하거나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폭력은 절대 악이다. 그러나 인간이 한없이 나약한 존재라는 것 또한 백 번, 천 번 공감한다. 우리는 언제라도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다만 그런 과오를 저지르고 그토록 심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영호를 보며 희망을 엿보기도 한다. 변화는 언제나 우리가 가장 힘들어할 때, 고통 속에서 몸부림칠 때 찾아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 굴복해서는 안 된다. 외면해서도 안된다. 정당화해서도 안된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 고통과 마주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최소한의 양심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 그것이 우리를 가장 인간답게 만든다.
오늘도 말없이 사라져 가는 세상에 수많은 박하사탕들에게 깊은 애도의 마음을 전한다. 부디 당신이 간 그곳 하늘나라에서만큼은 마음껏 순수하고 마음껏 행복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