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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준엽 Jul 12. 2017

'인상주의'에서 용기를 배우다

마네(Manet)와 쿠튀르(Couture)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는 스마트폰이 아닌 우리에게 절실하다


방전된 우리의 두꺼비집을 억지로 작동시키며 하루는 시작된다. 동시에 전기만 먹으면 온종일 활력이 넘치는 스마트폰을 보면 무조건 반사로 한숨이 나온다. '아, 하루가 시작이다'라며 말이다. 내게 직면한 많은 일들, 그리고 한 줌 정도의 미래를 상상하면 가슴 한편이, 아니 이곳저곳이 답답하다.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삶의 압력
= 중력(지구가 끌어당기는 힘) +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스트레스가 누르는 힘)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중력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으로 우리 자아를 바닥으로 누른다


우리를 누르는 보이지 않는 힘은 중력이라는 지구의 끌어당김과 함께 '정신적 중압감'이 존재한다. 중력은 죽을 때까지 일정한 정도의 힘으로 우리를 누르기 때문에 적응할 수 있지만, 정신적 중압감은 매번 다르고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기하 적으로 커진다는 법칙(?)으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이로 인해 찌그러지는 자존감은 지금 하는 모든 것들에서 '용기'를 잃게 만든다.


용기는 새로운 일을 준비하는 사람에게, 또한 무언가를 향하여 달려가는 이들 모두에게 해당한다. '필라테스를 배우고 싶은데 내가 할 수 있으려나', '카페나 인터넷 쇼핑몰을 해보려는데 내가 과연...' 등 너무나 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용기'라는 동력이 없다는 핑계로 무언가를 미루거나 시작 전부터 좌절한다.


도대체 왜 용기는 생기지 않을까? 미술사에서 가장 큰 혁신과 변화를 몰고 온 '인상주의'를 통해 용기에 대하여 다시 정의하고자 한다.


물론, 인상주의가 어느 날 혜성처럼 등장한 것은 아니다. 부댕, 도비니, 용킨트 등 수 많은 작가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부댕의 작품)


인상주의는 말 그대로
내가 느끼는 감정 그 자체이다


인상주의(impressionism)라는 단어가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쉽고 명료하다. 그 이유인 즉, 인상주의라는 말 자체가 '우리는 내용이 없어'라는 말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그 사람 인상이 별로야'라는 말처럼 여기서의 인상은 직관에 가깝다. 그러므로 인상주의 작품을 보면서 한참을 고뇌하는 것은 불필요한 작업에 가깝다. 그림에 담긴 필(?)을 느끼면 그만이다.


마네는 인상주의 작가들에게는 우상이었다. 마네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담은 작품으로, 오른쪽 모서리에 키가 큰 사내가 '모네'이고 액자에 걸쳐진 모자 쓴 사내는 '르누아르'다.


인상주의라는 커다란 사조에서 주춧돌이 되는 작가가 바로 '마네'이다. 마네를 검색해보면 대부분 '이건 알지!'라는 반응을 보일 것으로 예상한다. 냄새나는 화장실에서 식당까지 장소를 불문하고 마네의 작품을 무의식적으로 빈번하게 접했기 때문이다. 수 백 년이 지난 지금도 자신의 곁에 걸어두고 싶은 작품으로 남아있다. 그런 마네에게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스승인 쿠튀르(Couture)에 있다.


마네의 스승인 쿠튀르의 작품이다. Tomas Couture - ‘Romans Of The Decadence’(1847)


위의 작품은 마네의 스승인 쿠튀르의 작품이다. 마네의 작품과 비교해보면 어쩐지 어색하다. 그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 마네의 작품을 잠시 감상하자.


Édouard Manet - A Bar at the Folies-Bergère(폴리 베르제르의 바)(1882)


Édouard Manet - 'Le Déjeuner sur l'herbe'(풀밭 위의 점심 식사) (1863)


마네는 그림이 그림다운 것으로
존재하도록 시도한 작가이다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바', 그리고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스승인 쿠튀르의 작품을 비교해보면 언뜻 보아도 너무 다르다. 스승의 작품은 뭔가 웅장하고, 기품이 느껴진다. 그러면서 '와, 진짜 잘 그리네. 저 사람은 천재다'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반면, 마네의 작품에서는 그런 감정이 상대적으로 적다. 그러나 쿠튀르는 미술사 한쪽에 남아있을 뿐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마네는 지금까지도 '거장'으로 기억된다. 마네를 만든 원동력이 무엇일까?


답은 '용기'이다. 마네 이전의 미술사에서 그림은 모순적으로 그림답지 않았다. 마네의 스승인 쿠튀르의 작품을 다시 살펴보면 그의 작품에는 공간이 느껴진다. 즉, 평면인 그림에 공간의 생기를 불어넣은 것이다. (이러한 변형, 왜곡 등을 통해 눈속임하는 것을 '데포르마숑'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어떤 사람과 조형물은 앞에 있는 것 같고, 누구는 뒤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저 멀리서 성스러운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느낌을 받게 한다. 평면인 그림에서 말이다. 밀레의 '만종'


평면에 공간을 만드는 작업을 넘어 밀레의 '만종'처럼 있지도 않은 종소리를 그림에서 느껴지도록 그렸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자세히 그림을 살펴보고, 공간을 상상하며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미간을 최대한 찌푸리고 찬찬히 쪼개어 살펴보아야만 했다. 즉, 그림 그 자체를 느끼기 어렵다.


반면, 마네의 작품은 그림이 그림답다. 예를 들어, 위의 그림 중 '폴리 베르제르의 바'를 보면, 왼쪽 모서리 상단에 있는 서커스 단원의 상체가 잘려있다. 미술사에서 상체를 완전하게 자른 것은 거의 최초이다. (사진에서 등장하는 기법이다) 이외에도 그림자가 전혀 없는 피사체와 정물화로서 완벽한 바 테이블 위의 대상들까지 뭐 하나 '현실'같이 느껴지는 것이 없다. 그냥 그림으로서 '좋다'라는 느낌을 준다.


생로랑이 입생로랑(YSL)인 시절, 마네의 올림피아(Olympia)를 패러디하여 광고로 사용하였다. 이처럼 이미지 광고에서 명작을 이용하는 경우는 부지기수다.


마네의 작품은 유사한 이미지를 끊임없이 접해 온 우리에게 어색함이 없다. 당대의 사람들에게도 그러했을까? 모든 작가가 그림을 최대한 실제와 가깝게 그리기 위해 노력하고, 웅장한 것을 그리는 상황에서 그림을 그림답게, 너무나 평범하고 쓸모없는(?) 대상을 그리는 행위는 그에게 엄청나게 많은 비난과 욕설을 선사한다. (실제로 그는 너무나 심한 욕설로 인해 욕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을 정도였다)


미술의 발전은 시대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이뤄낸 작가의 '용기' 때문이다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던 많은 인상파 작가들은 낙선을 반복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고유한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런 비난에도 끝까지 그가 자신의 방식을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은 용기 때문이었다. 그의 용기는 단순히 '스승보다 더 잘 그려야겠다'가 아니었다. '그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내가 그리는 그림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려야 하는지 등 본질적인 문제를 피하지 않고 스스로 직면했다. 그 안에서 끊임없이 자기비판과 반성적 사고를 통해 자신만의 그림에 대한 '개념'을 갖게 된다.


개념화는 자신의 스승이 손기술을 이용하여 주어진 것에 답습하고, '내가 이 정도로 잘 그리니 너희는 보고 감탄이나 해라'라는 식의 스승의 얕보는 시야를 부정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에게 스승보다 잘 그리는 손기술을 얻는 것은 용기가 아니었다.


그의 용기는 '그림이 미에 대한 독립적 의식을 통해 존재해야 한다'라는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도록 한다 . 이는 평면인 종이와 색, 벽에 걸어야만 하는 작품의 당위성을 잘 살려줄 수 있는 그림을 그릴 것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거기서 인상주의는 출발한다.


용기는 단순하게 남들과 다른 것을 추구하거나 누군가를 뛰어넘는 행위가 아니다
'자기비판'과 고민하는 대상에 대한 자신만의 '개념화'에서 시작된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에게 당면한 일을 더 잘하고자 할 때, 혹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가져야 하는 용기의 의미가 무엇일까? 단순하게 '힘내자' 혹은 '내가 저 자식보다는 잘할 수 있으니까 한 번 도전해보자'라는 독기 어린 접근은 용기가 아니다. 그러한 접근이라면 성공을 해도 쿠튀르보다 손기술이 좋은 작가 정도로 남을 것이다


용기는 없는 힘을 쥐어 짜내는 것이 아니라 직면한 문제가 도대체 왜 문제인지를 시작으로, 끊임없이 질문과 비판을 하고, 타인의 시선으로 살펴보는 반성적 사고를 통해 자신의 개념을 만드는 행위이다.


어른들의 이런 대답은 용기를 얻는 원동력인 '질문'을 사라지게 만든다.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자신에게 답을 구하자.


그러니 힘이 나지 않는 우리의 연약한 육체를 더 혹독하게 밀어붙이지 말자. '더 잘해!'라고 말하지도 말자. 간단한 질문부터 시작하자. 용기가 필요한 일을 종이 중앙에 적고, 마인드맵(mindmap) 방식으로 문제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생각나는 데로 확장해보자. (생각을 시각화하는 힘이 막강하다는 것은 확인된 사실이니 믿어도 좋다)


그것이 진정 용기인지, '왜' 그래야 하는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등 왜, 왜, 왜를 외치며 쓸데없는 질문을 이어가다가 마지막에는 어른들에게 핀잔(?)을 들었던 그때의 모습으로 돌아가 보자. 생각을 정리하고 이유를 찾는 과정에서 마네가 그랬던 것처럼 나만의 용기가 생겨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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