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 연을 알게되다

방정식을 배운 이유

by 준stand

지금 내 얼굴은 전생에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이라 한다.

나와 가까이 지내는 이들도 닮은 부분이 많다.


닮아간다는 논리보단 이미 닮은 채로 만난 확률이 가장 높은 그 장소와 시간에서 조우한다.

트루먼 쇼의 짜여진 각본은 실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 같다.


세상에 나와 가장 먼저 마주한 엄마, 아빠에게 시선이 향할 때처럼,

집 밖 세상을 마주했을 때, 그런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이를 찾는 것 역시 같은 이치일까.


아이는 첫걸음마를 할 때, 스스로도 감동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는 감동을 울음으로 표현한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 없이 가까운 이들에 의해 스스로를 정의하다

갑작스레 펼쳐진 열아홉 입시를 마친 이후의 자유에서 나를 마주하게 된다.


대학은?, 무슨 과를 가지?, 그럼 내 고등학교 친구들은?


우선 좋은 곳으로 써보자, 부모님이 원하는 과로, 이렇게 만날 수 있는 자리가 졸업식이 마지막이라니...


외부의 시선에 영향을 가장 많이 받고, 우선 나와 닮았던 이들로 하여금 행동 기준을 정하게 되고,

당연함이 당연하지 않게 되는 그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곧 자유로움을 몸소 느끼는 시점이다.


우리가 인연으로 여겼던 모든 것들은 자유라는 개념 아래 무너진다.


당연하던 것에 물음표를 찍어보기도 하고,

알고있던 기준을 뒤집어보기도 하고,

만남 뒤엔 헤어짐을 받아들일 준비도 필요한데


우리가 태어나 첫걸음마를 했을 때 이어 사회의 첫걸음마 역시 감동을 느낄 겨를 없이 무너진다.


의심도, 비교도 많아진다.

기준이 사라진다.


상대가 달리면 따라 달리고, 오른쪽을 향해 서면 같은 방향에 서야 할 것만 같다.

나만의 기준을 찾기 정말 어려운 환경이고, 동시에 나만 빼고 다들 잘하는 것 같다.

더 불안하고 귀가 얇아진다.


내 경험이라 여전히 생생하다.


한참 헤메고 나면, 익숙함에 속아 간과했던 주변의 내 것, 가장 나를 잘 아는 사람에 귀 기울이기 시작한다.


가까이에 기울이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멀리 보면 내가 없는 것들 투성이다.

A군의, B양, C군이 가진 장점은 모두 내게 없다.

그렇지만 탐난다.


가까이 보면 일대일 대응인데, 멀리서 보니 네가지 중 하나만 있다.

난 25% 만족, 75%는 불만족.


단순하지만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린다.

세상은 참아야 할 것이 많다.


생각해도 이해가지 않는 것들이 분명 있는데,

이해가지 않는 것들은 사실 너무 단순하다.


인연도 단순한 개념이다.


시간과 장소가 만들어 준 그때의 '인'.

이후 만들어간 '연'.


찰나의 순간에 만들어지는 관계가

평생을 기약하게 되는 모순이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런 모순 속에 살아가며 때론 그 모순을 믿고 살아가는 현실인만큼.


세상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무섭지도 않다.

단순하지만 똑같은게 없을 뿐이다.


그저 우리는 그 순간에 몰입하면 된다.

복잡한 몰입은 오히려 가볍다.

단순한 몰입이 무겁고 오래간다.


인연에 몰입한다.

그리고 몰입하는 때가 있다.


늦기전에 고마웠다고 한마디라도 전하고, 용기를 내어 말을 건네.

'고마웠다고, 그리고 미안했다고'


그 때의 고마움과 미안함은

그 때만이 전달할 수 있는 감정이다.


인연은 반복된다.

몰입이 반복되면 매 순간 최선을 다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 순간 자체로 의미있다면 되었다.


첫걸음마는 '인'이 만들어지는 시작이고,

몰입은 '연'을 만드는 과정이다.


단순함에서 시작된 '인연'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정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