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짧은 리뷰

사냥의 시간 - 계속 후퇴하고 도망가는 이야기

Time to Hunt, 2020

by Junseo


* 이 글은 영화의 결말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 시간을 사냥당했다'라는 평이 매우 적절했다.


'사냥의 시간'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큰 기대를 모았던 작품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넷플릭스로 개봉할 수밖에 없었던 게 어찌 보면 다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관에 오가는 시간만큼은 사냥 당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꼼짝없이 좌석에 붙잡혀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봐야만 하는 상황이었다면 분명 덫에 걸린 사냥감이 된 기분이었을 것이다. 중간에 멈추거나 뒤로 넘기며 볼 수 있는 일말의 선택권이 있었음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movie_image (15).jpg
movie_image (12).jpg
movie_image (13).jpg
movie_image (20).jpg


'사냥의 시간'은 말 그대로 나라 전체가 슬럼이 된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한다. 다소 전형적이지만, 미래 대한민국을 그라피티가 가득한 벽과 부랑자가 넘치는 도시로 그려낸 상상력은 분명 화면에 충실히 담겼다. 그래서 아쉬움이 더 배가된다. 이 공들인 배경이 다른 좋은 이야기를 만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냥의 시간'은 감독의 전작 '파수꾼'의 정서를 답습한다. 단순히 출연 배우들만 비슷한 게 아니라 성장통을 앓는 인물들의 정서가 상당 부분 이어졌다. 막연하게 암울했던 '파수꾼' 소년들의 꿈을 '사냥의 시간' 속 청년들의 답 없는 현실로 구체화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서가 그렇다는 것뿐이다. '사냥의 시간'은 '파수꾼'에 비해 스케일은 커졌지만, 서사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아니, 줄어들다 못해 납작해졌다. 이들에게는 이렇다 할 관계도, 각자의 사연도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다.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지점에서 영화는 계속 후퇴한다. 드라마를 품고 있을 사냥감들은 계속 도망가기에 급급하다.


소년들은 청년들이 되었고, 세상은 훨씬 더 암울해졌는데, 감독의 이야기는 오히려 깊이를 잃고 말았다. 열심히 채색하고 대단한 것이 든 것처럼 포장해도 빈 상자는 빈 상자일 뿐이다. '사냥의 시간'의 이미지들은 한 무더기의 겉멋에 불과할 뿐 그 어떤 메타포로도 기능하지 못한다.


movie_image (3).jpg
movie_image (18).jpg
movie_image (23).jpg


분명 스토리가 전부는 아니다. 국내 관객들이 이야기를 지나치게 중시하고 '말 되는' 플롯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냥의 시간'의 엉성함을 변호하는 핑계가 될 수는 없다. 이 영화는 일반적인 스토리텔링을 일부러 배제한 것도, 어떤 다른 요소로 대체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내러티브를 구축하는 데 철저하게 실패했을 뿐이다.


스토리의 빈약함뿐만 아니라 열린 결말 역시 문제다. 대략 암시는 되지만 상수(박정민 扮), 기훈(최우식 扮)의 생사는 알 수 없는 상황으로 끝을 맺는다. 물론 주인공 준석(이제훈 扮)에게 있어 그 무지에서 오는 답답함은 곧 불확실한 미래와 맞닿아 있고, 최종적으로 인물을 움직이는 동인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를 관객이 필요한 장치로 납득할 수 있으려면 내러티브에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장르 서사를 펼치다 뜬금없이 인물들의 결말 부분만 지우고 뭔가 의미가 있는 척을 하는 것은 기만으로 보인다. 그것도 어설픈 기만. 어색한 대사들을 견디고 겨우 캐릭터에 감정이입 하는 데 성공한 관객들은 일차적으로 주인공 일행이 보이는 과할 정도의 유약함과 비상식적인 대처에 실망하게 되는데, 이를 어찌어찌 버텨냈다고 해도 생사조차 알려주지 않는 이 마지막 기만은 아마 누구도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사냥의 시간'은 그 어떤 영화보다도 더 장르 영화의 외피를 두르고 싶어 하는 영화다. 그러므로 '사냥의 시간'에 대한 혹평을 두고 관습의 착시에 빠져 장르 영화와 같은 이야기 전개를 기대한 탓이라거나, 심지어 이 영화가 표현주의 영화로 분류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식으로 평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다. 그것은 이 영화에 대한 지나친 고평가를 넘어, 관객에 대한 저평가이자 모독에 해당한다.


movie_image (17).jpg
movie_image (25).jpg
movie_image (26).jpg
movie_image (27).jpg


사실 이 영화의 완성도는 초반부 대사에서부터 박살이 난다. 어색하고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대사들은 스트리밍을 멈출지 계속 고민하게 만든다. 갓 출소한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디스토피아 한국을 훑고 난 뒤 '빵에서 알게 된 형님'에서 시작해 '엄마가 하와이 갈 거라고 했는데'를 지나 '대만에 아는 형님'에 이르면, 도대체 이 대사를 쓴 사람은 평소에 다른 사람과 어떻게 대화를 나누는 건지 의아할 지경에 이른다.


양아치 흉내를 내기에 급급한 평이하고 상투적인 표현들은 배우들의 호연으로 어떻게 묻고 간다고 하더라도, '사냥의 시간' 속 대사는 최근 몇몇 한국 영화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나는 문제를 여실히 보여준다.


첫 번째로 굳이 대사로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대사로 처리한다. 예를 들어 준석이 가고 싶은 곳이 하와이든, 대만이든, 하와이 엽서 이미지 정도로도 충분히 갈음할 수 있는 얘기였다. 굳이 준석의 입을 빌린다면 좀 더 그럴듯한 지점, 세련된 맥락에서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배경 설명을 위해 낭비되는 대사도 많다. 환율과 물가를 운운하고,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고 한탄하는 장면들에서 관객은 인물들의 처지에 공감하기보다 캐릭터들이 마치 게임 속 NPC처럼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해 연출자의 메시지를 읊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렇듯 연출자의 의도를 드러내기에 급급한 대사가 두 번째 문제다. 목적성이 뻔히 보이는 대사는 감정이입과 몰입을 방해한다. 애써 이미지로 구축한 세계관 위에서 정작 스토리텔링은 작위적인 대사에 의존한다는 게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사냥의 시간'은 사실상 연극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다분히 연극적인 영화가 됐다.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 대화한다기보다 홀로 무대 위에 선 배우처럼 모놀로그를 이어간다. 문어체로 이루어진 대사는(준석이 추격자 한을 '그자'라고 지칭하는 식) 영화를 더욱더 어설픈 연극으로 만든다.


movie_image (28).jpg
movie_image (29).jpg
movie_image (30).jpg
movie_image (31).jpg


영화 속에서 준석은 하와이 대신 대만을 꿈꾼다. 그가 있는 곳은 꿈과 희망조차도 대리이자, 유사한 것으로 가져야 하는 세상인 셈이다. 어차피 에메랄드빛 해변은 어딘지 모를 먼 곳에 있고, 지금 이들이 선 곳은 온통 붉은 조명뿐이다. (영화 속의 컬러로 대표되는 이미지들이 어쩌면 영화의 스토리나 대사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냥의 시간'이 품었던 야심과 이상 역시 결국 유사한 것으로 대체되고 만다. 에메랄드빛 영화는 어차피 될 수 없었고, 영화는 유사한 영화들에서 보았던 무언가를 흉내 내어 뭐라도 성취하려는 데 급급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마티유 카소비츠의 '증오', 재패니메이션 '아키라' 등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분위기는 대만 어디쯤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이 영화는 대체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던 것일까.


movie_image (2).jpg
movie_image (19).jpg
movie_image (21).jpg
movie_image (24).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에놀라 홈즈 - 빅토리아 시대 소녀의 자아찾기 활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