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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영 Dec 12. 2022

첫눈, 그리고

올 겨울의 첫눈이 내렸다. 나는 익숙하게 우산을 꺼내 들었고, 질퍽해질 출근길을 염려하였다.


눈이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반가움과 신비함을 주던 때가 있었는데. 분명 있었는데. 이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저 응고된 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다.


씁쓸하다. 새롭고 놀라웠던 것도 자꾸 보니 익숙해지고, 마냥 좋았던 것도 이제는 더 이상 설레지가 않는다. 그만큼 나이를 먹었고 세상에 찌들 만큼 찌들었다는 건데.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공연히 씁쓸하다.


한때는 많은 것들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처음이라는 단어 뒤에는 으레 껏 설렘이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처음 방문했던 대형 놀이공원의 진풍경도, 처음 비행기를 탔을 때의 짜릿했던 기분도, 첫 해외여행지였던 도쿄의 서늘한 밤공기도. 당시의 경험과 풍경과 감정들은, 모두 설렘이라는 포장지에 곱게 싸여 추억이라는 폴더 안에 고이 모셔져 있다.


수학여행 내내 꿉꿉했던 날씨도, 비행기에서 겪었던 귀 먹먹함도, 도쿄의 복잡 무쌍한 지하철까지도. 썩 유쾌하지 못했던 일들조차 처음이라는 꼬리표 덕분에 모두 함께 보관되어 있음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립다. 놀이공원과 해외여행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그때의 내가 느꼈던 설렘이 그립다. 다시는 오지 않을 인생의 첫눈과 다시는 느끼기 어려울 일렁거림이 그립다. 철부지 어린아이 같은 이야기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너는 내 인생의 첫, 사랑이다. 다른 무엇도 아닌 사랑에서의 처음이니, 너는 나에게 형용할 수 없이 커다란 설렘을 안겨주었던, 아니, 줄 수밖에 없었던 존재이다.


다른 어떤 처음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설렘. 너의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하나, 너의 모든 순간들이 나에게는 대체 불가능한 설렘으로 다가오던 때가 있었다.


영원할 줄 알았다. 그때는 정말 그럴 줄로만 알았다.


너와 함께한 매시간 매초가 나에게는 처음이었으니까.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던 날도, 특별할 것 없이 평범했던 날도, 예민하게 날을 세워 다투었던 날까지도. 네가 있었기에 그 다툼마저 새로웠고, 나는 그 벅차오름이 변함없이 지속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서로에게 첫눈 같은 존재가 되어갔다. 설렘과 새로움은 조금씩 빛을 잃었고, 결국 익숙함과 편안함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씁쓸하다. 그리고 그립다.


설렘의 빈자리를 참지 못하고 익숙함의 소중함을 알지 못해 서로를 놓았던 그때의 우리가 씁쓸하고, 사랑 앞에 조금 더 솔직했던, 최소한 지금보다는 더 뜨거웠던 그때의 내가, 그 시간들이 그립다.


처음은 삶에 단 한 번뿐이라는 것을, 설렘은 처음에 뒤따라오는 선물이라는 것을 이제는 잘 알기에. 아무 의미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는다. 이 마음 그대로 돌아간다한들 별 다를 게 있겠냐만, 그때의 나와 너, 우리를 떠올릴 때마다 밀려오는 가슴속 헛헛함은 오래도록 피할 수 없을 것만 같다.


뭐, 어쨌든 이제 퇴근시간이다. 다시 무미건조하게 우산을 챙기고 점퍼 지퍼를 끝까지 올린 채 회사를 나선다. 하늘을 보니 아침보다는 눈발이 약하다. 펼치려던 우산을 집어넣고 주머니에 손을 꽂는다. 이 정도 눈은 그냥, 맞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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