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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seo Jan 22. 2017

립반윙클의 신부 - 관계의 끝에서 만난 것은 바로 나

リップヴァンウィンクルの花嫁, 2016

* 이 글은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마다 취향에 맞는 SNS를 하나씩은 한다. 누구는 페이스북을, 누구는 인스타그램을, 누군가는 이제 이용자가 많이 줄어든 것처럼 보이는 트위터를 아직 하고 있다. 그뿐인가. 이름도 생소한 SNS와 커뮤니티에 제각각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아니, 살고 있다. SNS는 주변 사람이나 옛 친구들을 연결해주기도 하고, 서로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묶어주기도 한다. 그것은 비슷한 기쁨이기도 하고, 비슷한 슬픔이기도 하며, 비슷한 공허감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만나는 이들과 공유하는 감정은, 때론 현실에서 느끼는 그것보다 더 생생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 몇 장의 사진과 짧은 말들 위에서 살고 있다.



'립반윙클의 신부'는 현실과 소셜 네트워크, 혹은 그 경계에서의 인간관계에 대해 얘기하는 영화다. '플래닛'이라는 가상의 SNS를 사용하는 주인공 나나미는 현실에선 마치 다른 행성에서 온 외계인 같다. 남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그녀를 놀리는 학생들을 나무라지도 못한다. 누군가에게 들리기에 현실 속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작기만 하다. 그런 그녀가 속 이야기를 털어놓는 곳은 '플래닛'뿐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만나본 적도 없는 이른바 랜선 친구들이 끼리끼리 무리를 이루고 사는 곳. 익명성이 지배하는 공간임과 동시에, 제2, 제3의 자아들이 모여 사는 공간.


한 남자를 채팅으로 만나 결혼에 이르기까지, 어렵다면 어려운 인생의 주요 사건들이 순식간에 일사천리로 흘러간다. 그녀 앞에는 행복만 남은 걸까? 이따금 찾아오는 권태만 견뎌내면 되는 걸까? 그녀는 몇 번의 클릭으로 얻은 남자, 인스턴트 라면의 조리법처럼 정해진 대로 흘러가는 결혼의 절차가 왠지 모르게 불안하다. 이런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은 역시 '플래닛'뿐이다. 소셜 네트워크는 현실과 달리 진심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인 것처럼 보인다. 이 행성은 그녀의 얘기를 들어주는 곳일까. 이곳에서 비롯된 관계는 현실의 그것보다 진실할까.


나나미의 희망과 바람은 무참히 깨지고 만다. 어쩌면 부모의 오랜 별거 사실을 숨기고 SNS에서 람바랄의 소개로 알게 된 아무로의 도움을 받아 가짜 하객을 구할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괜찮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험난한 현실에 맞춰 살기 위해서는 약간의 거짓말도 필요하다, SNS의 세계는 진심으로 이루어진 곳이니 이곳을 통하면 괜찮을 것이다,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곳에서 비롯된 관계 역시 진짜가 아니다. 가짜 관계의 이면에는 공허 이상의 추악한 진실만이 도사리고 있다. 이를 깨닫지 못한 주인공에게는 가혹한 시련들만이 기다린다.


나나미는 남편의 부정을 의심하지만, 외려 자기가 악의적인 음모에 빠져 이혼을 당하고 만다. 당장 지낼 곳조차 없어진 그녀는 다시 아무로의 도움을 받아 낡은 호텔의 청소부로 생계를 이어간다. 그러다 아무로가 알선한 결혼식 하객 대행 아르바이트에서 마시로를 만나 친해진다.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녀였는데, 이젠 자기가 가짜 하객 노릇을 하는 처지가 된다. 아무로는 그녀에게 또 새로운 일을 제안한다.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주인 없는 대저택을 지키기만 하면 된다는 가정부 아르바이트다. 어딘지 모르게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의 저택에는 마시로가 이미 가정부로 일하고 있다. 주인 없는 집에서 나나미는 마시로와 잠시 행복한 시간들을 보내지만, 그 이면에도 그녀를 이용하려는 음모가 기다리고 있다.



영화는 나나미 중심의 서사로 진행된다. 말하자면, '립반윙클의 신부'는 자기가 속할 수 있다고 믿었던 관계망과 사회에서 계속 밀려나고 쫓겨나는 나나미의 모험기이자 표류기이다. 시어머니로부터 불륜을 의심받고 쫓겨나 갈 곳을 잃은 채로 힘겹게 트렁크를 끌고 가는 그녀의 모습은, 영화 전체를 대변한다. 이는 이와이 슌지가 그린 현재 일본인들의 자화상임과 동시에, 모든 현대인의 초상이기도 하다. 원치 않게 디지털 노마드가 된 우리는 어딘가에 소속되길 갈구하는 떠돌이 신세다. 소속되든, 소속되지 못하든, 행복으로부터는 늘 유리된다.


이면의 서사 속에는 더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내성적인 주인공이 SNS로 맺은 관계로부터 철저히 배신 당하는 이야기 곳곳에는 일본의 사회 문제들이 녹아 있다. 나나미의 남편은 사실 불륜을 저지른 적이 없었다. 불륜녀의 연인이라던 남자는 나나미에게 남편 대신 사과하라며 호텔로 불러내 그녀를 범하려 한다. 그 장면은 고스란히 몰카에 담기고, 이를 본 그녀의 시어머니는 그녀를 매몰차게 쫓아낸다. 오해가 부른 사건인가 싶지만 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가 믿었던 아무로가 꾸민 일이다. 남편은 마마보이였고,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탐탁지 않았던 것.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다. 이후로도 아무로는 나나미가 불행해지는 순간마다 나타나 도움을 준다. 자신이 망친 인생에 대한 동정일까? 아니다. 숙식은 물론 큰 돈까지 주는, 기묘한 가정부 아르바이트는 말기 암 환자인 AV배우 마시로에게 자살 친구를 만들어주는 일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나나미가 겪은 이 모든 불행이 실은 함께 죽어줄 사람을 만들기 위해 설계된 일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믿었던 모든 것들이 그녀를 철저하게 배신한다. 해결사를 자청하던 아무로는 사실 이 거짓 세상에 기생하며 살고 있는 존재였을 뿐이다.



만약 원래 계획대로 나나미가 마시로와 함께 죽었다면 어땠을까. 그 죽음을 사회면 기사로 접했다면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그저 혀를 차게 되는 사회 세태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마시로는 혼자 죽었고, 영화는 이를 단순히 못된 음모로만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이라도 함께 할 친구를 구하는 마시로의 행동은 이 영화가 얘기해온 모든 것들의 정점에 있다. 가짜 관계들 속에서, 이 심각한 고독 속에서, 우리는 단 한 번이라도 진실한 관계를 맺고 살다 갈 수 있을까. 인간관계가 등가의 가치들로 환산되는 세상에서도 진심의 가치는 유효한 걸까. 내가 죽으면 과연 슬퍼해줄 사람이 있을까.


우린 가짜인 줄 알면서도 관계를 맺고, 애초부터 틀려먹은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진심을 찾으려 한다. 나나미와 마시로가 함께 보내는 시간들은 거짓 위에 쌓아올린 것이지만, 어쩌면 '우리가 함께 하는 행복이란 게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일말의 희망을 품게 한다. 함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는 두 사람의 모습은 나나미의 실패한 결혼 생활, 사람 한두 명쯤 없어져도 모를 것 같은 도쿄 거리의 군중 신과 대비되며, 진실한 관계에 대해 재정의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꼭 그럴 수 있을 것만 같다. 물론 관상용 애완동물 같았던 관계는 언제든 손에 닿는 이를 해할 수 있는 맹독을 지니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 영화에서 또 하나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마시로가 죽고 난 뒤 아무로와 나나미가 유골과 함께 그녀의 어머니를 찾는 대목일 것이다. 남 앞에서 옷을 벗는 AV 배우의 삶을 살았던 마시로를 애도하며 벌거벗고 통곡하는 장면은, 비뚤어진 인간관계의 극단에 있던 마시로를 동정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기괴하고, 또 얼마나 슬픈 일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남 앞에 알몸과 치부를 다 내놓는 창피를 무릅써도 친구 한 명 얻지 못하는 세상이라니.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SNS 나라의 앨리스'라고 정리한다. 익명의 세계, 가짜 관계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떠도는 나나미는 정말 꼭 앨리스처럼 보인다. 영화 속에서 그녀가 처한 상황들은 앨리스가 마주한 혼돈과 다르지 않다. 만남, 상견례, 결혼식, 신혼 생활, 남편의 불륜, 파경이 채 준비되지 않은 그녀에게 순식간에 다가온다. 이에 더해, 하객 대행, 몰카, AV 배우, 자살 등 현실의 자극적인 소재들을 아무렇지 않게 예쁜 자연광 화면 위에 펼쳐 놓으니, 영화 속 공간이 마치 트럼프 병정, 하트의 여왕이 사는 원더랜드처럼 이질적인 세계로 보인다. (마시로의 닉네임이자 영화 제목으로도 사용된 '립반윙클' 역시 W. 어빙의 단편소설로, 게으름뱅이인 립이 술을 훔쳐 마시고 잠들었다가 깨어나 마을로 돌아와 보니 20년이나 흘러 다른 세상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가짜 관계 속에서 길을 잃고 "저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요"라며 우는 나나미의 모습은, 다소 상투적이긴 하지만, 자신의 세계를 잃어버린 앨리스가 "여기서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좀 가르쳐줄래?"라고 묻는 대목과 중첩된다.


나나미의 모험은 어떻게 끝을 맺게 될까. 앨리스의 질문에 사라지는 고양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가에 달렸지." 그렇다. 나나미가 영화 내내 관계에 끌려다녔던 것은 자의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늘 누군가에게 의존하기만 했던 그녀는 영화 말미에 이르러서야 혼자로도 완벽한 삶을 시도해보게 된다. 앨리스가 고양이에게 난 어디든 별로 상관없다고 답하자, 고양이는 이렇게 얘기한다. "그럼 아무 데로나 가도 되잖아" 혼자로도 충분하다면 그곳은 어디여도 괜찮았던 것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표류한 나나미에게 작지만 따스한 햇살이 들어오는 그녀만의 집을 선물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다른 누구와도 함께 하지 않는 혼자만의 삶을 시작하는 그녀에게, 스스로 단단해지는 것이 제일 우선이라고 위로와 격려를 보낸다. 관계에 대한 희망과 절망을 번갈아 다루며 '이와이 월드'를 구축해온 이와이 슌지 감독은 '관계의 진정성'에 대한 질문에 '나의 정체성'을 해답으로 제시한다. 길을 잃었을 때, 망망대해 위에서 표류하게 되었을 때, 제일 중요한 건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찾는 일이다. 그렇게 인생은 '누군가를 찾는 방황'이 아니라 '나를 찾는 여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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