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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영 Dec 21. 2022

카페인 우울증과 행복의 조건

‘카페인 우울증’이라는 신종 질환이 있다.

커피를 많이 마셔서 우울감이 온다는 게 아니라, 카카오톡/페이스북/인스타그램 등 SNS에서 타인의 행복한 일상을 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병이란다.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이게 무슨 해괴하고도 바보 같은 소리인가 싶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마냥 우습게만 여길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 행복지수 1위로 유명했던 국가 부탄을 기억하는가.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그들이지만, 최근에는 순위가 95위까지 추락했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인터넷 보급으로 인한 현실 자각과 타국과의 비교라는데. 근거가 빈약하긴 하나, 충분히, 아주 충분히 그럴 법한 이야기다.


행복 1위 국가조차도 이 지경이라는데, 날 때부터 타인의 시선에 민감한 DNA가 장착된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죽할까. 인터넷은 얼마나 빠르며 SNS는 좀 많이 하나. 우울증이 오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 이거다.




나는 SNS에 관심이 없다. 이용하는 서비스라곤, 보통의 삶을 영위하는데 필수가 된 카카오톡과 여기 이 공간이 전부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일상을 타인에게 공유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해서이다. 그러니 콘텐츠의 ‘주’가 사진이나 영상인 대부분의 SNS와 나는, 궁합이 좋으려야 좋을 수가 없다. 잠시 발을 담갔던 싸이월드에서도 사진첩은 굳게 닫혀있었다.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나는 운 좋게도(?) 카페인 우울증에 슈퍼 항체를 가진 몸이 되었다. 원래도 남들 사는 것에 관심이 별로 없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데다가 애초에 SNS를 거의 하지 않으니, 이런 바이러스 따위는 침투할 여지 자체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주변에는 생각보다 많은 환자들이 보인다. 사회의 양극화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앞으로도 그 숫자가 줄어들기란 쉽지 않을 것만 같다. 바이러스의 숙주이자 매개인 SNS가 개개인의 핸드폰마다 버젓이 깔려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감염자가 늘어나는 만큼, 그 양태 또한 다양하다. 그간 나의 얕은 관찰력으로 지켜봐 온 결과, 카페인 우울증의 시기별 증상은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초기. 대표적인 증상은 ‘강박과 집착’이다.

이때의 환자들은 어디만 갔다 하면 SNS에서 검색부터 한다. 혹은 검색부터 한 후, 만족스러운 장소를 찾아내야만 길을 나선다. 여기까지만 보면 별일 아니지만, 강박과 집착이 개입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환자들은 강박적으로 핫플레이스를 찾고, SNS 업로드를 위해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기다린다. 병적인 집착의 시작. 온라인상의 내가 오프라인의 진짜 자신보다 중요해지는, 전형적인 감염 초기 증상이다.


다음은 중기. 이제는 ‘질투와 분노’가 시작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범접할 수 없는, 본인보다 백배는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계속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초기는 생략하고 바로 중기로 넘어오는 환자들도 많다. 이들의 눈에 자신보다 불행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나만 불행할 뿐이다. 쟤는 뭔데 저렇게 좋은 곳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는 걸까. 질투하고 질투하다, 결국 화가 난다. 분노의 대상은 ‘쟤’가 아니라 대개 자기 자신, 부족하고 모자란 본인의 환경이다. 이것이 반복되면, 증상은 자연스레 말기로 이어진다.


말기 환자들은 ‘체념과 우울’ 증세를 보인다.

원래 비등해야 따라갈 의지도 생기는 법이지, 차이가 너무 크다 싶으면 금세 포기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어차피 자신은 황새를 쫓는 뱁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체념은 쉽게 되지만, 진짜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행복의 기준점이 되어버린 타인의 삶과 그에 한참 미달하는 본인의 삶. 남은 것이라곤 신세 한탄과 하염없는 우울감뿐이니까. 벗어나기 위해서는 SNS 속 허상과의 격리가 필요하나, 야속한 손가락의 익숙한 패턴 탓에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어떤가. 전지적 의사 시점으로 나열된 증상을 읽어보기만 해도 피곤이 몰려오지 않나? 우리도 그러한데, 실제로 증상을 겪고 있는, 스스로를 불행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중인 환자들 본인은 얼마나 고단할까. 안타까운 일임에는 분명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건져낼 묘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국가에서 SNS 이용을 금지하기라도 하겠는가, 환자들의 핸드폰을 빼앗아 어플을 지우기라도 하겠는가. 정말 만약에 그렇게 한다손 쳐도, 문제 해결을 장담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우울’은 결국 마음의 문제다. 그 말은 곧, 마음에 변화가 없다면 절대로 극복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동시에, 마음만 다스리면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다는 것과도 같다. 원인이 명확한 카페인 우울증의 경우에는, 다행히 후자를 실천하는 것이 어렵지 않아 보인다. 머릿속에 자리 잡은 단어 하나만 도려내면 되니까.


그것은 당연히, 이야기의 원점으로 돌아와, ‘비교’.

정확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비교이다.




비교하지 않는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나, 행복해지려면 비교하지 않아야 한다. 비교에서 벗어나는 것은 행복을 위한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이라는 것이다. 간혹 비교를 통해 느끼는 우월감을 행복으로 착각할 수 있으나, 그것은 찰나일 뿐이다. 단언컨대, 비교의 속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에게는, 진정한 행복과 마주할 기회 같은 건 주어지지 않는다.


비교는 인간을 좀먹고 관계를 해한다. 백해무익하다. 부모의 비교는 자식을 가엾게 만들고, 선생의 비교는 학생을 망가뜨린다. 아내의 비교는 남편에게 절망을 안기고, 친구나 동료의 비교는 상대를 우습게 만든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며, 스스로를 타인과 비교하는 것 또한 두말하면 잔소리다.


나보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 열심히 노력해서 그의 삶을 따라잡으면 눈앞에는 더 행복한 사람이 나타난다. 다시 분발하여 새로운 이를 추격하면 또다시 눈앞에는 질투유발자가 등장한다. 과연 이 레이스에 끝이 있을까? 세계 1위 부자까지 쫓아가보면 세계 최고 행복이라는 결승테이프를 끊을 수 있을까? 당연히 그럴 수는 없다. 이것은 그저, 절대 끝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 위에서의 무의미한 레이스일 뿐이다.


그러니까, 쓸데없이 SNS나 들락거리면서 타인의 삶을 관음 하며 괜스레 부러워하지 말자. 본인을 확정적인 불행의 늪에 처박아 놓고선 탈출하지 못하는 자신을 혐오하지 말자. 내가 질투하는 누군가의 비범함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평범할 수 있고, 나의 지루한 하루도 어느 누군가에게는 특별하게 보일 수 있으니. 이제 그만 비교의 도돌이표에서 내려오도록 하자.


만약 그래도 비교를, 마치 진짜 카페인처럼 도저히 끊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래서 어제보다 오늘이 더 괜찮다면, 다른 사람 따위는 모두 잊고 마음껏 행복해 봐도 되지 않을까. 물론 전자가 월등히 낫다면, 조금은 슬프거나 자극받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렇다 하더라도, 타인의 빛나는 순간을 보며 스스로의 조도를 낮추는 어리석은 짓보다는, 자신을 꼼꼼히 살피는 시간을 갖는 편이 훨씬 더 현명한 선택이지 않을까.


장기하의 노래 ‘부럽지가 않아’에 이런 가사가 있다.

‘부러우니까 자랑을 하고 자랑을 하니까 부러워지고, 부러우니까 자랑을 하고 자랑을 하니까 부러워지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공연한 짓 하지 말고 ‘부럽지가 않은’ 사람이 되자. 세상은 나보다 잘난 사람으로 인한 박탈감 외에도 우울하고 답답한 일 투성이니까. 굳이 혼자서 긁어 부스럼까지 만들 필요는 없다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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