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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권은 어디에 있을까?(2)

긴급 여권을 발급받다

여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부터 나와 남편은 자책했다. 가방을 짐칸에 두지 말걸. 버스를 타지 말걸. 나스카까지 오지 말걸. 페루에 오지 말걸. 가방과 여권을 훔쳐간 사람을 원망했다. 그 사람이 우리를 옆에 두고도 태연하게 가방 속에 있는 물건을 꺼내고 가방을 가져가는 모습을 상상하니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런 쓸데없는 상상은 왜 자꾸 하는 건지. 나는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집이 있는 칠레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니 한국으로 가고 싶었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나 칠레로 가고 싶어."

남편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래도 남은 여행은 하고 가자!"


아이들은 마추픽추를 보고 싶다고 했다. 아이들과 남편이 그렇다고 하니 나는 칠레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접었다. 이 기분으로 집에 돌아가면 집에서도 계속 우울하게 지낼 것이 뻔했다. 빨리 마음을 추스르고 여행을 이어가는 방법 밖에 없었다.


휴대폰 충전기까지 없어진 나와 남편은 버스에서 배터리를 아껴 가며 호텔 예약 및 취소, 항공권 탑승 날짜 변경을 마쳤다. 리마로 돌아가서 여권을 다시 발급받을 준비를 해야 했다. 여행 일정이 길어졌다. 하필 다음 날이 일요일이어서 월요일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호텔비가 늘어났다. 동시에 식비도 늘어났다. 여행 가방에 가지고 갔던 햇반과 컵라면을 꺼내 먹을 때가 왔다.


남편과 나는 얼른 이 일을 잊어버리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쉽게 잊히지 않았다. 자꾸 상상하고 속상했다. 버스에 있는 7시간 동안 과자도 음료수도 아무것도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속상한 마음을 잊으려 계속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중간중간 눈물이 날 뻔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속상했을까.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려서일까. 여행 일정이 꼬여버린 것 때문일까. 나의 부주의함이 원망스러웠을까.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는 완벽한 여행에 대한 기대가 무너져서일까. 아니면 가장 열심히 준비했던 여행을 망쳐버려서 내 노력이 헛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일까. 모두 다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 속상함은 저 많은 이유 중 어디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을까. 나는 안다. 나의 속상함은 내 노력을 인정받지 못한 상황에서 비롯되었음을.


나는 내가 만든 여행 계획표를 들고 다니면서 여행 일정이 하나씩 끝날 때마다 안도했다. 그렇게 무난하게 이 여행이 끝나고 나면 내가 했던 고생을 보상받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여행은 그렇지 못했다. 여행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여행 계획을 짜느라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어떤 일을 결과로만 평가하는 나의 습관이 이번에도 작동한 것이다. 나는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했다. 이런 나의 마음을 빨리 알아차렸더라면 그때 덜 속상했을 텐데.


저녁 늦게 리마에 도착해 컵라면을 먹고 잠든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어제 일어났던 모든 마음들이 옅어져 있었다. '빨강 머리 앤'에 나오는 말처럼 오늘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몸도 덜 무거웠다. 아침은 이래서 좋다. 지난밤에 일어났던 모든 것들이 다시 리셋되는 느낌. 슬픈 마음도 불행했던 사건들도 모두.


여권을 잃어버린 상황을 대비해 가져갔던 증명사진도 없어졌기에 일요일에도 문을 여는 사진관을 찾아 가격을 흥정하고 여권 사진을 찍었다. 빨리 월요일이 오기를 기다렸다.


월요일이 되자 리마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 가서 1인당 53달러를 내고 긴급 여권을 받았다. 반나절만에 여권이 만들어졌다. 긴급 여권은 출국 1회, 입국 1회만 허용되기 때문에 칠레에 가서 여권을 다시 만들어야 하지만 이번 여행을 이어가는 데는 충분했다. 나중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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