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나의 영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nseo Dec 19. 2016

라라랜드 - 꿈을 좇는 청춘에게 바치는 찬가

La La Land, 2016

*이 글은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청춘은 꿈을 꾼다. 한 번 두 번 연거푸 좌절해도 꿈을 꾸기에 청춘이라 할 수 있다. 영화 '라라랜드'에는 두 명의 청춘이 등장한다. 배우 지망생인 미아(엠마 스톤)와 재즈 피아노 연주자인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이 그들이다.


그들은 가망 없어 보이는 꿈을 꾼다. 미아는 오디션에서 셀 수 없이 떨어지고, 진짜 재즈를 연주하고픈 세바스찬은 레스토랑 주인(J. K. 시몬스)의 요청대로 징글벨이나 연주해야 하는 신세다. 내 꿈의 주인은 바로 나고, 이 셋리스트는 주인의 선곡을 내가 받아들인 것이라고 주장해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결국 아무도 듣지 않는 배경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일 뿐이며, 카페 근무시간도, 환불에 대한 판단도, 심지어 앞치마를 메는 방식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피고용인일 뿐이다.


청춘은 이렇게 종종, 아니 거의 대부분 피고용 상태에 놓인다. 그리고 그렇게 꿈의 변두리만 서성거리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미아는 워너브라더스 스튜디오 안에 있는 카페에서 일을 한다. 바로 옆에 그토록 선망해온 명작들의 배경이 된 세트장들이 즐비하지만, 그녀는 그 주위를 맴도는 구경꾼일 뿐이다. 세바스찬은 자신의 꿈인 재즈가 명맥이 끊어질 위기에 놓여 있다며 한탄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유서 깊은 재즈클럽이 삼바 음악을 틀고 타파스를 파는 레스토랑이 되는 것을 길 건너편에서 지켜보는 것뿐이다. 노력해봐도 이뤄지지 않는 꿈의 언저리에서 그들은 지쳐간다.


그렇게 그들은 LA, 라라랜드에 산다. 라라랜드는 '꿈의 나라', '(다소 허황된) 환상의 세계'라는 뜻으로 쓰이는 단어인데, 스펠링이 유사해서인지 LA를 비롯한 남부 캘리포니아 자체를 지칭하기도 한다. 영화, 음악, 그리고 할리우드의 도시 LA에서 한 가닥 희망을 좇는 청춘들의 꿈은 곧 '라라랜드'에 사는 이들이 목매는 환상처럼 치부된다. 얼마든지 다른 오디션 참가자나 연주자를 통해 대체될 수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들의 꿈을 화려한 뮤지컬 공연이자 총천연색의 환상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렇게 그들의 꿈을 전폭적으로 응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꽉 막힌 도로 위에서 펼쳐지는 첫 뮤지컬 시퀀스는, 그 자체로 영화의 주제, 내용, 형식 등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라라랜드에 사는 이들은 꽉 막힌 현실에 살고 있지만 이렇게 화려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이 압도적인 장면을 통해, 현실의 LA는 말 그대로 꿈과 환상의 나라, 라라랜드로 치환된다. 영화는 뮤지컬 형식을 통해 현실과 환상을 끊임없이 교차시키며 꿈에 대한 찬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장면들은 대부분 원테이크로 처리되는데(실제 원테이크는 아니고 샷을 이어붙인 롱테이크지만), 이를 통해 관객은 마치 실제 무대 위의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영화 속 하나의 시퀀스가 마치 극의 한 막처럼 제시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영화 현실 속의 장소는 뮤지컬의 무대가 되고, 영화 현실 속의 인물은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된다. 게다가 영화 안에서의 현실과 환상만 교차되는 게 아니라, 영화의 안과 밖도 뒤섞인다. 영화 밖의 관객만 들을 수 있는 배경음악을 영화 속 주인공이 흥얼거리며 그와 그녀가 선 곳들이 무대로 바뀌고 나면, 영화를 보는 관객 역시 그 무대의 관객으로 초대되는 것이다.


핀 조명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조명 효과도 현실의 무대화, 현실과 환상의 치환에 한몫한다. 어쩌면 영화는 이를 통해 우리 모두가 무대 위에 서 있다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힘들고 지치고 타인의 시선은 버겁지만, 꿈을 꾸고 있다면 이미 무대에 오른 것이라고 말이다. 이 공연이 어떻게 끝날지, 관객의 평가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꿈을 꾸는 이상 우리는 모두 미아처럼 각자의 공연을 무대 위에 올린 셈인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극단적인 핀 조명으로 미아만 덩그러니 무대 위에 올려둔 후반부의 오디션 시퀀스였다. 상황 그대로 1인극 무대에 오른 것이나 다름없는 자리에서 미아가 꿈을 좇는 청춘들에게 바치는 찬가는 오래 마음에 남을 명장면이었다.



사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남녀의 이야기가 교차되는 가운데, 그들은 우연히 만나 사랑을 한다. 그리고 서로의 꿈을 응원하던 연인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현실과 타협하게 된다. 꿈을 잃을 위기는 겨우 극복해내지만 꿈을 좇다 보니 그들은 갈림길 앞에 서고 만다. 사랑까지 공존할 수는 없는 꿈이었던 것이다. 현실에서도 능히 있을 법한 평범한 사연이지만, 영화는 영화만이 할 수 있는 방법들로 이를 특별하게 만든다. 단 한 컷도 버릴 것 없이 세심하게 짜인 장면들도 그렇다.


첫 만남 후 파티장에서 재회해 가시 돋친 대화를 나누는 두 남녀는, 서로 다른 프레임에 존재한다. 지금까지 테이크에 인색했던 영화는 말 한 마디마다 컷을 나눈다. 이들은 자기 세계를 침범 당할 생각이 없고 아직 그다지 가깝지도 않다. 야경을 배경으로 탭댄스를 추고 난 신의 마지막에서 남녀는 각자 프레임의 좌우 반대 방향으로 퇴장한다. 다시 만날 약속을 잡고 라이트하우스 카페에서 나온 후 이어지는 롱 샷에서도 남녀는 여전히 반대 방향으로 헤어져 걸어간다. 하지만 낡은 영화관에서 '이유 없는 반항'을 보고(끝까지 보진 못하지만)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후 이어지는 여름의 시간 동안 그들은 늘 한 프레임에서 함께 한다. 물론 현실과 타협한 세바스찬으로 인해 다투게 되는 시퀀스에서 그들은 다시 자신의 프레임 안에 갇히지만, 꿈을 포기할 뻔한 미아를 세바스찬이 설득할 때 카메라는 두 사람 사이를 스위시 팬으로 빠르게 움직이며 이들을 하나의 테이크로 잡아낸다.


이 영화의 모든 장면에서 이런 의도들을 찾을 수 있다. 영화의 플롯은 단순하지만, 이를 표현하는 앵글, 미장센, 편집, 음향 등이 두 사람의 꿈과 사랑에 의미를 부여하며 이야기를 살찌우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때때로 현재가 아니라 1940~50년대를 배경으로 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당시에나 쓰였던 자막 폰트나, 틸트업/다운, 아이리스 인/아웃 같은 장면 전환 기법들은 관객을 당시의 할리우드로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이에 더해, 당시 황금기를 누린 '싱잉 인 더 레인', '탑 햇' 등 고전 뮤지컬 영화에 대한 향수가 고스란히 담긴 장면들을 따라가다 보면, 영화 속 청춘들이 '이유 없는 반항' 속의 젊은이들이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꿈과 사랑의 끝에는 마지막 뮤지컬 시퀀스가 있다. 이전의 환상들이 미래에 이루고 싶은 꿈에 대한 것이었다면, 이 시퀀스에서의 상상은 이제 돌아갈 수 없는, 지나온 과거에 대한 것이다. 도저히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대체하는 환상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이 시퀀스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세바스찬의 회한들로 가득 차 있다. 당신이 내게 처음 말을 걸었을 때, 매몰차게 지나치지 않고 당신에게 키스를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친구의 제안을 무시하고 그 밴드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멀어질 일도 없지 않았을까. 그러면 당신의 연극 공연에도 갈 수 있지 않았을까. 마침내 오디션에 통과한 당신을 따라 파리로 갔더라면, 우리는 지금 한 집에서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았을까.


인생의 갈림길에서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하는 상상은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때론 그 상상이 인생 전체를 요약하기도 한다. 라라랜드는 이 시퀀스를 통해 영화 전체와 두 사람의 인생 전체를 한 곡에 담아 방점을 찍는다. Mia & Sebastian's Theme의 멜로디가 흐르면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서로를 상기하던 연인은, 그렇게 함께일 수 있었던 상상과 함께 짧은 재회를 마친다.


그 멜로디가 흐르면, 아마 관객들 모두 영화 속 장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OST 전체가 그렇게 다 인상적이다. 음악 자체도 좋지만, 스토리와 분위기에 맞춰 적재적소에 쓰였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 음악들과 어우러져 마치 재즈 리듬을 타는 것처럼 유려하게 흘러간다. 그런 의미에서 '라라랜드'는 재즈에 대한 찬가이기도 하다. 마치 세상이 영화와 재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처럼 춤추고 노래하는 시퀀스가 이어진다. (너무 좋은 장면이 많아 시퀀스가 끝날 때마다 일어나 박수를 보내야 할 것 같은 충동이 들 정도였다)



영화 속의 꿈결같은 이야기는 사계절을 지나 5년이라는 긴 시간을 아우르지만, 정말 하룻밤 꿈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누군가는 너무 평범하고 단순한 이야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종종 우리들의 청춘 역시 그렇게 하나의 단어, 한 줄의 문장, 하나의 이미지로 폄하 당하곤 한다. 하지만 청춘이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인가? 그 안에 담겨 있는 총천연색의 감정들은 그렇지 않다고 이 영화는 역설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