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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영 Oct 22. 2024

네덜란드 국가는 알고 보니 반란군의 출사표더라고요

일인칭 시점에서 쓰인 국가

Wilhelmus van Nassouwe / ben ik, van Duitsen bloed, / den vaderland getrouwe / blijf ik tot in den dood. / Een Prinse van Oranje / ben ik, vrij onverveerd, / den Koning van Hispanje / heb ik altijd geëerd.

In Godes vrees te leven / heb ik altijd betracht, / daarom ben ik verdreven, / om land, om luid gebracht. / Maar God zal mij regeren / als een goed instrument, / dat ik zal wederkeren / in mijnen regiment.

Lijdt u, mijn onderzaten / die oprecht zijt van aard, / God zal u niet verlaten, / al zijt gij nu bezwaard. / Die vroom begeert te leven, / bidt God nacht ende dag, / dat Hij mij kracht zal geven, / dat ik u helpen mag.

(...)

Mijn schild ende betrouwen / zijt Gij, o God mijn Heer, / op U zo wil ik bouwen, / verlaat mij nimmermeer. / Dat ik doch vroom mag blijven, / uw dienaar t'aller stond, / de tirannie verdrijven / die mij mijn hart doorwondt.

나사우 가문의 빌럼, / 나는 독일인의 혈통이다. / 조국에 충성을 다함을 / 죽을 때까지 계속 할 것이다. / 오라녜 공으로서 / 나는 자유롭고 두려움이 없다. / 나는 스페인 국왕에게 / 늘 충성을 맹세해왔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면서 / 나는 늘 시험을 받아왔다. / 이로 인하여 나는 조국과 백성을 / 빼앗기고 내몰리게 되었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좋은 도구로 / 사용하여 인도하실 것이다. / 그럼으로 나는 돌아올 수 있으리라 / 나의 영토로.

고통 중에 있느냐 나의 종들아 / 본성이 신실한 자여. / 하나님께서는 그대를 결코 떠나지 않으시리라 / 심지어 절망 중에 있더라도. /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 밤낮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할 것이다. / 그럼으로 그 분은 나에게 힘을 주실 것이고 / 나는 그대를 도울 수 있으리라.

(중략)

나의 방패요 신뢰할 분은 / 오 나의 주 하나님 당신이시나이다. / 내가 의지하는 분은 당신이시니 / 나를 결코 떠나지 마시옵소서. / 그러하신다면 나는 경건하게 남아 / 당신의 종으로써 늘 헌신하며 / 폭군을 몰아낼 수 있으리이다, / 나의 사무치는 마음으로.

- 네덜란드 국가 '헷 빌헬뮈스(Het Wilhelmus)' 노랫말 중에서.


수카르노가 그토록 이기고 싶어 했던 네덜란드 국가 '헷 빌헬뮈스(Het Wilhelmus)'국가치고 가사가 특이합니다. 인칭 시점으로 쓰였거든요. '나사우 가문의 빌럼'이라는 사람이 다짜고짜 나와서 자신이 신앙심이 얼마나 깊은 사람인지를 장황하게 떠들어댑니다. 그리고 스페인 국왕에게 왜 반기를 들었는지 변명을 늘어놓다가, "적들을 물리칠 힘을 주소서" 신께 간절히 기도드리며 수다를 끝맺습니다. 결국 우리 편 이기게 해달라는  말 하려고 명분을 차곡차곡 쌓은 거죠.


15절까지 이어지는 네덜란드 국가 '헷 빌헬뮈스'


그의 구구절절한 하소연은 무려 15절이나 이어집니다. 인내심을 잃지 않고 가사를 끝까지 읽더라도, 하품이 절로 나옵니다. 이 곡은 분당 66박자의 느린 박자로 연주되거든요. 1절이 연주되는 데 대략 1분이 걸립니다. 똑같은 선율이 무려 15번이나 반복되니까, 이걸 다 들어주려면 15분이나 걸립니다.


그래도 듣다 보면 꽤 괜찮은 곡입니다. 좁은 음역 안에서 점진적인 도약과 하강을 반복합니다. 마치 배가 마른 날 잔잔한 파도를 타는 것 같아요. 파이프 오르간 소리는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 라야'를 오케스트라 편곡할 때 '헷 빌헬뮈스'처럼 장엄하게 들리도록 박자를 느리게 잡아보라고 고집을 부려서 편곡자를 괴롭혔다고 합니다.


네덜란드 국가 '헷 빌헬뮈스' 악보




2013년에 개봉한 인도네시아 영화 〈수카르노(Soekarno)〉는 인도네시아에 막 상륙한 일본군이 네덜란드군 장병들을 포로로 잡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습격하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촉수는 이듬해 1월에 이미 인도네시아에 닿습니다. 만주를 침략한 뒤 열강들의 견제를 받아서 고립되어 버린 일제는 자기 땅에 쓸만한 천연자원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석유와 고무 같은 전쟁 물자가 풍부한 인도네시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거든요. 영화 속 네덜란드 군인들은 항복하지 않고 '헷 빌헬뮈스'를 부릅니다.


"나사우 가문의 빌럼 / 나는 독일인의 혈통이다 / 조국에 충성을 다함을 / 죽을 때까지 계속 할 것이다 / 오라녜 공으로서 / 나는 자유롭고 두려움이 없다" 


곧 죽게 될 걸 알면서도 여기저기서 "내가 빌럼이다"라며 노래를 불러대니, 제 가슴 속에도 꿈틀거리는 뭔가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더라고요. 박자가 빠르고 곡조가 기세등등한 행진곡이 아니더라도 용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걸 이때 깨달았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일본군은 1942년 2월에 자바해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네덜란드, 영국, 미국 연합 함대를 물리쳤고, 3월 8일에 판 스타켄보르 스타추베르(Tjarda van Starkenborgh Stachouwer) 동인도 총독을 체포하고 인도네시아 점령을 완수합니다. 그런데 그날 고별 방송을 송출한 라디오방송국(NIROM: Nederlandsch-Indische Radio-Omroep Maatschappij)이 '헷 빌헬뮈스'를 틀어 놓고 청취자들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지요. 직원들은 모두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형장에서 노래를 부르는 이들을 상상해 봅니다. 그렇다면 노랫말 속의 이 '빌럼'이라는 남자는 도대체 누구인가요?




자신이 독일인의 피를 타고났다고 고백하는 빌럼은 네덜란드 독립전쟁(1568-1648)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독일 나사우(Nassau) 가문 출신으로 오라녜 공국(현재 프랑스 남부)의 공작 칭호를 물려받아 '오라녜 공'으로 불렸습니다. 빌럼의 사촌이 사망했을 때, 카를 5세(Charles V, 1516~1556)는 이제 열한 살 난 빌럼에게 부모님의 영지를 상속받으려면 브뤼셀로 건너와 황궁에서 교육을 완수하고, 가톨릭교도로서 성장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카를 5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쓴, 합스부르크 가문의 최상위 군주였습니다. 당시 스페인,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남부 등이 모두 합스부르크 가문의 땅이었거든요. 빌럼의 아버지는 루터교회를 신봉하는 신교도였으나 카를 5세가 내건 조건을 수락하고 아들을 보냅니다. 카를 5세의 눈에 든 빌럼은 승승장구하며 네덜란드에서 출셋길을 걸었습니다. 카를 5세는 스페인 국왕 자리를 아들인 펠리페 2세(Felipe II de Habsburgo, 1556~1598)에게 물려줬는데, 펠리페 2세는 빌럼을 네덜란드 총독(stadhouder) 자리에 앉힙니다. 그렇다면 빌럼이 배은망덕하게도 스페인 국왕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지요.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을까요?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를 스페인 왕국의 일부로 유지하며 통치했는데, 그간 네덜란드 도시들이 누려온 자치권을 무시하고 귀족을 억누르는 중앙집권적인 통치를 강화하려 했습니다. 게다가 가톨릭 신앙에 전심을 바쳤던 펠리페 2세는 플랑드르와 브라반트 지방을 중심으로 개신교(주로 칼뱅주의)가 확산하던 네덜란드에 가톨릭 신앙을 엄격하게 강요하면서 이단 심판을 하고 종교적 탄압을 가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프랑스와 여러 전선에서 전쟁을 벌이면서 막대한 전비(戰費)를 네덜란드에 떠넘겼습니다. 1558~9년에 네덜란드 사람들이 짊어졌던 세금 부담은 1540년대와 비교할 때 2.5배나 높아졌다고 합니다. 네덜란드는 종교 탄압에 경제적 착취까지 당한 거죠. 네덜란드에서 반란의 싹이 트기 시작합니다.


Edel en hooggeboren, / van keizerlijke stam, / een vorst des rijks verkoren, / als een vroom christenman, / voor Godes woord geprezen, / heb ik, vrij onversaagd, / als een held zonder vreze / mijn edel bloed gewaagd.

고귀하고 높은 태생으로서, / 황실 가문의 후손으로서, 왕국의 왕자로 선택받은 자로서, / 경건한 성도로서, / 하나님의 영화로운 말씀을 위하여, / 나는 자유롭고 주저함이 없도다. / 두려움 없는 영웅과 같이 / 나의 고귀한 피를 걸어보리라. - 네덜란드 국가 《헷 빌헬뮈스(Het Wilhelmus)》노랫말 중에서.


반면, 아버지가 신교도였던 오라녜 공 빌럼은 종교적 관용을 주장하면서 구교(가톨릭)와 신교 간의 반목을 청산하려고 노력한 덕분에 네덜란드 사람들의 신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1563년에 신교도들이 자신의 영지 안에서 신앙을 자유롭게 실천할 수 있도록 관용을 베풀었고, 종교적 양심의 자유에 반하여 자행되는 조직적인 신교도 박해를 네덜란드에서 중단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하며 펠리페 2세 정책에 과감하게 맞섰습니다. '헷 빌헬뮈스' 가사에도 그의 양심 선언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런데 날로 커가는 교세를 믿고 과격해진 신교도들이 가톨릭 성당에 난입하여 사제들을 공격하고, 성물(聖物)은 우상에 불과하다며 파괴하는 행각이 곳곳에서 벌어지게 됩니다. 결국 스페인에서 알바 공작(duke of Alba)이 진압군을 끌고 네덜란드로 들어오고, 이단심문소가 세워져 많은 신교도가 처형당합니다. 빌럼은 독일에 있는 자기 영지로 몸을 피했고, 그를 지지하는 신교도 독일 귀족들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용병을 이끌고 네덜란드로 쳐들어옵니다. 80년 동안 계속될 네덜란드 독립 전쟁은 이렇게 벌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노랫말은 반란군의 대의명분이요, 독립 전쟁의 출사표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 노래를 빌럼이 스스로 지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참고문헌:

Blockmans, W., & Hoppenbrouwers, P. (2017). Introduction to Medieval Europe 300–1500 (3rd ed.). Routledge.

Kennedy, J. C. (2017). A Concise History of the Netherland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Tracy, James. (2008). The Founding of the Dutch Republic: War, Finance, and Politics in Holland, 1572-1588. Oxford University Press.

Jonathan Israel. (1998). The Dutch Republic: Its Rise, Greatness, and Fall 1477-1806. Oxford University Press.

Tekst van het Wilhelmus. (검색일: 2024년10월19일). Het Koninklijk Huis. https://www.koninklijkhuis.nl/onderwerpen/volkslied/tekst-van-het-wilhelmus

Radio Chief Held at Gunpoint. (1946년6월29일). The ABC Weekly. https://nla.gov.au/nla.obj-1275078733/view?sectionId=nla.obj-1334117303&partId=nla.obj-1275085627#

Orange and Nassau. (검색일: 2024년10월22일). Royal House of the Netherlands. https://www.royal-house.nl/topics/orange-and-nassau/history

William of Orange (1533-1584). (검색일: 2024년10월22일). Royal House of the Netherlands. https://www.royal-house.nl/topics/william-of-orange-1533-1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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