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나의 영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nseo Jan 12. 2017

나, 다니엘 블레이크 - 괜찮아, 당신 잘못이 아니야

I, Daniel Blake, 2016

* 이 글은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첫 시퀀스는 이렇게 시작된다. 자막 너머에서 주인공 다니엘과 질병 수당 심사관의 대화가 들려온다. 로봇 같은 억양의 질문들은 하나같이 바보 같고 우스꽝스럽다. 심장에 이상이 있는 그에게 자칭 의료 전문가라는 사람이 심사랍시고 묻는 질문은 손을 머리 위로 올릴 수 있느냐, 전화기 버튼을 누를 수 있느냐 등 누가 봐도 불필요한 것들뿐이다. ARS 음성이 아닌가 의심이 들 때쯤, 이게 눈앞의 사람과 나눈 실제 대화라는 게 드러난다. 인간을 위해 만든 절차와 시스템들이 기계적이고 관료주의적인 족쇄가 되어 오히려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이다.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과 '바로 지금 그렇다'는 다니엘의 답변은, 그 자체로 이 영화의 주제의식과 현대 사회의 아이러니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를 위해 만든 컨베이어 벨트에 정작 우리가 올라서게 되었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질병 수당 신청은 그렇게 기각되고, 이해를 구하기 위해 찾은 전화 상담원은 늘 그렇듯 모두 통화 중이다. 영화 내내 인간이 만든 시스템은 정작 인간을 돕지 않는다. 의사는 일을 쉬라 하고, 나라는 일할 수 있으니 질병 수당은 줄 수 없다 하고, 실업수당을 받으려면 일자리를 구하라 한다. 실제 주인공의 상황과 생활은 몇 가지 질문에 의해 숫자로 환원되고, 시스템은 그를 적당한 분류에 맞춰 넣는 데 급급하다. 절차는 번번이 개인을 가로막을 뿐이고, 원칙은 원칙들을 보호할 뿐이다. 영화는 이 사회가 얼마나 쓸데없는 절차와 우스꽝스러운 시스템으로 돌아가는지 비꼰다.


주인공은 그런 상황이 못마땅하다. 이웃의 냄새나는 쓰레기가, 개똥을 치우지 않는 견주들이 눈에 거슬린다. 공중도덕과 사회적 약속들은 지켜져야 하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하지만, 그 약속들은 정작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조차 개인을 보호해주지 않는다. 쓰레기와 개똥은 그에 비하면 아무 일도 아니다. 개인들은 시스템의 변두리에 방치된다. 다니엘은 그 변두리에서 두 아이의 엄마인 케이티를 만난다. 부당한 이유로 수당을 받지 못하게 된 케이티를 보고 울분을 참지 못한 다니엘이 항의를 하다 함께 쫓겨나며, 그들은 가까워지게 된다. 이 영화가 사회 고발의 메시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은 바로 이 지점부터다.


영화는 일종의 '연대'에 대해 이야기한다. 답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다니엘과 케이티는 서로 도우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영화가 답답한 상황 속에서도 유머와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 것 역시 이러한 연대 덕분이다. 쓰레기를 제때 치우지도 않고 불법적인 택배를 대신 받아달란 부탁이나 하던 이웃은, 인터넷에 서툰 다니엘의 온라인 신청 절차를 아무 이유 없이 돕는다. 다니엘이 케이티의 집을 수리하고 두 아이를 돕는 것에 대해 영화는 어떤 이유도 붙이지 않는다. 자식 없이 상처(喪妻)한 주인공이 유사가족으로서의 유대감에 이끌리는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서로 돕는 것은 별다른 이유가 필요 없는 일이라고, 영화는 역설한다.


이 영화에서 가난한 이들은 서로를 군말 없이 돕는다. 길에서 만난 낯선 이들도 마찬가지다. 어찌 보면 비현실적이다 싶을 정도로 친절하다. 세상 천지에 저런 사람들이 어딨냐고 생각하게 될 정도인데, 어쩌면 그게 곧 이 영화의 주제의식과 이상향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노동자들의 연대를 믿고, 가난한 이들의 연대를 꿈꾼다. 정서적 유대감을 바탕으로 서로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며, 서로의 배를 앞으로 밀어주는 바람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 척박한 현실을 사는 일종의 대안이자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주인공이 다뤄지는 방식은 이 연대의 정체성을 더욱 확고하게 정립한다. 다니엘은 동정을 받아야 할 걸인도, 무엇이든 남에게 베푸는 현자도 아니다. 그저 연대를 가능케 하는 시민 중 한 사람일 뿐이다. 오래 목수로 일한 직장에서는 자신의 일에 대한 장인으로 존경받았던 사람이고,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이웃의 택배를 대신 받아주는 사람이며, 당장 자기보다 딱한 처지에 놓인 케이티의 가족을 위해 전기 요금을 선뜻 내놓는 사람이다. 다니엘은 창문에 에어캡을 붙이고 촛불 위에 그릇을 겹쳐 놓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최소한의 온기를 만드는, 그런 사람이다.



하지만 이 사회는 어떠한가. 한 마디로 이곳은 '가짜 아닌 가짜 운동화' 같은 사회다. 같은 중국 공장에서 만들어졌지만, 어떤 것은 진품으로, 어떤 것은 불법적으로 뒤로 돌려져 헐값에 팔린다. 시스템의 구멍과 허점들이 얽혀, 물건에 서로 다른 가치가 매겨지는 것이다.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선 우리도 그 운동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운명이다. 다니엘과 케이티는 라인의 끝에 걸려 사회에서 밀려날 위기에 처한 셈이다.


사람이 모여 사회인 것인데, 그 사회는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역설은 가난, 질병, 실업 등 여러 가지 얼굴로 발현된다. 그중에서도 가난한 엄마 케이티의 시퀀스들은 관객의 마음에 계속 동요를 일으킨다. 특히 식료품 지원소 시퀀스가 그렇다. 굶주린 케이티는 필요한 물품과 음식들을 받아들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통조림을 열어 맨손으로 먹기 시작한다.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 인간은 이렇게 나약하기만 하다. 이 장면은 가난이 어떻게 개인의 자존감과 삶을 망가뜨리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눈물을 터트리며 거듭 죄송하다 말하는 케이티에게 다니엘은 '괜찮다. 네 잘못이 아니다. 당신은 이겨낼 것이다'라고 위로한다. 그렇다. 영화가 이들에게, 혹은 우리들에게 하려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괜찮다. 이건 네 잘못이 아니다. 우리 잘못이 아니다.


이후에도 케이티는 마트에서 물건을 훔치다 걸리기도 하고, 결국 매춘에까지 내몰린다. 사회의 밑바닥이 그러하듯, 그녀는 수치심과 자기모멸을 돈과 맞바꾸는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그 돈은 생존의 수단이 된다. 영화는 이 일련의 사건들을 흔한 배경음악 한 번 제대로 쓰지 않고 조용히 지켜본다. 그렇게 영화 속 세계는 지금의 현실 그 자체가 된다.



사실 목수인 다니엘의 세계는 현실 사회와 부딪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관료주의적인 절차와 시스템은 그 위에 '디지털'이라는 옷까지 걸쳤다. 디지털, 자동화가 만든 편리는 사회의 절대다수에게 편익을 가져다주는 것 같지만, 그와 다른 세계에서 사는 다니엘 같은 사람까지 보듬지는 못한다. 인터넷으로 수당을 신청하기 위해 찾은 도서관은 빈자리 없이 빼곡하게 차 있다. 디지털로 만들어진 사회에는 그를 위한 빈자리가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에는 어딘가로 걸어가는 주인공의 뒷모습을 잡은 쇼트가 유난히 많다. 그 초라해 보이는 뒷모습은 어떤 장면보다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왜 이 사회에는 그를 위한 자리가 없는 것일까. 그는 왜 환자인데 질병 수당을 받을 수 없나. 그는 왜 일자리를 주려는 사람이 나타나도 일을 할 수 없나. 그는 왜 이 모든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구직 활동을 계속해야 하나. 그건 단순히 멍청한 심사관과 무심한 절차 때문인가? 그는 그저 예외적인 경우에 붙잡힌 희생양일 뿐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기엔 이미 현실 사회에 이보다 더한 사연들이 너무나 많다.


영화가 다니엘의 이야기를 통해 말하려는 것은 예외가 아닌 보편에 대한 것이다. 이 영화는 인정(人情)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비인간적인 사회로부터 인정(認定)을 받기 위한 다니엘의 모험기이자 분투기이자 좌절기이다. 그는 여기에 다른 무엇도 아닌 '사람'이 있다고 끊임없이 외친다. 영화 제목인 'I, Daniel Blake'에 사회에 의해 불리는 이름보다 내(I)가 앞에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결국 다니엘은 '나'를 지키기 위해, 마지막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수당 받기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착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리는 세상에 항거하고, 구걸하는 빈민이 아닌 서로 존중하고 존중받는 신사로 남기 위해, 그는 그를 막아서던 관공서 사람들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 나가 벽에 글을 쓰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시위를 시작한다. 그는 영웅도 아니고, 투사도 아니며, 인간극장과 같은 감동 스토리의 주인공도 아니다. 그의 처지는 동정받을 것이 아니며, 단지 존중받아야 할 한 시민의 삶일 뿐이다.



잘못된 질병 수당 심사로 시작된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서야 주인공에게 재심사 기회를 준다. 하지만 너무 먼 길을 돌아온 것일까. 다니엘은 안타깝게도 심사를 눈앞에 두고 심장마비로 눈을 감고 만다. 영화 내내 그랬듯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뒷모습만 남기고 떠난 것이다. 항소 변론을 위해 그가 준비했던 말들은 유언이 되어 그의 장례식장에서 케이티에 의해 대신 읽힌다.


 "I am not a client, a customer, nor a service user. I am not a shirker, a scrounger, a beggar nor a thief.

I am not a national insurance number, nor a blip on a screen. I paid my dues, never a penny short, and was proud to do so.

I don’t tug the forelock but look my neighbour in the eye. I don’t accept or seek charity.

My name is Daniel Blake, I am a man, not a dog. As such I demand my rights. I demand you treat me with respect.

I, Daniel Blake, am a citizen, nothing more, nothing less. Thank you."


이것은 가난한 한 남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각자가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천명해야 한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가진 권리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고 선언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이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말해주어야 한다. 괜찮다고,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말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영국 박스오피스에서 켄 로치 감독 영화 중 최고의 오프닝 성적을 거뒀다. 아래는 이를 기념해 자정 시간에 맞춰 영화 속 메시지를 영국 국회의사당 등에 투사한 모습.

                          Courtesy of Entertainment One




매거진의 이전글 싱 스트리트 - 자기만의 노래를 갖는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