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나의 영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nseo Dec 27. 2016

싱 스트리트 - 자기만의 노래를 갖는다는 것

Sing Street, 2016


* 이 글은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에 대한 감상만이 아니라 밴드를 하고 있는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함께 담고 있습니다.




신나고 설레는 마음이 앞서면서도 마음 한편에서 묘한 긴장감과 책임감이 뒤따라오는 것.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거대한 문을 열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나서는 것 같은 기분.


밴드를 시작한다는 건 늘 그런 기분이었던 것 같다. 스무 살 때 처음 밴드를 시작할 때가 그랬고, 처음 노래를 만들 때도 그랬고, 드럼 세트 앞에 일곱 번째 앉아보던 날 클럽 오디션을 봤을 때도 그랬다. 처음 손수 앨범을 만들었을 때가 그랬고, 학업과 생업을 이유로 몇 번씩 그만두었다가 밴드 이름을 바꾸어 다시 시작할 때도 그랬고, 운 좋게 레이블을 만나 EP와 정규앨범을 낼 때도, 더 운 좋게도 GMF 같은 무대에 섰을 때도 그랬다. 꽤 거창하게 시작했지만 사실 그냥 즐겁게 놀아보자고 저지른 일이었고, 재밌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지만 우리 노래를 누군가 귀 기울여 듣는다는 건 또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밴드를 한다는 것, 음악을 만든다는 것은 그런 일이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는 그런 일 말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1980년대 아일랜드의 경제 불황기에 살았던 저 아이들도 그런 일들을 겪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주인공의 부모가 다투는 소리가 들린다. 서로에게 내뱉는 악다구니가 벽을 넘어 들려온다. 주인공은 그 말들을 가사 삼아 노래를 불러본다. 그 순간만큼은 가난도, 가정불화도 잠시 멀어졌을까?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이 음악의 언어로 승화되는 순간, 음악은 유일한 탈출구이자 현실을 극복하는 치료제가 된다. 말하자면, 이 첫 시퀀스가 영화 전체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암담한 현실을 음악으로 이겨내는 주인공의 이야기 말이다.


존 카니 감독의 전작 ‘원스', '비긴 어게인'에서도 정도는 다르지만 비슷한 상황에 처한 주인공들이 등장했다. 거리의 악사이자 청소기 수리공인 ‘원스'의 그가 그랬고, 변심한 연인과 주목받지 못한 노래들만 남은 ‘비긴 어게인’의 그레타가 그랬다. 하지만 ‘싱 스트리트’의 코너에게서는 조금 다른 느낌이 났다.



이 영화의 공기가 감독의 전작이나 여느 음악 영화, 혹은 밴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주인공이 대단한 노래 실력이나 연주 실력을 갖춘 것도, 밴드를 만들겠다고 마음먹기 전까지 어떤 음악을 하겠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철부지라는 점일 것이다.


주인공 코너는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백수 생활을 하는 나라에서, 당장 꿈도 희망도 없이 이혼 위기에 있는 부모와 함께 산다. 여기에 더해 교육비 문제로 전학가게 된 '싱 스트리트 크리스천 브라더스 스쿨'은 딱 봐도 정상이 아닌 곳이다. 학생들은 아무 데서나 담배를 피우고, 교장인 벡스터 수사는 강압과 폭력 그 자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주인공이 딱히 음악을 꿈으로 삼거나 목표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음악을 할 생각이냐고 묻는 에먼에게 코너는 미래지향적인 음악을 할 거라고 얘기한다. 여기서 '미래'란 당시 디페쉬모드와 같은 밴드가 추구했던 무엇이 아니라 당장의 내일, 오늘이 아닌 내일을 의미하는 것이었을 게다. 음악으로 현실을 극복하는 이야기야 많고 많지만, 영화는 이 지점에서 성장에 대해 말할 기회를 얻는다. 음악, 그리고 내일의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소년이 조금씩 성장하는 이야기 말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부분이, 주인공이 밴드를 하겠다고 마음먹는 장면이었다. 말도 안 되는 원칙과 폭력에 시달리고 학교 밖으로 나온 주인공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바로 '첫눈에 반한 여자에게 말 걸기’라니! 그리고 밴드는 그럴듯하게 말을 걸기 위한, 즉흥적인 거짓말이었을 뿐이다. 많은 밴드들이 사실 대부분 그렇게 탄생한다. 거짓말처럼, 농담처럼 말이다. 혈기왕성한 소년소녀들이 모여 만든 스쿨밴드도 그렇지만, 밥벌이를 위해 모인 연주자들도, 취미로 악기나 배워보자 하는 마음으로 들어간 직장인 커버 밴드도, 모두 이런 거짓말 같은 순간을 조금씩은 경험하게 된다.


음악 역시 거짓말처럼 정말 아무것도 없는 데에서 시작되곤 한다. 밴드 '싱 스트리트'의 음악이 그렇듯 말이다. 누군가 첫 소절을 연주하거나 흥얼거리면 다른 누군가가 그 뒤를 따르고 어느 순간 모두에게 불이 붙는다. 그리고는 활활 타오를 때까지 멈출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비긴 어게인'에서 댄의 상상 속에서 이뤄졌던 일들이 싱 스트리트의 소년들의 손끝에서도 실현된다. 내가 15년의 밴드 활동(지금은 무기한 휴지기를 갖고 있지만) 중에 가장 즐거웠던 순간도 바로 그때였다. 처음 듣는 멜로디에 가사가 붙고 그걸 리듬 위에 얹어 각 세션의 마음과 생각까지 더해가는 과정. 밴드는 어마어마한 무대 위도, 휘황찬란한 조명 아래도 아닌, 바로 음악이 만들어지는 그곳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난다.


어쩌면 음악은 어떤 기술이나 능력이 아니라, 인간을 이루는 보다 근원적인 무엇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꿈, 희망, 사랑, 진심 같은 것 말이다. 베이시스트('원스'의 주인공인 글렌 한사드와 '더 프레임스'라는 밴드로 활동)였던 감독은 자신의 학창시절을 바탕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라라랜드'가 영화와 음악의 도시 LA를 비롯한 남부 캘리포니아 지역을 일컫는 말임과 동시에 다소 허황된 환상의 세계, 상상의 나라를 의미하는 것처럼, '싱 스트리트' 역시 더블린에 실재하는 Syngh Street를 발음이 같은 Sing Street로 바꾸어 밴드명으로 삼음으로써 그 희망 없는 공간을 자신들만의 꿈과 환상이 담긴 곳으로 치환해낸다. 이를 통해 감독은 음악이란 자신의 재능이나 처한 환경과 관계없이 꿈만으로도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그래서 코너는 런던에 다녀온 뒤 라피나가 꿈을 잃어버리자 그토록 사랑하는 그녀였음에도 불구하고 단박에 외면해버리기도 한다. 소년이 사랑했던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소녀의 꿈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밴드가 만들어지는 과정, 노래가 만들어지는 과정, 소년이 사랑에 빠지고 꿈을 추구하는 과정은 고스란히 소년의 성장과 연결된다.



더불어, 음악은 현실을 달리 볼 수 있도록 하는 가능성이 되기도 한다. TV에서 듀란듀란의 뮤직비디오가 나오는 순간만큼은 가족들이 모두 그 밴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햇살이 쏟아지는 바다에서 요트를 탄 미남 미녀들을 보며, 각자의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밴드는 반항의 코드임과 동시에, 현실 적응의 기제도 되는 셈이다. 아일랜드의 현실, 싱 스트리트 CBS라는 학교의 현실은 뮤직비디오 안의 세계와 계속 대립한다. 주인공이 하는 작업이란 결국 현실의 원칙을 거스르고, 시궁창 같은 배경에서 그럴듯한 뮤직비디오를 찍는 것, 현실을 꿈꿀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는 것이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실제 현실은 영화 속의 그것처럼 그리 녹록지 않다는 것이다. 갈등과 불화와 가난과 고난은 결코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로 인한 자괴감과 콤플렉스도 절대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 속 현실은 어찌 보면 참 편리하게 지나간다. 가정불화와 훈육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지배하는 학교를 처음 보여주었을 때 관객들이 기대했을 이야기는 이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는 주인공의 현실적 어려움을 충실히 담지 않는다. 가난한 설정이지만 크게 모자람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밴드로 성공하려는 목표를 절실하게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성장통에 대해 지나치게 가볍게 다룬 것이 아니냐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영화의 내러티브로서는 별로였지만 음악에 대한 태도로는 그게 맘에 들었다. 사실 음악은 엄청난 아픔도, 대단한 치료도, 원대한 목표도 아닐 때가 많다. 그저 따라 하고 싶은 옷차림이고, 동경하게 되는 태도이며, 온전히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만 부르는 연가일 뿐이다. 사실 많은 밴드 영화들이 과장을 한다. 엄청나게 열악한 환경을 음악으로 이겨낸 사람들, 음악에 미쳐 성공을 위해 뒤도 보지 않고 달려가는 사람들, 내외적 갈등을 음악으로 승화한 성인(聖人)들로 밴드를 그려내곤 한다. 물론 그런 뮤지션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이게 좋았을 뿐이고, 어떤 밴드들을 동경했을 뿐이고, 어떤 아이를 사랑했을 뿐인 경우가 더 많다.


우리는 영화 속 이야기에서처럼 현재의 갈등을 반드시 해소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만 살진 않는다. 그저 당장 좋은 것, 재밌는 것을 위해 산다. 내가 밴드를 할 때도, 물론 늘 좋은 노래, 좋은 음악을 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그보다 훨씬 더 자주 고민했던 건 이 매일매일의 심심함과 무료함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중요한 공연이나 녹음을 하루 앞두고도 응원하는 팀의 야구와 축구 경기를 봤고, 게임을 했고, 그리고 나서도 더 재밌는 일이 없을까, 더 재밌는 농담이 없을까 고민했다. 존 카니 감독의 영화는 그래서 좋은 것 같다. 물론 영화 속 주인공 모두가 목표는 있지만, 영화의 내러티브를 위해 자기의 음악과 삶을 희생시키지 않으니까. 마지막 하이라이트인 공연도 다소 임팩트가 없었지만, 원래 밴드의 공연이란 그런 것이니까. 당장 뭔가를 바꾸어내는, 그런 대단한 게 아니니까. 소년들이 허름한 창고 안에서 함께 피웠던 담배 연기 같은 것이니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코너와 라피나는 런던으로 가기 위해 작은 보트에 몸을 싣고 웨일스로 향한다. 언젠가 뮤직비디오에서 본 것처럼 햇살 눈부신 날도 아니고, 멋진 요트를 탄 것도 아니지만, 그보다도 더 찬란한 꿈을 향해 바다로 나아가는 것이다. 소년의 입장에서는 동경하던 뮤직비디오 여자 주인공과 함께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는 그렇게 아무 이룬 것도, 이뤄진 것도 없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며 그들의 내일을 응원한다.


1980년대의 코너와 라피나는 지금 어떻게 변했을까. 감독이 많은 도움을 받았다 밝힌 U2의 보노 같은 뮤지션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유명 모델이 되었을까? 아니면, 평범한 젊은 시절을 지나 바다를 건넜던 추억을 간직한 40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자기만의 노래를 가진 사람이 되었을 것이란 사실이다. 밴드를 시작하고 현실을 노래로 바꾸었듯, 런던에서도 그들은 자기만의 노래를 만들었을 것이다. 자기가 만든 삶을 살았을 것이다.


결국 인생이란 자기만의 노래를 갖는다는 것이다. 존 카니 감독이 ‘원스'부터 해왔던 작업도, 내가 밴드를 하면서 찾아왔던 것도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싱 스트리트'는 밴드를 해봤거나 자기 노래를 만들어본 사람이라면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영화이며, 그렇지 않은 모든 이들에게도 자기 노래를 만들어보라고 뜨거운 가슴으로 권유하는 영화다.





매거진의 이전글 라라랜드 - 꿈을 좇는 청춘에게 바치는 찬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