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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seo Nov 20. 2020

사냥의 시간 - 계속 후퇴하고 도망가는 이야기

Time to Hunt, 2020


* 이 글은 영화의 결말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 시간을 사냥당했다'라는 평이 매우 적절했다. 


'사냥의 시간'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큰 기대를 모았던 작품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넷플릭스로 개봉할 수밖에 없었던 게 어찌 보면 다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관에 오가는 시간만큼은 사냥 당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꼼짝없이 좌석에 붙잡혀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봐야만 하는 상황이었다면 분명 덫에 걸린 사냥감이 된 기분이었을 것이다. 중간에 멈추거나 뒤로 넘기며 볼 수 있는 일말의 선택권이 있었음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사냥의 시간'은 말 그대로 나라 전체가 슬럼이 된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한다. 다소 전형적이지만, 미래 대한민국을 그라피티가 가득한 벽과 부랑자가 넘치는 도시로 그려낸 상상력은 분명 화면에 충실히 담겼다. 그래서 아쉬움이 더 배가된다. 이 공들인 배경이 다른 좋은 이야기를 만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냥의 시간'은 감독의 전작 '파수꾼'의 정서를 답습한다. 단순히 출연 배우들만 비슷한 게 아니라 성장통을 앓는 인물들의 정서가 상당 부분 이어졌다. 막연하게 암울했던 '파수꾼' 소년들의 꿈을 '사냥의 시간' 속 청년들의 답 없는 현실로 구체화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서가 그렇다는 것뿐이다. '사냥의 시간'은 '파수꾼'에 비해 스케일은 커졌지만, 서사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아니, 줄어들다 못해 납작해졌다. 이들에게는 이렇다 할 관계도, 각자의 사연도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다.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지점에서 영화는 계속 후퇴한다. 드라마를 품고 있을 사냥감들은 계속 도망가기에 급급하다. 


소년들은 청년들이 되었고, 세상은 훨씬 더 암울해졌는데, 감독의 이야기는 오히려 깊이를 잃고 말았다. 열심히 채색하고 대단한 것이 든 것처럼 포장해도 빈 상자는 빈 상자일 뿐이다. '사냥의 시간'의 이미지들은 한 무더기의 겉멋에 불과할 뿐 그 어떤 메타포로도 기능하지 못한다. 



분명 스토리가 전부는 아니다. 국내 관객들이 이야기를 지나치게 중시하고 '말 되는' 플롯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냥의 시간'의 엉성함을 변호하는 핑계가 될 수는 없다. 이 영화는 일반적인 스토리텔링을 일부러 배제한 것도, 어떤 다른 요소로 대체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내러티브를 구축하는 데 철저하게 실패했을 뿐이다. 


스토리의 빈약함뿐만 아니라 열린 결말 역시 문제다. 대략 암시는 되지만 상수(박정민 扮), 기훈(최우식 扮)의 생사는 알 수 없는 상황으로 끝을 맺는다. 물론 주인공 준석(이제훈 扮)에게 있어 그 무지에서 오는 답답함은 곧 불확실한 미래와 맞닿아 있고, 최종적으로 인물을 움직이는 동인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를 관객이 필요한 장치로 납득할 수 있으려면 내러티브에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장르 서사를 펼치다 뜬금없이 인물들의 결말 부분만 지우고 뭔가 의미가 있는 척을 하는 것은 기만으로 보인다.  그것도 어설픈 기만. 어색한 대사들을 견디고 겨우 캐릭터에 감정이입 하는 데 성공한 관객들은  일차적으로 주인공 일행이 보이는 과할 정도의 유약함과 비상식적인 대처에 실망하게 되는데, 이를 어찌어찌 버텨냈다고 해도 생사조차 알려주지 않는 이 마지막 기만은 아마 누구도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사냥의 시간'은 그 어떤 영화보다도 더 장르 영화의 외피를 두르고 싶어 하는 영화다. 그러므로 '사냥의 시간'에 대한 혹평을 두고 관습의 착시에 빠져 장르 영화와 같은 이야기 전개를 기대한 탓이라거나, 심지어 이 영화가 표현주의 영화로 분류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식으로 평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다. 그것은 이 영화에 대한 지나친 고평가를 넘어, 관객에 대한 저평가이자 모독에 해당한다. 



사실 이 영화의 완성도는 초반부 대사에서부터 박살이 난다. 어색하고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대사들은 스트리밍을 멈출지 계속 고민하게 만든다. 갓 출소한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디스토피아 한국을 훑고 난 뒤 '빵에서 알게 된 형님'에서 시작해 '엄마가 하와이 갈 거라고 했는데'를 지나 '대만에 아는 형님'에 이르면, 도대체 이 대사를 쓴 사람은 평소에 다른 사람과 어떻게 대화를 나누는 건지 의아할 지경에 이른다. 


양아치 흉내를 내기에 급급한 평이하고 상투적인 표현들은 배우들의 호연으로 어떻게 묻고 간다고 하더라도, '사냥의 시간' 속 대사는 최근 몇몇 한국 영화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나는 문제를 여실히 보여준다. 


첫 번째로 굳이 대사로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대사로 처리한다.  예를 들어 준석이 가고 싶은 곳이 하와이든, 대만이든, 하와이 엽서 이미지 정도로도 충분히 갈음할 수 있는 얘기였다. 굳이 준석의 입을 빌린다면 좀 더 그럴듯한 지점, 세련된 맥락에서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배경 설명을 위해 낭비되는 대사도 많다. 환율과 물가를 운운하고,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고 한탄하는 장면들에서 관객은 인물들의 처지에 공감하기보다 캐릭터들이 마치 게임 속 NPC처럼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해 연출자의 메시지를 읊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렇듯 연출자의 의도를 드러내기에 급급한 대사가 두 번째 문제다. 목적성이 뻔히 보이는 대사는 감정이입과 몰입을 방해한다. 애써 이미지로 구축한 세계관 위에서 정작 스토리텔링은 작위적인 대사에 의존한다는 게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사냥의 시간'은 사실상 연극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다분히 연극적인 영화가 됐다.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 대화한다기보다 홀로 무대 위에 선 배우처럼 모놀로그를 이어간다. 문어체로 이루어진 대사는(준석이 추격자 한을 '그자'라고 지칭하는 식) 영화를 더욱더 어설픈 연극으로 만든다. 



영화 속에서 준석은 하와이 대신 대만을 꿈꾼다. 그가 있는 곳은 꿈과 희망조차도 대리이자, 유사한 것으로 가져야 하는 세상인 셈이다. 어차피 에메랄드빛 해변은 어딘지 모를 먼 곳에 있고, 지금 이들이 선 곳은 온통 붉은 조명뿐이다. (영화 속의 컬러로 대표되는 이미지들이 어쩌면 영화의 스토리나 대사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냥의 시간'이 품었던 야심과 이상 역시 결국 유사한 것으로 대체되고 만다. 에메랄드빛 영화는 어차피 될 수 없었고, 영화는 유사한 영화들에서 보았던 무언가를 흉내 내어 뭐라도 성취하려는 데 급급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마티유 카소비츠의 '증오', 재패니메이션 '아키라' 등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분위기는 대만 어디쯤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이 영화는 대체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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