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존적 유대감에 대한 고찰

by 이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는 공동체 사회이다. 그리고 공동체 사회에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유대적 연대감을 가져야만 한다. 거창하게 들릴 수 있는 이 말은 당연한 말이다. 간단한 예로 법이라는 것이 그렇다. 법은 정형화된 관념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유대적 연대감을 나타내는 가장 표상적인 논리이자 약속이다. 한 집단 안에서 살아가는 개개인 모두는 이 법률을 지키겠다는 암묵적 동의 아래 집단을 이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은연중에 그 약속들은 우리들에게 유대적 연대감을 형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세세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다른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거시적으로 봤을 때 한 사회, 한 국가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에는 법질서로 인해 잉태되는 거대한 유대적 연대감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 누구든지 그 최소한의 연대감을 갖지 못한 채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사회는 그런 사람에게 조직과 국가가 창조하고 있는 문명의 이기를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건강한 사회이다. 그런데 이러한 유대적 연대감이 작은 집단으로 축소될수록 이야기는 계속해서 복잡해진다. 거대한 사회 안에서는 법과 규정이라는 것이 최소한의 것만 규정짓고 있기 때문에 허용될 수 있는 개인적 자유의 범위가 비교적 넓지만 집단과 조직의 규모가 작을수록 그 규율의 밀도가 높아지며 개인적 자유의 한계 역시 점점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그런 사회는 질서와 규범이 잘 갖춰져 있어서 다른 더 커다란 조직에 비해서 안전하고 안정적일 수는 있지만 혁신과 창의가 창출되는데 좋은 환경이 되기는 어렵다. 이처럼 유대적 연대감이라는 거대한 이념은 양날의 검과 같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점을 잘 활용해야 한다.

문제는 의존적 유대감이다. 일반적 법률이 너무 과도하게 인간의 보편적 생활 역영까지 통제하고 있다면 개혁과 혁신을 통해 변모할 수 있지만 의존적 유대감이라는 것은 그 성질이 훨씬 더 복잡하게 얽히고설켜있다. 이것은 마치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고 있는 관계와도 같다. 만약 두 사람이 존재하고 서로의 결핍이 다르다면 그 서로가 서로에게 부족한 결핍을 채워주는 관계와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때에 따라서 이상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실제로 경우에 따라서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아니, 오히려 좋은 관계인 경우가 매우 많다. 하지만 이 역시 문제는 존재한다.

문제는 결핍이라는 것이 누군가에게서 채워지는 방법으로는 결코 종국적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결국 결핍은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스스로 극복해 나가야 하는 것인데 누군가에게 의존하며 그 사람의 존재로 의해 그것을 보완하고 있다면 그 말은 결국 그 상대방의 부존재는 자신의 결핍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의존적 유대감의 성향을 지닌 존재들은 끊임없이 그 의존적 대상을 찾아다니며 그 부재를 견디지 못하는 양상을 띈다. 물론 인간이란 원래 외로운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고 우리는 분명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의존하며 살아간다. 이건 너무나도 현저한 사실이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현대사회의 모든 이기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다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그러한 기본적 의지와 의존을 넘어서서 개인적인 정신적 세계가 전혀 독립되어 있지 못하고 서로의 결핍에 얽히고설켜 서로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매우 복잡 미묘한 관계들에 관한 이야기다. 이런 관계는 건강하지 못하며 마치 서로의 영혼과 피를 좀먹는 관계와도 같으며 사회적으로도 집단 이기주의의 성향을 띤다. 이러한 관계들은 서로의 존재가 서로를 지탱하는 힘이기 때문에 강력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만큼 아주 보잘것없이 작은 일에도 충분히 와해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런 결핍을 채울 수 있는 대상을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대상이 존재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교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집단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다. 이들은 서로가 서로의 양식이 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다른 집단에게 상당히 배타적이다. 자신의 무리 속에 속하지 않는 존재들을 경계하고 만약 그들이 자신들의 집단에 어떤 반감을 제기한다면 그 반발심은 굉장히 폭력적인 색채를 띤다. 그렇기 대문에 그들은 마치 악어와 악어새처럼 평생을 서로의 피를 수혈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존재와 집단에서 창의와 혁신을 기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창조와 혁신은 독립적 자아가 지독한 외로움을 이겨내고 홀로 서서 그 본인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예술성이 폭발해져 나올 때 비로소 자아실현이라는 상징적 표어 아래 고개를 들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은 정신적 세계가 타인과 동떨어져 홀로 서 있는 자에게만 허락된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대로 이런 자들은 때로 너무 외롭게 고립되어 살아가기도 하며 평생을 혼자 외롭게 살다가 끝내 자살을 선택하는 예술가나 지도자들도 종종 볼 수 있다. 물론 그런 것은 비단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일만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비율로 보자면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의 자살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의 죽음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저 당연스럽게 생각한다. 반면에 어떤 유명인이나 지도자가 자살을 했다고 하면 그것은 뇌리에 강하게 박혀서 마치 독립적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이 나약함의 표상이고 그것이 끝내 죽음을 부른다는 막연한 논리를 앞세워 자기 위안을 삼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너무 과도하게 극단적인 독립적 자아는 위험하지만 그 정도를 조절할 수 있는 독립적 자아는 그 사람을 사회적으로 성공시켜 줄 뿐만 아니라 사회나 인간관계 또한 훌륭하게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그 비율 안배의 문제이기도 하다.

몇 년 전 세계는 코로나라는 전 세계적 유행병에 몸살을 앓았다. 근 2년 동안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멀리했으며 단절됐다. 지구 상공에 하루에도 수천 번이 넘게 날아다니던 비행기도 거의 자취를 감춰버렸고 모두가 마스크를 착용해야 했기 때문에 서로의 얼굴을, 표정을 볼 수 없어 서로의 감정 또한 쉽사리 느끼지 못했다. 입을 가렸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상대의 눈만을 보고 그 사람의 감정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약간의 기쁨, 약간의 슬픔, 약간의 분노만을 연대할 수 있을 수밖에 없었다. 2년이 지나고 코로나는 잠잠해졌고 토착병이 되었다. 그리고 유행병이 휩쓸고 간 자리에 인류는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살아남은 인류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본의 아니게 지속된 거리 두기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우리에게는 어느덧 약간에 벽이 생긴 듯하다. 이제 사람들은 예전만큼 붙어 있지 않는다. 혼자 밥을 먹는 사람들, 혼자 여행을 가는 사람들,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출산율을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이제는 향후 몇백 년 후 국가의 존폐까지 걱정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우리는 이성적으로 고민해 봐야 한다. 막연히 현재의 이 사태를 모면하기 위해 과거로 회귀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현재 적정한 거리를 둔 채 유지할 수 있는, 건강한 인간관계가 영위되는 보다 발전된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 속에 놓여있다는 것을 인지할 것인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지속 가능한 건강한 사랑에는 존중과 거리가 필요하다. 외로움과 고독이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혼자 이겨내야 할 부분은 반드시 혼자 이겨내야만 한다. 그것이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믿어야 한다. 내 안에는 내가 상상할 수도 없이 강한 힘이, 그 두려움을 이겨낼 만한 힘이 있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그 강력한 힘이 발휘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노력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렇게 배양된 그 강력한 힘이 창조와 혁신의 길로 인도할 것이며 인류에 지대한 안락과 번영을 끌고 올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독립적 자아를 통해 이룩한, 창조와 혁신을 기반으로 한 적절한 거리 두기의 인간관계는 우리를 훨씬 더 단단하고 장엄한 사랑의 유대감으로 결속시킬 것이다. 그 막대한 안정감과 사랑이 우리가, 이 우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처럼 느껴질 수 있는 거대한 사랑의 유대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박하사탕(영화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