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cario, 2015
* 이 글은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참 편안한 곳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수많은 사회 문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교적 편안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 정의롭지 않고 부조리한 사회인 데다가 약자가 살아남기 쉽지 않은 사회이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기본 중의 기본인 치안과 법질서는 갖춰져 있는 편이니까. 영화 '시카리오 : 암살자의 도시'는 그러한 사회적 장치와 시스템이 무너진 공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곳은 포식자인 늑대와 복수의 칼을 가는 암살자들이 지배하는 공간임과 동시에, 극단적인 폭력에 노출된 약자들의 공간이다. 폭력이 일상화된 곳에서도 과연 약자들의 '일상'은 존립할 수 있는 것일까. 무표정한 강자들에 의한 폭력 신이 화면 위에 펼쳐질 때마다 생각이 나는 건, 역설적으로 약자들의 세계다. 영화가 강자들 간의 대결 구도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법 집행자 신분이지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모르고 이용만 당하는 - 게다가 그 사실조차 거의 끝까지 알지 못하는 - 케이트(에밀리 블런트)를 관찰자로 내세운 것도 그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영화 내내 그녀는 철저히 약자였을 뿐이다.
속옷조차 제대로 갈아입지 않고 사는 케이트의 일상은 더할 나위 없이 무미건조하다. 이 비정한 폭력은 한 줌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케이트 개인의 일상마저 잠식하고, 그녀는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운다. 일련의 사건들은 케이트의 의지와 관계없이 흘러간다. 범죄자를 응징하고 세상을 지켜내는 집행자인 줄 알았던 그녀 스스로의 신분은, 일이 돌아가는 원리조차 제대로 모르는 잠재적 피해자, 절대적 약자와 다를 것이 없었다.
영화 속의 폭력은 아무렇지 않게 평범한 일상 속에 숨어들어 있다.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근거지는 일반 가정집으로 둔갑해 있고, 그 벽 속에는 끔찍한 몰골의 시체들이 숨겨져 있다. 차가 막히는 도로 위의 일상은 갑자기 총격전에 휘말린다. 이 시퀀스는 '라라랜드'의 첫 시퀀스와 대척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라라랜드'에서는 LA로 들어가는 꽉 막힌 도로가 순식간에 뮤지컬 무대로 바뀌며 사람들이 꿈과 희망을 노래하는 데 반해, 이 영화에서는 평온해 보였던 도로가 일순간에 폭력과 살육의 공간이 된다. 일상의 공간에서 아무렇지 않게 총성이 울리고, 피범벅이 된 시체와 이를 무표정하게, 혹은 흥분과 호기심이 뒤섞인 눈으로 지켜보는 일반인들의 시선만 남는다. 이곳에 꿈과 희망 같은 건 남아있지 않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폭력은 언제든 뛰쳐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 그저 생계를 위해 마약 밀매를 돕고 있는 멕시코 부패 경찰인 실비오의 집이 그렇다. 어린 아들이 실비오의 침실로 아침식사를 가져오는 장면에서 침대 옆에는 총이 아무렇지 않게 세워져 있다. 위험하다는 것도, 아들이 만지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은 버젓이 가정집 한가운데 놓여 있다. 이는 카르텔이 본보기로 삼겠다며 고가도로 밑에 주렁주렁 내건 목 없는 시체들과 다를 바가 없다. 폭력이 일상화되면, 그 일상을 사는 사람들은 무뎌진다. 그 안에서도 무너져가는 벽에 대고 스쿼시를 할 수 있게 되고, 축구공을 찰 수 있게 된다. 무뎌진다는 것은 실제로 총에 맞는 것만큼이나 무서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영혼은 이미 총에 맞은 상태인지도. 이게 내가 사는 동네의 풍경이었다고 생각해보라. 내가 사는 곳이 언제든 총격전이나 칼부림 한가운데 놓일 수 있다면, 우리의 삶과 영혼은 과연 멀쩡할 수 있었을까. 진작에 저자 거리에 내걸려 있지 않았을까.
빈번히 사용되는 버즈 아이 뷰 숏은 이 폭력의 세계에 놓인 약자들을 더 작디작은 존재로 만든다. 마치 발에 밟힐 위험에 직면한 개미들처럼 말이다. 폭력이 지배하는 거대한 세계에서 우리는 뭔지 잘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작은 점 같은 존재다. 임무의 정체를 묻는 케이트에게 알레한드로(베네치오 델 토로)는 시계의 작동 원리를 알려 하지 말고 일단 시곗바늘이나 보고 있으라고 말한다. 이 세계의 작동 원리를 모르는 우리는 이렇게 돌아가는 시곗바늘을 바라보며 톱니바퀴나 굴리고 있어야 하는 운명이다.
피사체를 무심하게 관찰하는 카메라의 시선도 폭력 사회와 그 속의 약자들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종종 CCTV 화면 속, 혹은 망원경 너머의 소요로 처리되는 화면은 영화 속의 상황들에 현실성을 부여한다. 내가 사는 사회가 저랬다면 끔찍했겠지만 당장 그렇진 않으니 나와는 크게 관계없는 영화 속의 이야기라고 치부하는 관객의 태도는, 국경 근처 건물 옥상에서 건너편의 총성과 화염을 구경하는 군인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영화는 관객을 영화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이 폭력은 영화의 프레임 밖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고, 이것을 무시하는 당신도 이 폭력 사회에 일조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고 말이다.
폭력은 낮의 세계에도 버젓이 융화되어 있다. 폭력의 주체들은 유령 같은 존재다. 이 유령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으며, 일상 속에 잘도 숨어든다. 영화 속 CIA는 폭력을 종식하려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폭력을 지배하고 더 거대한 폭력으로 자기들 중심의 질서를 만들려는 존재다. 이 모든 것이 자신들의 마음대로 카르텔을 휘두르기 위해 벌인 일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폭력이든, 평화이든, 통제 하에 있느냐가 중요할 뿐, 피와 마약에 범벅이 된 중남미 국가 사람들의 삶은, 이들의 안중에 없다.
폭력은 집과 가정에도 문을 열고 들어온다. 멕시코 경찰 실비오의 이야기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치다. 출근하기 전 모닝커피에 술을 타 마시는 정도의 아주 사소한 불법은 이내 침대 옆에 놓인 총으로, 마약 밀매를 돕는 부패로 이어진다. 부지불식 간에 이 집에 침투한 폭력은 빈 침대, 가장의 부재로 돌아온다. 아무도 이 여인에게 남편을, 이 소년에게 아빠를 돌려줄 수 없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소년은 축구를 하고 있다. 아빠와 함께 오자고 진작부터 얘기했었는데, 이곳에 소년의 아빠는 없다. 대신 돌아오는 것은 멀리서 들려오는 총성. 이 불안한 신호에 모두가 동그란 토끼눈을 하고 놀라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지만, 이내 다시 공을 차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미 이 불안과 폭력은 삶의 일부가 된 것이다.
멕시코 카르텔에게 아내와 딸을, 가정을 송두리째 잃은 알레한드로의 복수도 결국 한 가정의 식탁에서 끝난다. 이 가족은 이 행복한 만찬이 피로 뒤덮인 마지막 식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기 가족들에게 총을 겨눈 알레한드로에게 카르텔의 보스인 파우스토는 널 이리로 보낸 사람들이라고 다르지 않으며 자기들의 방식도 다 그들에게 배운 것이라 말한다. 폭력은 그렇게 돌고 돈다. 가족을 잃은 지방검사 출신 알레한드로의 복수가 부패 경찰 실비오, 카르텔의 중간 보스 마누엘, 보스 파우스토 가족뿐 아니라 그 가정을 모두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영화는 폭력의 역사를 기술하고, 폭력의 지도를 그린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알레한드로는 케이트가 있는 모텔에 찾아와 지금까지의 작전이 모두 합법적이었다는 진술서에 서명을 하라고 협박한다. 케이트에게 있어 서명은 곧 또 다른 폭력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알레한드로는 그녀에게 이곳은 법이 없는 늑대들의 땅이고 그녀는 늑대가 아니니, 아직 법이란 게 존재하는 작은 도시로 전출을 가라고 말한다. 자신과 그 가족까지 서로 죽고 죽이는 이 세상 바깥에는 희망이란 게 있을까. 폭력의 지도 끝까지 도망치고 나면 약자를 위한 땅이 나올까? 케이트는 서명을 받아 떠나는 알레한드로에게 뒤늦게 총구를 겨눠보지만 끝내 방아쇠를 당기진 못한다. 이미 모든 것이 무너진 이곳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과연 승자나 강자가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결국 모두가 패자이자 약자인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