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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seo Dec 07. 2020

경계선- '인간다움'의 경계선

GRANS, BORDER, 2018


* 결말을 포함해 영화 줄거리의 상당 부분을 담고 있는 글입니다. 영화를 보시고 읽으시길 권합니다. 



인간은 나와 다른 것에 대해 반응하는 방식이 남다른 생명체이다. 자랄 대로 자란 자의식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우선하게 만들고, 나를 중심으로 울타리를 치게 한다. 그 울타리는 점점 더 높은 철책이 되고, 성벽이 되어, 하나의 관문을 만들기에 이른다. 사람들은 그 관문 앞에 서서 남을 가려내고, 나와 다른 것은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다. 


그 '경계선'은 곧 '구분선'이자 '저지선'이 된다. 



영화 '경계선'의 주인공 티나는 주류의 인간들이 쳐놓은 경계 밖의 인물이다. 남과 다른 외모 탓에 사람들은 그녀에게 혐오와 멸시의 시선을 보낸다. 냄새로 감정을 읽는 그녀의 특별한 능력은 인간의 시각에서 보자면 사람보다는 짐승의 특성에 가깝다. 멸시와 거부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코를 벌름거리며 주변 냄새를 맡는 티나의 모습은, 마치 어떻게든 인간 사회에 적응하려 애쓰는 동물처럼 처연하게 보인다.


그녀가 얼마나 자신을 인간 사회에 끼워 맞추며 살아가고 있는지는, 동거인 롤랜드와의 일방적인 관계가 단적으로 보여준다. 롤랜드는 변변한 벌이 없이 티나에게 빌붙어 사는 기생충 같은 존재다. 그에게 티나는 일용할 양식과 머무를 거처를 제공하는 숙주이자, 마음이 동하면 욕구를 채우는 대상일 뿐이다. 


롤랜드가 주로 하는 일은 애견 대회에 나갈 개들을 키우는 것이다. 그리고 TV로 개 경주를 보며 소일한다. 그의 일은 동물을 인간의 기준에 맞춰 등수를 매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롤랜드는 인간들이 티나에게, 인간이 다른 존재들에게 자행해온 일들을 함축하고 있는 캐릭터다. 인류는 갖가지 방식으로 그들을 줄 세운 뒤 이용하고 착취하며 평가해왔다. 



인간 사회 안에서의 티나는 모든 일에 자신 없는 모습이다. 사람들의 수치심, 죄책감, 분노와 같은 감정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덕분에 밀수범을 잡아내는 데 탁월한 성과를 보이지만, 그녀의 동료들뿐 아니라 그녀 자신도 자기에게 냉담하기만 하다.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문득 티나가 자신의 감정도 냄새로 맡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에서 어떤 냄새를 맡았을까. 퀴퀴한 흙 내음이나 벌레 냄새였을지도. 그것은 그녀에게 향기임과 동시에 악취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냄새를 맡으며 안정감과 수치심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그 냄새가 지나간 자리에는 자기 존재에 대한 확인과 함께, 남과 다르다는 데서 오는 열등감이 뒤따랐을 것이다. 


혐오와 경멸로 점철된 시선 앞에 그녀는 무력하기만 하다. 그녀의 일상 역시 무기력하다. 좋든 싫든 매일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숨긴 감정을 맡아야만 하는 일상. 자신의 치부를 늘 드러내고 살 수밖에 없는 그녀에게 남의 치부를 들춰내는 일이 어떤 의미였을지 모르겠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들을 잡아낼 때마다 그녀가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일말의 통쾌함이었을까? 아니면 차마 사람이 해서는 안 될 짓을 벌이는 짐승들에게 분노나 환멸을 느꼈을까? 티나가 아동 성폭행범이 숨겨둔 증거를 찾은 곳은 다름 아닌 트로피였다. 사냥한 짐승의 머리를 박제해 전리품으로 벽에 걸어둔 것을 트로피라고 부른다. 이 범죄자에겐 이 모든 악행이 사냥이나 다름없었다. 추악한 인간이 내걸어 놓은 트로피를 보며 티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머리가 내걸린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을까?



그러던 어느 날, 티나 앞에 수상한 자, 보레가 나타난다. 그의 얼굴은 묘하게 티나와 닮은 구석이 있다. 하지만 태도는 티나와 정반대다. 그는 행동에 거침이 없고, 인간 사회에 적응하려는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없어 보인다. 시침과 분침이 없는 시계를 갖고 다니는 것을 보면 세상의 질서에서 벗어난 자임이 분명해 보인다. 애벌레 부화 장치같이 보이는 물건을 들고 다니는 것부터 모든 게 수상하지만, 티나는 그에게서 자신과 같은 냄새를 맡는다. 


티나는 보레에게 묘하게 끌리는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가 없다. 인간의 기준과 잣대에 맞춰 살아온 티나는 지금까지 자신을 못생긴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보레를 만나면서 자신이 마음속으로 금 그어온 경계선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티나와 보레는 알몸으로 숲속을 뛰어다니고, 몸을 섞기에 이른다. 남녀 성기를 뒤바꾸어 달고 있는 그들의 정사는 말 그대로 충격적이다. (아마도 영화 역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정사 장면 중 하나로 꼽힐 수 있을 것 같다) 암수 역할이 뒤바뀐 그들의 모습을 통해, 그들과 인간의 경계는 더욱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통해 스크린을 사이에 둔 영화와 관객 간의 경계선 역시 확고해진다. 


이 장면을 통해 티나가 인간 기준에서 불임인 이유를 비롯해 많은 것들이 설명되지만, 캐릭터에 대한 공감의 시선은 다시 갈 곳을 잃는다. 결국 감독의 의도는 관객이 자기 마음속에 자리한 경계선을 마주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녀를 동정하던 관객의 시선은 새로운 기준선을 찾기 위해 분주해진다. 자신이 '기형'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티나의 모습은 '자아의 성장'으로 해석되지만, 자신이 아예 '인간'도 아니었음을 자각하는 낯선 존재의 모습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지, 우리 인간들은 정확히 알지 못한다. 



트롤 민담에 기반한 '체인질링'의 테마가 현실 사회에서 인신매매, 아동 성폭행과 연결될 때 경계선은 한 번 더 흔들린다. 단순히 인간 대 비인간의 구도로 흘러가던 영화는 보레가 연루된 범죄의 전말이 드러나면서 이분법적인 선악 구분이 모호한 지점으로 나아간다. 


보레는 역겨운 인간들이 자신을 해치게 도울 뿐이라며 인간의 아이를 훔쳐 팔아넘긴다. 당연히 그를 검거해야 할 것 같지만, 티나의 입장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러한 판단은 그녀가 인간 사회에서 배운 행동 양식과 윤리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티나는 '인간의 이성'과 '트롤의 본능'이 충돌하는 지점에 선다. 


티나는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에 몰린다. 결국 보레를 검거하기로 하지만, 이를 이성을 앞세운 결과라고 단정하긴 어렵다. 자신이 따르려는 것이 인간으로부터 배운 규칙인지, 자연의 보편타당한 원칙인지 그녀로서는 알 길이 없다. 보레를 혐오하는 자신의 감정이 인간화된 도덕심의 발로(發露)인지, 모든 생명체에 통용되는 보편적 정서인지도 불분명하다. 


보레는 종족 번성의 사명을 역설하지만, 티나는 누구도 해치기 싫다며, '이렇게 생각하면 인간인 거냐'고 반문한다.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맘껏 흙냄새를 맡고 벌레를 집어먹을 수 있게 된 것 같지만, 경계선에 선 존재에게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결국 티나는 홀로 인간 사회에 남는다. 대신 완전한 트롤의 삶을 산다. 그녀의 결정은 여러모로 인상적이다. 인간과 트롤, 어느 쪽의 속박에도 구속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집은 폐허가 되었지만, 그것은 인간의 시각에서 본 결과일 뿐, 트롤의 기준에서는 최고의 안식처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기준에서 기형에 불임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온 그녀에게 아기가 생긴 것 역시 상징적이다. 그녀는 새 생명에게 곤충을 먹인다. 그것은 인간의 규칙도, 트롤의 기준도 아닌 오롯이 그녀 자신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다. 분명 티나와 아기의 미래는 험난하겠지만, 중요한 건 어느 쪽의 강요에도 무너지지 않고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영화 '경계선'은 관객의 편견을 계속 건드린다. 관객에 따라 구분선이 모호해질 수도, 반대로 저지선이 더 공고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들이 이상한 것인지, 인간이 만든 질서를 강요하는 우리가 이상한 것인지, 끊임없이 되묻게 될 것이다. 


'경계선'이 제공하는 영화적 경험은 끊임없는 전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기존의 이야기를 전복하고, 그에 익숙해질 때쯤 다시 전복하는 식으로, 관객의 정서와 가치관을 쥐락펴락한다. 영화적 경험을 통해 자신의 편견을 직시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값진 기회일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기생충'과 닿아있는 부분도 느껴졌다. '기생충'은 지배와 피지배라는 단순 이분법 구도에서 벗어나 '선을 넘는 것'에 대한 영화였다. '기생충'에서 선을 넘는 '기철'의 냄새, '경계선'의 티나가 맡는 감정의 냄새가 소재상의 유사성을 보여주는 것 같아, 그 부분도 흥미로웠다)



결국 궁극적으로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다움'을 가르는 경계선은 어디일까. 


우리는 어디에 선을 긋고 울타리를 만들고 있는가. 우리는 어느 선을 넘으면 안 되는가. '경계선'이 '경계의 시선'으로 작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 선 때문에 고통받는, 경계선에 선 자들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누군가를 배척하는 나의 감정에서 혹시 악취가 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소수자의 문제를 다룬 정치적 담론은 물론, 성장 서사에도 모두 통용되는 질문일 것이다. 경계선을 사이에 둔 대결 구도의 서사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 온당하다. 


영화가 던지는 수많은 질문에 모두 답할 수는 없겠지만, 이 메시지만은 분명하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것. 그 어떤 잣대와 경계에도 나를 가두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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