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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seo Feb 25. 2017

어른들이 없는 곳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슬픈 성장담

영화 리뷰 : 가려진 시간(2016)

* 이 글은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왜 아이들은 금지된 것에 매료되는 걸까. 왜 이 세상 것이 아닌 것들에 끌리는 걸까.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세상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어쩌면 우린 그 시절을 까마득히 잊은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 '가려진 시간'은 아동 심리학자 앞에 앉은 한 소녀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픈 꿈과 공상으로 가득했던 소녀가 풀어놓는 경험은 신비롭지만, 한편으론 황당무계하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믿을 수 있을까? 이 이야기를 믿을 준비가 되어 있것일까?



엄마를 교통사고로 잃고 터널 공사 일을 하는 새아빠를 따라 화노도로 전학 온 수린에게 고아원에 사는 성민이 다가온다. 학교에서 왕따 취급을 받고 혼자 걸어가는 하굣길, 소녀의 몸집보다 훨씬 길게 늘어진 그림자 위로 소년이 찬 축구공이 굴러 들어온다. 그렇게 부모 없는 아이들은 이내 서로 가까워진다. 자기들만의 비밀 대화를 나누고, 자기들만의 장소를 만든다. 영화의 초반부는 아이들이 쓰는 암호 문자처럼 상징적인 장면들로 가득하다. 예기치 않은 상처,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들어가 버린 소중한 물건, 아무도 모르는 동굴 등은 아이들의 세계를 이루는 상징들이다.

 

아이들에게는 아이들만의 이야기가 싹튼다. 충분한 사랑도, 적절한 관심도 받지 못한 아이들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찾아 터널 공사 폭파 현장을 구경하러 간다. 산속에서 발견한 굴 속으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흘러 들어가게 된 아이들은 수린을 빼고 모두 실종되고 만다. 이 지점에서부터 아이들의 이야기와 어른들의 이야기(혹은 현실  세상의 이야기)는 완벽하게 분리된다. 아예 다른 시간이 지배하는 세계로 말이다. 성민, 태식, 재욱, 3명의 아이는 시간이 멈춘 판타지의 세계에 갇혀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성장하게 되고, 세상은 실종된 아이들을 찾아 헤맨다. 아이들의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어른들의 현실적인 이야기와 철저히 대립하기 시작한다.



결국 원래의 세계로 돌아온 아이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은('넌 어디 내놔도 잘 살 애니까 걱정 말라'는 아버지의 마지막 말과 함께), 다시 말해 현실적인 이야기에 편입될 필요 없는 성민뿐이다. 그리고 그 소년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소녀뿐이다. 어른들의 논리가 만들어낸 이야기들은 억측에 기반을 둔다. 납치, 실종, 터널 시공사가 사고사를 덮기 위해 위장한 것이라는 음모론까지, 어른들은 잘잘못을 가리기에 바쁘다. 이 논리 하에서 아이들의 이야기는 철저히 배제된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말을 허무맹랑한 소리라며 믿지 않고, 아이들은 또다시 갈 곳을 잃는다. 아이들에게 세상은 실종 아동이 납치 용의자가 되는 아이러니를 안겨줄 뿐이다.


말하자면, '가려진 시간'은 결국 이야기 간의 대립과 갈등이라 할 수 있다. 가려진 시간에 버려진 아이들은 한 번만 얘기를 들어달라고 호소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는 그럴듯하게 지어낸 허언이자 존재하지도 않는 납치범의 음모일 뿐이다. 이 영화는 '아이들은 왜  없어지는가'라는 질문에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 어른들의 무관심 때문이라고 답한다.



다들 언젠가 - 특히 어린 시절에 - 시간이 멈추는 상상을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멈춘 시간 속에서 무엇이든 맘대로 하는 상상은 점점 맘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반작용쯤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시간이 멈춘다면 어떻게 될까. 그 세상에는 나만 있어야 할 것이고, 모두가 그대로인데 혼자 늙어가야만 할 것이다. 영화 속 아이들의 운명이 그렇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세계는 존재 소멸의 공포가 지배한다. 아이들만 남은 세계에는 아이의 성장을 지켜봐 주고 돌봐줄 이가 아무도 없다. 아이의 존재를 증명할 이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심지어 시간조차 아이를 지켜봐 주지 않는다. 이곳에서 아이는 철저히 혼자다.


실은 시간이 멈추기 전에도 그랬다. 아이들은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했고 아무도 모르는 어딘가로 숨어들었다. 어른들의 무관심을 들고 가 몰래 먹으며 자랐다. 아이들은 그랬다. '가려진 시간'을 보는 내내 생각났던 영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2004년 작 '아무도 모른다'였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아무도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 세상을 그린 '아무도 모른다'의 판타지 버전처럼 느껴졌다. 안타깝게도, 소년은 그렇게 혼자 자랐다. 세상은 그런 아이가 언제 존재하기나 했었냐는 듯 그대로인데, 소년만 혼자 자랐다. 이 영화는 혼자 자란 아이들을 그린 비극인 셈이다.


혼자 커버린 소년을 이해하고 함께 울어주는 것은 소녀뿐이다. 미안하다고 얘기하는 것도 소녀뿐이다. 왜 이 아이들은 서로를 위로해야 하는가. 아이들은 세상으로부터 아무런 대가 없이 위로받을 권리를 갖고 태어난다. 어른들에게는 그래야 할 의무가 있다. 어른들이 보아주지 않으면 아이들은 멈춘다. 아이들의 시간은 그 자리에 멈춰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 영화는 어른들을 위한 판타지다. 다만 영화를 보는 내내 기분이 가라앉는 것은, 이 판타지가 어른들에게 동심을 일깨워주는 동화가 아니라 어른들이 꼭 들었어야 할 아이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몸만 웃자라 버린 성민은 다시 아이가 되기 위해 애쓴다. 다시 아이로 돌아가 어른들의 인정과 관심을 받는 세계로 편입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어른들은 끝까지 아이들의 이야기를 믿어주지 않는다. 결국 성민을 체포하기 위해 달려드는 경찰들에게 수린은 "아저씨들이 틀렸다"고, "제발 한 번만 믿어달라"고 절규한다. 그렇다. 틀린 것은 어른들일지 모른다. 결국 이 모든 사단은 결국 아이의 희생으로 끝난다.


우리 사회는 지금까지 너무 많은 아이들을 잃어버렸다. 그 수많은 일들은 단순히 사고였을까. 그렇게 치부하고, 그렇게 규정지으면 끝나는 것일까. 이 영화의 결말과 완성도를 어떻게 평가하든, 섬 밖으로 유유히 떠가는 배를 화면에 오래 담아둔 마지막 롱테이크 장면에서 관객들 모두 만감이 교차했을 것 같다. 이 사회가 구하지 못한 그 아이들, 아직도 배 밖으로 나오지 못한 그 아이들도, 혹시 어딘가에 살아있진 않을까. 판타지이든 무엇이든 우리가 모르는 어떤 세계, 가려진 시간 속에서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실에 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적어도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닐지.



굳이 정의해야 한다면, 이 영화의 결말은 해피엔딩이라 해야 할 것이다. 소년은 소녀를 위해 한번 더 혼자 늙어 중년이 되어버렸지만, 늘 함께 있겠다는, 항상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지킨 셈이니까. 하지만 동시에 지독한 새드엔딩이기도 하다. 아이는 또 한 번 혼자 자랐으니까.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어른들이 없는 곳에서만 자라는 아이들의 슬픈 성장담을 들려준 셈이다. 아이들이 탄 배가 가라앉지 않고 계속 떠가기를 바라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무력하게 느껴졌다. 이것은 결국 멈춘 시간도, 가려진 시간도 아닌,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이었구나, 탄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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