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or High Water, 2016
* 이 글은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적막한 풍경으로부터 출발한다. 정말 제목 그대로(원제가 아닌 한국 개봉 제목) 먼지만 날릴 것 같은 버려진 동네, 현악기의 불안한 선율 위에 피아노가 얹어지고 불길함은 두 배가 된다. 카메라는 한 자동차의 움직임을 패닝으로 좇는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하워드 형제의 은행강도질이 시작된다. 이것이 이 영화의 첫 번째 시퀀스이다. 꾸밈이나 치장, 과장이나 스릴 따위는 다 먼지와 함께 쓸려간 것 같은 이곳에 남은 건 오로지 필요에 의한 폭력뿐이다. 이들이 턴 은행 맞은편 타이어 매장 벽에는 십자가 모양의 창들이 보인다. 이들의 행위는 정당화되거나 용서받을 수 있을까? 이들의 영혼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일까?
형제의 강도질이 거듭되는 동안 영화의 시선은 미국의 몰락한 도시 곳곳에 머문다. 가게들은 문을 닫았고 간판들은 색이 바랬다. 벽에는 참전용사에 대한 홀대를 비난하는 낙서가 보인다. 이곳에서 멀쩡한 것이라고는 한 걸음에 하나씩 걸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채무구제 광고 간판뿐이다. 빚을 빌미로 이곳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것까지 긁어가려는 덫과 함정들이다. 이 모든 것이 현재 미국 남부 빈곤층의 현실, 나아가 미국 전체의 사회문제를 상징한다. 지나가는 행인도 하나 없고 누가 누구한테 훔칠 것이나 있겠나 싶은 이곳에서, 형제는 정작 사람들의 주머니엔 없고 은행에만 쌓여있는 돈을 노린다.
흔한 범죄 영화에 있어야 할 정교한 계획이나 통쾌한 액션 같은 것은 여기 없다. 이 영화 속의 폭력은 고단한 노동일 뿐이다. 은행을 털고 돌아와 맥주를 꺼내 마시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익숙하다. 내 것을 지키고, 내 가족을 지키고, 내 존재를 지키기 위한 삶이란, 전 세계에서든 다 매한가지다. 대단한 한탕을 노리는 것도 아니다. 지점이 텍사스에만 있는 소규모 은행에서 이들이 들고 나오는 돈은 한 번에 몇천 달러에 불과하다. 목격자 중 한 명이 얘기하듯, 은행강도를 하면서 사는 시대는 지나간지 오래다. 지금은 서부 시대가 아니다. 무법자들마저 무력해진 시대일 뿐이다.
"The days of robbing banks and living to spend the money’s long gone, ain’t they? ... Long gone for sure."
이들이 은행 강도질을 하는 것은 토비(크리스 파인)의 자식들을 위해서다. 이혼 후 1년이나 얼굴도 못 본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어머니의 유산이자 가족의 유일한 재산인 농장을 은행의 압류로부터 지키려는 것이다. 이들의 행위는 무모하지만, 멍청하다고 폄훼될 일은 아니다. 형 태너(벤 포스터)가 멍청하다는 말에 분노하는 이유는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죄짓고 멀쩡한 놈 없다는 것은 잘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짓에 뛰어든 것은 멍청해서도, 타고난 난폭성 때문도 아니다. 물려줄 것이 지긋지긋한 가난 밖에 남지 않은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때 텍사스 벌판을 호령했던 카우보이들의 현실이다. 지금은 서부 시대가 아니니 카우보이를 자처하는 이들이 설 땅이 없다. 다들 머리에 하나씩 걸쳐 놓고 있는 카우보이모자는 과거에 대한 향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마저도 하워드 형제에겐 의미 없는 일이다. 이들의 맨머리는 마치 한 시대와 세대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스키 마스크를 뒤집어쓴 카우보이들의 운명은 그 자체로 서글프게 느껴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을 뒤쫓는 이 역시 비슷한 처지라는 것이다. 은퇴를 앞둔 퇴물 보안관 마커스(제프 브리지스)는 과거의 가치를 신봉하는 인물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는 다들 약쟁이들 짓일 거라고 치부하는 이 사건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치밀한 계획 하에 이뤄진 일임을 직감한다. 마커스가 하워드 형제를 뒤쫓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베테랑 보안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과 동류(同類)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시대착오적이고(당연하게도 인종차별주의자이기도 하다) 고루한 인물이며, 은퇴와 함께 이 사회, 이 시대로부터 밀려날 운명이다. 반은 농이겠지만 가톨릭 신자이자 인디언인 동료 알베르토(길 버밍햄)에게 너희 부족은 창 들고 불 주위를 도는 게 정상인 것 아니냐고 놀리는 마커스는 분명 현실에 적응하기 힘든 캐릭터이다. 그 역시 자신이 유물(遺物) 같은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세대가 남긴 것들은 다 먼지처럼 날아가 버리고, 자신 역시 그리될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모든 것 역시 그렇게 될 운명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마커스는 과한 농담에 정색하는 동료에게 "일 년만 지나면 내 농담이 그리워질 것"이라며 빈정거린다. 결국 모든 것은 순서대로 낡을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 결말은 유물(留物)로 전락하는 것뿐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운명이기도 하지만, 이 공간의 운명이기도 하다. 서부 텍사스는 사람 하나 죽여 묻어 버려도 아무도 모를 곳임과 동시에 수많은 일들이 과거로 묻혀 버린 땅이다. 이곳은 하워드 형제나 마커스 보안관 같은 카우보이의 땅이기 이전에 인디언들의 땅이었다. 코만치족의 후예인 파커는 인디언 약탈 위에 세워진 이 문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파커 역을 맡은 배우 길 버밍햄은 실제로도 코만치족의 후예이기도 하다) 아주 먼 옛날에는 백인들의 조상 역시 토착민이었다고. 누군가 와서 그들을 죽이고 무너뜨리고 자기들처럼 만들었을 거라고. 150년 전 백인들이 빼앗기 전까지 여기 보이는 이곳은 내 조상들의 땅이었다고. 하지만 이제 백인들도 다시 빼앗기고 있으며 그건 군대가 아닌 저 망할 은행의 손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Long time ago, your ancestors was the Indians and someone else came along and killed ‘em or broke ‘em down and made you into one of them. A hundred and fifty years ago, all this was MY ancestors’ land. Everything you can see. Everything you saw yesterday. This was all Comancheria. Till the grandparents of all these folks took it. Now it’s being taken from them. Except it ain’t no army doing it. (PARKER points at the bank) It’s that son of a bitch, right there."
카우보이들도 더 이상 21세기 미국의 주인이 아니다. 태너는 스스로를 평원의 제왕인 코만치라 부른다. 아마 더 이상 이 땅의 주인이 아닌 자신들의 현실을 이런 식으로라도 초월하고픈 욕망의 발로였을 것이다. '지금까지 농장에서 소를 몰면서 살아왔는데, 이 방식이 그렇게 틀린 거라면 원래 이 땅의 주인이었던 코만치처럼 살면 되는 것 아닌가.' 아마도 태너는 이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시나리오 작가 테일러 셰리든이 이 영화의 각본에 처음 붙인 제목이 '코만체리아(Comancheria)', 즉 '코만치족의 땅'이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워드 형제가 증거를 없애기 위해 범행에 이용한 차량을 땅에 통째로 묻어버리는 장면 역시 일종의 상징으로 보인다. 마침 이들이 파묻는 차종이 미국의 국민차라 할 수 있는 카마로와 포드 타우러스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신봉해온 가치는 이렇게 과거로 묻혀버린다.
"Can’t nobody stop us ... We like the Comanches, little brother. Lords of the plains... Raiding where we please, with the whole of Texas huntin’ our shadow. Lords of the plains. That’s us."
이것은 사람에게든, 땅에게든, 돌고도는 약탈과 수탈의 역사이며, 그 사이에서 가족을 지키려는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이 과정에서 잔인한 현실의 민낯이 드러난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어느 누구도 땅의 주인이 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천연가스회사에 다니던 토비는 일이 없어져 실업자 신세가 되고, 석유회사와 은행은 그의 빈곤을 빌미로 유전이 발견된 농장을 노린다. 토비는 아이들에게 농장을 물려주기 위해, 빈곤이 아닌 미래를 물려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미국의 아버지, 나아가 전 세계 모든 아버지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마커스가 길을 지나던 길에 만난 카우보이는 들불을 피해 소를 몰며 이렇게 얘기한다. 21세기에 불 피해서 소나 몰고 있는 이 짓거리는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도 없는 일이라고.
"It’d be easier if I just stood here and let it turn me to ashes. Put me out of my misery ... It’s the 21’st century and I’m racing a fire to the river with three hundred cattle. No wonder my kids don’t wanna do this nonsense for a living."
이 영화의 원제는 '로스트 인 더스트'가 아닌 'Hell or High Water'이다. 보통 'Come hell or high water'라 하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라는 뜻의 관용구로 쓰이니까, 이 제목은 그 어려움, 역경, 고난, 장애물을 뜻하는 셈이다. 이 말이 성경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1900년 전후 이전에는 잘 쓰이지 않았던 표현이라고 하며, 처음 쓰인 사례는 1901년, 1916년 등으로 추정하는 이에 따라 다른 결론을 내린다. 그중 가장 강하게 제기되는 설은 이 표현이 카우보이들이 소몰이 중 만나게 되는 수많은 장애물로부터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관용구의 의미뿐 아니라 유래까지 영화의 주제의식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마커스가 만난 카우보이나, 강도질을 해서라도 아이들에게 농장을 물려주려는 토비나, 결국 이 장애물과 같은 현실 대신 좀 더 밝은 미래를 물려주고 싶은 보통의 아버지일 뿐이다. 아버지의 일이란, 변하는 가치에 적응해 가족과 함께 살아남는 것이기도 하지만, 현 세대의 과오와 착오를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어떤 식으로든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 땅의 주인이 될 수 없는 아이러니가 계속될 것이기에, 그들의 분투는 눈물겹다.
영화 속 카우보이의 말대로, 21세기에 카우보이는 유효하지 않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는 서부극이라는 장르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서부극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역설적인 방식으로 증명해낸다. 서부시대가 아닌 시공간에 펼쳐지는 이 영화는, 결과적으로 '몰락한 카우보이들의 초상을 다룬 현대의 서부극'이자, 이 장르를 '타자의 시선으로 비틀어 재구성한 새로운 서부극'이 됐다.
형제의 강도 행각이 끝을 맺고 형의 희생으로 동생의 자식들은 미래를 얻는다. 은퇴한 마커스가 경찰의 추적을 따돌린 토비를 찾아가 벌어지는 마지막 시퀀스의 긴장감은 압도적이다. 총을 들지 않고도 마치 고전 서부극의 마지막 대결 신 같은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결국 이들은 서로에게 총을 겨눌 이유가 없다. 어차피 모든 것은 총 하나 겨누지 않고 모든 것을 빼앗아가는 시스템에 의해 과거의 먼지가 되어 사라질 테니까 말이다. 이 서부극에는 강자도, 약자도, 어느 누구도 이미 구세대가 되어버린 이상 살아남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