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 Days of Summer, 2009
연애를 하면 보통 날짜를 센다. 사랑을 하면 날짜를 세고 싶은 본능이라도 깨어나는 것인지, 많은 사람들이 첫 만남이나 연애의 시작으로부터 100일, 1년 단위로 날을 헤아린다. 사실 이런 기념일은 역사에 남을 만한 일들을 기억하는 방식일 텐데, 연애 기간을 이런 식으로 세는 것은 이를 하나의 역사로 받아들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즉, '500일의 썸머' 역시 톰이라는 남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역사라고 봐야 할 것이다.
연애라는 게 시계열적으로 보면 대체로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만남에서부터 이별까지, 한 편의 드라마처럼 기승전결을 이루고, 마치 주가 그래프처럼 뜨겁게 달궈졌다 식기를 반복한다. '500일의 썸머'는 이런 과정을 보통의 로맨스물처럼 시간의 흐름대로 보여주기보다는, 날짜를 넘나드는 내러티브를 통해 연애를 마치 하나의 긴 의식, 혹은 통과의례처럼 다룬다. 그 안에서 주인공 톰은 울고 웃고 설레고 집착하고 분노하고 체념한다. 특히 영화는 만남과 달달한 연애의 시간을 이별과 그 후의 시간과 극단적으로 대비시키는 교차편집을 통해, 사랑이란 매우 복합적인 감정의 총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당연하지만, 사랑에 빠진 이와 사랑을 갈구하는 이는 결코 깨닫지 못하는 사실 말이다. 사랑은 똑같은 대상의 똑같은 행동들을 정반대로 느끼게 한다. 사랑에 빠진 나와 사랑을 끔찍하게 느끼는 나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산다. 그렇게 기쁨과 슬픔, 사랑과 증오, 환희와 절망이 뒤섞인 게 바로 사랑, 혹은 우리가 연애를 통해 느끼는 감정이다.
물론 그 정서가 무엇이든, 어디까지나 톰의 세계에 국한된 것이다. 톰은 썸머를 자신의 입장에서만 이해한다. 톰이 '찌질한' 남자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렇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사랑에 빠지면 외려 나의 세계에 투영된 상대방만 눈에 보인다. 상대를 사랑하고 존중한다면 그 반대여야 할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축약하면, 소심남인 주인공이 사랑을 믿지 않는 썸머를 만나고 헤어졌는데,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난 그녀는 사랑을 찾았다더라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건 톰이 이해한 이야기일 뿐이다. 영화는 전지적 시점의 내레이터가 끼어드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 톰 중심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해석한다. 썸머가 정말 그런 사람인지, 우리는 알 수 없는 노릇인 것이다.
그래서 종종 톰은 비겁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자기 맘대로 썸머라는 대상을 재단해 판단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톰의 처지에 자신을 대입해 이해할 수 없는 썸머의 행동에 분개했든, 반대로 소심하게 이야기의 뒤에 숨어 썸머를 'bitch'로 만드는 톰의 변명에 짜증이 났든,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사랑이 원래 그런 감정이라는 것을. 제삼자의 입장이 되면 있는 말, 없는 말로 충고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막상 자기 일이 되면 사랑이라는 감정에 현명함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 '현명한 사랑'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바꾸어 말하면 '비겁한 사랑'도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화가 나고,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 화가 나는, 당연한 감정일 뿐이다.
굳이 말하자면, 톰과 썸머를 비롯해, 연애를 하는 우리 모두는 그저 서투른 것일 뿐이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영화 초반부에 나오는 둘의 유년 시절과 성장기에서 보듯, 연애라는 건 이렇게 서로 다른 역사를 가진 사람과 사람이 어떤 지점에서 만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존재가 처음 맞닥뜨리는 것이니, 서투른 것이 당연하다. 이 '만남'들은 다 같은 '연애'로 불리지만 어느 하나 같지 않다. 연애 코치, 연애 칼럼니스트 따위가 조언해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방법은 그저 서투른 우리가 결코 능숙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주인공 톰의 이상(理想)과도 같은 판타지가 좀 안쓰럽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톰과 썸머가 이케아 매장에서 하는 부부 흉내, 즉 어른들의 소꿉놀이는 누구나 한 번쯤 해볼 법한 일이지만, 결국 독이 되어 돌아올지도 모르는 행동이기도 하다. '유사 가족'처럼 서로 간의 유대감을 높이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동시에 '유사 권태'도 더 빨리 밀려올 수 있기 때문이다. 톰과 썸머처럼 사랑에 접근하는 방식, 관계에 대한 정의부터 서로 다른 경우에는 더 위험하다. 기대치가 다른 상대와 함께 한 500일은 순간순간 빛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말까지 아름다울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서투른 우리는 여전히 연애를 한다. 이렇게 성공 확률이 낮은 일을 계속 반복한다. 그것은 불나방 같은 심정이 아니라, 아마도 그런 연애를 하면서도 충분히 행복하고, 충분히 성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도 일종의 성장담이 되는 것이고. 사랑에 집착하던 사람이 환상에서 벗어나 삶의 주관과 주체성, 일상의 리듬을 되찾는 이야기 말이다. 연애란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의 총합이다. 지나고 나면 무수히 많은 흔적을 남긴다. 좋은 것, 좋아하는 것들만 남는다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다. 그래도 그 좋고 나쁨이 모두 모여 내 취향이 된다. 톰에게 있어 연애 전의 '스미스(The Smiths)'와 연애하는 동안의 '스미스'와 이별 후의 '스미스'는 모두 다른 음악이 될 것이다. 링고 스타도, 카드 속 문구들도, 벤치에서 보이던 건축물들도 마찬가지다. '나'라는 사람은 결국 그 기억과 역사들을 거쳐 만들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